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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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시민(金時敏)

p05.png 5. 각종 역사 자료 종합

11)진주시사(상. 진주시사편찬위원회/1994.) 기록 내용 (2002. 7. 17. 윤만(문) 제공)

 

▣ 1차 진주성 전투전 진주지방의 제 상황. pp559~564.

 

1차 진주성 전투의 전개과정. pp564~577.이 19면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임진왜란 3대첩중 김시민 장군의 이 진주대첩은 너무나 유명하고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합니다.   

진주시사(하)/진주시사편찬위원회/1995.

진주성(晋州城) pp45~47.

-- 사적(史蹟) 제118호. 1960.10. 7. 지정 면적 176,804㎡ 둘레 1,700m.

-- 성곽(城廓)은 읍성과 산성의 형태를 절충한 평산성(平山城)으로 석성이며 촉석성 (矗石城)또는 진양성(晋陽城)이라고도 한다.

-- 언제부터 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제가 진주에 거열성(居列城)을 쌓았다는 기록이나 신라가 여기에 강주(康州)를 설치하였다는 기록 등을 참고로 하면 삼국시대 말 또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성이 축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려말 왜구들이 극성하여 이에 대비코자 우왕 5년(1379)에 강주진장(康州鎭將) 배극렴(裴克廉)이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 때까지 토성이던 촉석성 (矗石城)을 석축으로 수축하였다. 조선 선조 24년(1591)에 성곽 전반을 중수하였다.

-- 조선초의 학자요 관료였던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의하면 그가 소년시절에는 성벽이 무너져 있었으며 그 자리에 토성을 쌓았으나 얼마못가 무너지고 다시 관민이 합세하여 석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때 성의 둘레가 4,539척 높이가 15척이며 성문은 예화문(禮化門 ; 남쪽), 의정문(義正門 ; 서쪽), 知濟門(지제문 ; 북쪽)의 셋이 있었으며 모든 문위에는 루(樓)가 서 있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못을파서 누구든 이 못을 지나야만 성에 접근할 수 있었다.

-- 또한 이 곳은 영호남을 잇는 교통의 요로로써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벌어졌던 진주성전투는 당시 군량미의 공급원이었던 호남지방을 보호하기 위해 관민이 함께 한 필사적인 전투로서 행주대첩. 한산도대첩 등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 그 뒤 선조 41년(1608) 창원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을 이곳으로 옮기기 위해 외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규모는 성벽 높이 25척, 둘레 10,330척으로 성의 외곽에는 호(濠)를 파 남강에 연결시켰다.

-- 그리고 내외성에는 내영문(內永門), 외수문(外水門), 암문(暗門), 촉석문(矗石門), 내북문(內北門), 촉석루(矗石樓), 함옥헌(含玉軒), 서장대(西將臺), 화약고(火藥庫), 관덕당, 공진당, 포정사(布政司), 군기고(軍器庫), 중군영(中軍營) 등이 있었다.

-- 진주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79~1984에 걸친 진주성복원정비사업에 의해서인데 이 때 성내에 위치하고 있던 민가 750여 채가 철거되고 성내 서쪽에 국립 진주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 동쪽에는 임진왜란시에 이곳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한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이 건립되었다. 현재 성내에는 이 외에도 성의 출입구인 촉석문(矗石門), 홍북문(홍北門)과촉석루(矗石樓), 의기사(義妓祠), 쌍충각(雙忠閣),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호국의 종,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북장대(北將臺), 서장대(西將臺), 포루(包樓), 호국사(護國寺), 창열사(彰烈祠), 3.1운동기념탑비, 그리고 경충사(景忠祠), 경덕사(景德祠) 등이 있으며 영남포정사와 경충사 사이에는 진주시 일원에 산재해 있던 각종 유애비(遺愛碑), 불망비(不忘碑), 선정비(善政碑)등을 모아둔 비석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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