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김시민(金時敏)

p05.png 3. 주요 자료 소개

2) 신도비 소개 (2003. 5. 12.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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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충민사 내) (2003. 6. 16. 태서(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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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원문> (2003. 5. 항용(제) 제공)

 贈 忠仗義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上洛府院君 行嘉善大夫慶尙右道兵馬節度使贈諡忠武公神道碑銘 幷序

<槐山之金相馨甫, 余之姨從也. 日持一事蹟錄而來示曰" 我先祖忠武公, 殉忠大節動人聽聞而神道無刻爲其後裔者安得無憾願爲我銘之 余自顧非其人而且不文獻之甚固囑之尤固不獲己述之如左 謹按 公諱時敏 字勉吾 姓金安東人:실제 비문에는 없음:편역자 주>

 

(公姓金, 諱時敏, 字勉吾, 安東人,비문에 있는 내용:편역자주)

 

 麗朝忠烈公諱方慶之十二代孫也. 高祖諱壽亨, 掌隷院司議, 贈左承旨, 曾祖諱彦默, 贈吏曹 判, 祖諱錫成均進士,贈領議政, 考諱忠甲, 號龜巖, 官持平, 値乙巳士,禍謫淸州後宥還, 知安岳郡事, 贈左贊成,  贈貞敬夫人 昌平李氏 奉成春女,

 

 以嘉靖三十三年 甲寅八月二十七日 生公于木川栢田村, 幼有絶異之資. 八歲時, 領隣里兒童隊, 作戰陣之 於路傍, 適天安 , 過去, 公使一小童, 高聲呼喝,  爲之下馬,  手撫頂, 仍入賀於其父持平公曰 "設陣爲 , 志氣不凡, 喝官長下騎, 其氣可畏, 而狀貌雄傑, 出類前程萬里"云 九歲時, 洞近大川, 有巖有淵, 淵中有大蛇窟, 時或民畜近窟者, 輒遭呑 . 公欲去其害, 挾桑蓬弓矢, 至川邊. 使童先行登巖, 而挑之, 兒懼不敢前, 公欲殺之, 是兒懼 走上. 俄而飄風忽起, 水波蕩 , 大蛇果出繞岩, 領 向人勢獰, 公便前立射 之水, 赤十餘日, 長老皆驚, 聞者莫不狀異之, 至今民指謂金公射蛇岩及. 長魁梧壯偉, 志度不凡, 負氣喜爲大言, 人皆笑以爲誇誕.

 

 宣廟朝戊寅登武科. 嘗以訓鍊判官, 議事于兵判, 兵判不用其言, 公抗論不已, 兵判不能以聲氣壓之, 公卽起立脫帽而投之, 以足踏碎之曰 "大丈夫非此物, 安能受侮於人."卽趨出棄官, 落拓不遇, 時人莫知其奇也. 久之爲軍器寺判官李相國憲國, 爲提擧, 器異之, 白于上, "毋令補外, 留爲緩急用, 鄭相國彦信 趙重峰憲 迭薦有禦敵之才, 名將中上駟云" 其後庚寅, 爲晋州判官, 公之叔父 文肅公 諱悌甲 曾任晋州牧, 有異政, 及是, 晋人喜曰 "是金使君之姪也." 一境 翕然. 公爲治, 克繩, 其武弛張, 得宜德施, 而威行吏畏而民懷.

 

 宣祖大王二十五年 壬辰, 倭關伯平秀吉, 遣其將平秀家等, 領兵來寇平行長率平義智平調信, 爲先鋒, 過海, 陷釜山, 是四月十三日也. 翌朝, 入東萊府使宋象賢被死, 賊兵乘勝長驅, 所向焚掠, 密陽府使朴晋, 欲遮截中路, 以衆寡不敵, 未能拒之. 諸將奔潰, 其鋒莫能當, 都察使金 , 以晋陽不固, 難可守, 使公就佐金大將沔牛峴之陣矣. 金方伯誠一適至, 使公還守晋陽, 時牧使適死, 人心遇難, 大駭擧懷逃散. 公攝州事, 令曰 "敢走者斬, 修器械繕城池, 爲死守計焉." 是時, 主上聞, 巡邊使李鎰遇賊于尙州, 見敗申砬到忠州, 背達川, 而陣爲賊鋒沒死, 金灘漢水以南人烟一空, 賊勢甚盛難敵, 奉 廟社主去京城, 至松都留二日, 賊由東路, 入京, 八路所在列郡, 望風奔潰, 敢無 其鋒者. 是時, 公聞 大篤西幸, 京城旣陷設,  殿牌于大廳, 焚香再拜, 俯伏慟器, 涕流良久, 切齒奮臂而言曰"此賊不討, 國恥何雪? 此臣子死節之日." 於是, 鄕兵四散者, 招集之, 人士之竄匿者, 召諭之. 繕修城機整備軍律, 待敵泗川城中兇賊, 彌漫, 將逼晋境. 公獨許殉國, 揮泣誓衆, 遂出兵擊, 逐泗川固城之賊大捷, 又破賊陣于鎭海, 擒其將平小泰, 領兵赴釜山, 攻破賊陣, 軍聲大振, 開寧錦山之賊, 聞風, 捲退. 是時, 行在絶遠, 道路多壅, 捷音未達, 故朝廷不能褒, 勳慟歎不已. 公大修守禦且以待賊六日, 賊果大至圍城, 城中兵不滿千. 賊將平行長合諸屯賊數百萬, 攻圍十餘晝夜, 衆寡之勢, 如山壓卵蟻, 援不至, 公只以忠義, 激 , 與夫 人, 親持牛酒, 巡餉士卒, 壅容相待, 吹笛鳴琴, 若無事, 時軍情恃, 以無恐, 督諸將, 乘機投 , 輒出神奇, 屢進而屢却之, 賊勢大挫, 積屍如山. 忽大雷雨晦暝, 賊驚, 惑乘夜退遁, 捷報上聞之, 就拜牧使. 賊酋欲報是役之敗, 與昌原釜山金海諸賊, 合勢, 九月五日, 直到州東馬峴北峰, 周覽形勢, 馳耀兵着, 公令視若不見, 不許妄費一丸一箭, 但令城中騎士五百餘人, 馳突於賊所見處, 又於城內通望處, 建龍大旗, 多張 幕, 盡取城中男女老弱, 皆着男服, 以壯軍容, 卽抄驍健人, 登山候望, 賊數百萬結陣于州東臨淵臺等處. 初六日, 早朝賊自大灘, 一時騎馬長驅, 分作三陣, 一陣屯聚于順天堂上, 俯瞰城中, 一陣列立於鳳嗚樓前, 一陣直越順天堂山與鳳嗚樓, 倭爲一陣而順天堂結陣之倭銃手萬餘名, 向城中齊放鐵丸, 有如轟雷飛雹, 數百萬, 一時大呼, 聲振天地. 城中全不動搖, 寂若無人, 俟其勢衰, 亦爲鼓 終夜戒嚴, 賊中兒童, 周城外大呼曰 "京城己陷, 八路崩潰, 如籠晋城, 汝何能守? 莫若速降之爲愈也. 今夕介山甫來, 則汝將頭骨, 懸於旗上云." 城中之人, 不勝忿怒, 高聲欲叱之, 公禁勿與語.

 

 翌日, 賊盡斫公私長竹, 或束或編, 多取松枝, 高積於陣前, 又作三層山臺, 公料賊多積松枝者, 欲緣踰城也, 構作層坮者, 欲輪轉壓城也. 公於是預備火具, 而恐其生濕難燒, 紙 火藥, 藏於束薪, 擬投城外, 以燃松竹, 城上多置震天雷  藜  大石塊, 欲擊搏城之賊, 又備長柄斧鎌等物, 擬破輪轉山臺, 女墻內, 又多設釜沸水, 以備揚湯灌賊, 伏軍於 內, 使不立視, 多造 人, 彎弓持滿出沒於 上, 嚴勅軍人勿放虛矢, 常川投石, 使賊不敢近城, 是夜月落後, 賊於城外, 築士成壘, 益造層坮 ,以爲衆軍直上之計, 公親放玄字銃, 洞貫造臺之, 倭倭懼小退. 初八日賊向城中, 放 , 終日不絶. 公以玄字箭穿過竹編, 又貫木板, 仍貫賊胸, 卽死, 厥後, 賊不敢望山臺. 是昏, 列炬往來, 有似相約之狀. 有兒童走到新北門外, 乃本州被虜者也, 因問賊情, 則曰明日曉頭幷力攻城云.

 

初九日四更初, 明火各幕載 出去, 佯示退去之狀, 以怠我軍, 而滅火潛還. 十日四更, 賊數 十萬肉薄東門新城, 作三層 面 人, 次次登梯, 騎倭數百萬, 隨後突進, 放丸, 如雨呼聲, 若雷. 將倭剛騎馬, 橫行揮 督戰, 公在東門北隔臺, 率射士, 放震天雷 藜 , 或投大石, 或投火鐵, 或焚藁亂投, 或揚湯灌賊, 男女老弱, 亦爲下石投火, 城中瓦盖茨, 殆盡. 賊踏菱鐵, 中弓弩, 殞矢石, 焦頭爛額者, 無數, 又爲震天雷所觸,  屍如麻. 良久東方欲明, 賊勢頓挫, 日至辰巳, 乃退走, 是戰也賊兵死者, 不知其數, 賊徒卽爲曳投之閭閻, 烈焰中將倭之屍, 入籠擔去, 斬級之數, 亦多. 賊退後, 閭家燒骨積在, 被虜人及牛馬, 盡委遁去, 是以保晋城, 非但此城, 保障湖南湖西內浦賴以得完, 國家中興兵粮機械, 皆取辦于兩湖焉, 此非國運之幸歟? 本道方伯金誠一, 卽日馳啓,  宣廟嘉之, 命陞秩嘉善, 授以兵使, 仍兼牧使. 公戰捷之日, 檢屍巡城, 有一倭, 伏於燒骨積屍中, 放丸中公左額, 乘輿還府第. 公蹶然起坐曰 "吾已矣, 而不可使虜賊之丸着在吾頭." 遂命以木, 釘決創拔丸, 未及論賞, 而卒, 是年十二月二十六日也, 時年三十九.

 

訃聞 上震悼, 命贈兵曹判書. 公之弟諱時若, 曾隨兄滯, 在晋州中, 當難, 智謀形貌, 難兄弟, 戰役內助之功, 不少. 公臨終秘托曰 "汝切勿發喪, 當依舊, 管督對敵, 以待後任可也." 卒後翌年, 癸巳軍務(?)受後發喪, 則城中士女哭聲, 如雷, 湖南士女聞之, 皆相流涕, 靡我公, 我死久矣. 癸巳之慘敗,  盖平秀吉憤前日大敗, 令倭諸將歸路幷力屠滅晋城, 然後和議可也. 吾將官死者五百, 軍兵死者數十萬, 以計之, 未有古今如此慘戰云故然也, 公之壬辰大捷可徵矣,  當是時本道渙散, 無人見, 知行在絶遠, 未達朝廷未詳其實蹟. 忠烈之功, 與李延 廷安之事比, 而等之, 非正論也, 此白沙相公所記, 荷潭金尙書之言,  壬辰三大捷, 李統制之露梁, 權元帥之幸州, 金節度之晋州是也, 其功固皆 爀人耳目, 而當時諸公之論, 或以匹之, 或以爲過之, 則公之偉烈, 盖可見矣. 亂後十三乙巳, 朝廷追策公勳, 贈 忠仗義協力宣武功臣 封上洛君, 後又追贈議政府領議政加府院君. 噫公起於晋州判官, 獨守孤城, 却大敵, 全嶺南, 其神謀秘計, 如非風雲變幻之術, 何以 其鋒耶? 幸哉. 天若不生此人, 則國家何以扶脈, 賊何以 挫, 人何以識君臣之分, 萬世何以識殉忠也? 史可如信, 其必有大書特書, 壬辰之亂, 表表樹勳, 乃金節度一人而己. 當時戰捷之實蹟, 尙無詳悉者, 歎惜者是也. 按日本史只載晋州大敗而外, 無有見敗之說, 以此觀之, 其偉烈巍勳, 誰其匹之? 只就金鶴峰誠一啓狀, 晋州誌, 克賊之事, 及白沙李恒福 荷潭金時讓諸名公所記述, 及進士成汝信所撰全城却敵碑, 與鹿川李濡謚狀, 載錄而撮要.  配贈貞敬夫人扶 餘徐氏 副司果 應文女, 無育, 取伯兄富平府使 諱時晦 第四男 慶尙監司 諱緻爲後, 生一男曰 得臣安 君, 生三男, 長曰天柱 花恩君, 次曰天挺 贈吏曹參判, 次曰天揆 通德郞, 餘不盡錄焉.

 

銘曰

 

幼作陣 , 不容 過. 洞有 害, 蓬失射蛇. 曰節與義, 不可乍去. 擧國有驚, 壬辰賊巨. 乘勝焚掠, 衆寡難敵. 公於是時, 適判晋州. 憤 計劃, 朝暮不休. 賊若不拒, 國恥何雪. 載擊載逐, 誓以死節. 繕修城機, 整備軍律. 親持牛酒, 巡餉士卒. 吹笛鳴琴, 以安軍情. 出計神奇, 屢振軍聲.  是 藜, 雷曰震天. 有銃玄字, 貫賊胸顚. 累戰累捷, 兩湖賴完. 隨捷陞秩, 至於節度. 我國有記, 三大捷快. 倭史之載, 只擧晋敗. 一倭佯死, 潛伏屍裏. 放丸被中, 殉忠乃己. 宣廟嘉之,  降褒具. 贈政領議, 諡曰忠武.

 

安東 權容稷 謹撰, 醫學搏士 安東 金思達 書幷篆

 

檀紀 四三0七年 五月 日

 

 <번역문>

괴산(槐山)에 사는 김상형(金相馨)은 나의 이종(姨從)이라. 어느날, 한 사적록(事蹟錄)을 가지고 와서 보이며 하는 말이"이것은 나의 선조(先祖) 충무공(忠武公)의 순충(殉忠)한 대절(大節)이 들리고 들리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신도비(神道碑)에 새긴 것이 없어, 그 자손된 자로 하여금 어찌 답답지 않으랴? 원컨대, 나를 위해 기록하여 주소서."한데, 내가 자신을 생각해 본 바 적당한 사람이 못되고, 글도 못함으로 사절하다가 할 수 없이 다음과 같이 지으면서, 삼가 살펴 보니, 공(公의) 이름은 시민(時敏)이요, 자(字)는 면오(勉吾)며, 성(姓)은 김(金)이니, 안동인(安東人)이라. 고려(高麗) 때,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의 12대손이며 고조(高祖)의 이름(諱)은 수형(壽亨)이니 장예원 사의(掌隸院 司議)로서 증 좌승지(贈 左承旨)요, 증조의 이름은 언묵(彦默)이니,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요, 조부의 이름은 석(錫)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로 증 영의정(贈 領議政)이요, 부(父)의 이름은 충갑(忠甲)이며 호는 귀암(龜巖)이라.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만나 청주(淸州)로 귀양 갔다가 다시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증 좌찬성(贈 左贊成)이요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창평이씨(昌平李氏)니, 참봉 이성춘(參奉 李成春)의 따님이라.

 

1554년 (嘉靖三三 甲寅) 8월 27일에 충청남도 목천현 백전촌(忠淸南道 木川縣 栢田村)에서 출생(出生)하였고,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資質)을 가졌었다. 8세 때, 동네 아이들을 거느리고, 대오(隊伍)를 지어 길거리에서 전쟁놀이의 진(陳)을 치고 있을 때, 마침 천안(天安)의 원님이 지나가려 하는지라. 이를 본 공(公)이 한 아이를 시켜 못 가게 소리치니, 그 원이 말에서 내려, 공(公)의 손을 잡고 머리를 어루만지고는 마을로 들어가서 그 부친 지평공(持平公)께 치하하여 하는 말이 "진(陳)을 치고 놀이를 하는 것은 지기(志氣)가 보통이 아니고, 관장(官長)을 꾸짖어 말에서 내리게 함은 그 기운이 두려우며, 모양이 웅걸(雄傑)하니 앞길이 만리 같다."하였다. 또 9세 때는 동네 부근에 큰 내가 있고 거기에 큰 바위가 있어 소(沼)가 생겼는데, 그 가운데에 큰 뱀의 굴(窟)이 있어 때로는 가축이나, 사람이 가까이 갔다가 삼켜 먹히는 일이 있었다. 9세의 공(公)은 그 피해를 없애려고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어깨에 메고서 한 아이를 다리고 냇가로 갔다. 공(公)이 거기서 데리고 간 아이에게 "저 바위 위에 올라가라."하니 그 아이가 무서워하면서 올라가지 못하는지라. 공(公)이 화살을 겨누면서 "죽이겠다."하니 아이는 바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바위에 올라서자, 잠시 후에 표풍(飄風)이 홀연히 일으니, 물결이 갈리면서 과연 큰 뱀이 바위돌을 휘감고 이빨을 악물고 사람을 향해 나왔다. 이 때, 공(公)이 문득 활을 당겨 화살을 날리니 뱀에게 명중(命中)되어 죽고 말았는데 10 여 일 동안이나, 물빛에 붉은 핏물이 가시지 않으니, 이 소문을 들은 어른들이 모두 놀라워했고, 듣는 사람마다 이상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지금도 이 곳을 김공사사암(金公射蛇岩)이라 한다. 성장(成長)함에 따라 체격이 특이하게 뛰어났고, 씩씩하고 장대(壯大)하며, 뜻과 도량(度量)이 보통이 아니었고, 항상 호언장담(豪言壯談)으로 사람들을 웃기었다.

 

선조(宣祖) 무인(戊寅:1578)에 무과(武科)에 올라 일찍이 훈련판관(訓練判官)으로서, 병조판서(兵曹判書)에게 의사를 제출한바,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말을 듣지 아니하자, 공(公)이 끝내 항의하기를 마지아니하니, 그 병조판서(兵曹判書)도 감히 성기(聲氣)를 누르지 못하였고, 이내 공은 군모(軍帽)를 벗어 땅에 던지고 발로 짓밟아 부수면서 하는 말이 "대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을 당하랴?"하고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때를 만나지 못하고 낙척(落拓)함을 그 때 사람들은 그 기이(奇異)한 일을 알지 못 하였다. 오래된 후에 군기사 판관(軍器寺 判官)이 되었는데, 정승 이헌국(李憲國)이 재기(才器)가 특이(特異)하다고 생각하고, 상감께 고하기를 "외직(外職)으로 보내지 말고, 내부(內部)에 머물러게 하셨다가 급한데로 쓰게 하소서." 하였고, 정승 정언신(鄭彦信)과 중봉 조헌(重峰 趙憲)이 추천하는 말이 "적(敵)을 방어하는 재주가 명장 중에서도 상사(上駟)라."하였다. 그 후, 경인(庚寅)년에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니, 진주(晉州)는 공(公)의 숙부(叔父)인 문숙공 제갑(文肅公 悌甲)이 일찍이 진주 목사(牧使)로서 특별하게 선정(善政)을 베풀은 곳이라, 진주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하는 말이 "김사군(金使君)의 조카라."하고 한 고을이 모두 흠앙(欽仰)하였다. 공(公)의 정치는 먹줄같이 곧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수단이 정당하며, 덕을 베풀어 위엄있게 행하니, 이속(吏屬)들은 두려워 하고, 백성들은 감복(感服)하였다. 선조(宣祖) 二十五년(壬辰 1592)에 왜(倭)의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그 장수 평수가(平秀家)<·평의지(平義智)·평조신(平調信): 비문엔 없음: 편역자 주>등으로 선봉(先鋒)을 삼고, 바다를 건너와서 부산(釜山)을 함락(陷落) 시키니, 바로 4월 30일이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동래(東萊)에 들어와서 부사 송상현(府使 宋象賢)을 죽이고, 적병은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닥치는 데로 불을 지르고, 곡식을 약탈(掠奪)하니, 밀양부사 박진(朴晋)이 중로(中路)를 끊고자 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능히 막지 못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으니, 그 날카로운 창칼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도체찰사 김수(都體察使 金 )가 말하기를 "진주는 성지(城池)가 견고(堅固)하지못하여, 지키기 어렵다."하고 공(公)으로 하여금 "우현(牛峴)에 가서 대장 김면(大將 金沔)을 도우라."하였다.

 

그러나 이때, 목사 김성일(牧使 金誠一)이 공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진주(晉州)를 지키라."하였고, 이에 마침 목사(牧使)가 전사(戰死)하니 인심이 큰 난(大亂)을 만나 크게 흔들리고 모두가 도망 칠 생각뿐이었다. 바로 이때 공(公)이 고을 일을 맡게 되어 영(令)을 내리되 "감히 도망하는 자는 죽일 것이니,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고서 죽음으로써 지킬 계책을 세워라."라고 했다.이때 상감께서 "순변사 이일(巡邊使 李鎰)이 상주(尙州)에서 적을 만나 패하고 신립(申砬)은 충주의 달천(達川)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다가 적세(賊勢)에 몰려 물에 빠져 죽으니 금탄(金灘)과 한강(漢江) 이남에 인적이 없어지고 적세는 날로 강해지니 대적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서울을 떠나 송도(松都)에서 2일간 머물렀으나, 적(敵)은 동로(東路)로 해서 서울에 들어오고, 팔도에 있는 여러 고을은 풍문만 듣고 흩어지니 감히 그 적봉(敵鋒)을 막을 자 없었다. 이때, 공이 "대가(大駕)가 이미 서행(西行)하고, 서울이 함락했다"는 말을 듣고 전패(殿牌)를 대청(大廳)에 모시고, 분향재배(焚香再拜)하고서, 부복 통곡(俯伏痛哭)하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를 갈고 어깨를 뽐내며 하는 말이 "이 도적을 쳐부수지 못한다면, 나라의 수치(羞恥)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이 때가 신자(臣子)로서 절의(節義)에 죽을 날이로다."하고 이에 흩어진 향병(鄕兵)을 불러 모으고, 도피한 사람들을 불러 깨달을 수 있도록 지도하면서, 무기를 수리하고 성지(城地)를 수축(修築)하며, 군률(軍律)을 정비(整備)해서 적을 기다리는데, 사천성(泗川城)에 흉적(凶賊)이 가득 차서, 장차 진주 지경에 접근하게 되었다. 이에 공(公)은 홀로 순국(殉國)할 결심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대중(大衆)에게 맹세하고서 드디어 출병하여, 사천(泗川)과 고성(固城)의 적(敵)을 격축(擊逐)하여 대첩(大捷)을 거두고 다시 진해(鎭海)의 적진을 대파(大破)함으로써 그 장수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았고,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부산(釜山)으로 가서 적진(敵陣)을 공파(攻破)하여 군성(軍聲)을 크게 떨치니 개령(開寧)과 금산(金山)의 적(敵)은 풍문만 듣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 가버렸다. 이때 행재소(行在所:국왕이 머물고 있는 곳)가 멀리 떨어져 있고, 도로가 많이 막혀서 승첨(勝牒)이 미쳐 상달되지 못하여, 조정(朝廷)에서도 바른 포훈(褒勳)을 못한 것은 통탄(痛歎)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공(公)이 방어(防禦)의 계획을 크게 세우고 적을 기다리다가 6일에 과연 적의 대군이 와서 성을 포위하게 되니 성중의 인원은 천명도 차지 않았다. 적장(敵將) 평행장(平行長)이 각처에 주둔(駐屯)하고 있는 수백만의 군대를 이끌고 몰려와서 10여 주야(晝夜)를 포위(包圍)하고 있으니 그 중과(衆寡)의 형세는 산(山)으로 알(卵)을 누르는 것과 같았고 조그마한 후원도 없으니, 공은 다만 충의(忠義)로서 격려하고 부인(夫人)고 함께 친히 우주(牛酒)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사졸들을 먹이고 부드러운 모양으로 대접하며 피리를 불어 일이 없는 것 같이해서 당시 군인들의 마음을 믿게 하여 두려움이 없게 하고, 제장(諸將)을 독려해서 기회를 타고 요해지(要害地)를 공격하니 문득 신기함이 나타나고 여러 번 진퇴(進退)가 반복(反覆)되니, 적세가 크게 꺾이여서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였다. 이 때, 별안간에 우뢰 소리가 크게 울리고 빗줄기가 쏟아져서 그믐밤 같이 어두워지자 적(敵)은 놀라고 당황하여 밤을 이용해서 퇴각(退却)하였고 이러한 첩보(捷報)를 상감께서 들으시고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임명하였다. 이로 인해서 적의 괴수(魁帥)는 이 패전(敗戰)에 대한 보복(報復)을 하려고 창원(昌原)·부산(釜山)·김해(金海)에 있는 모든 적(敵)을 합세시켜 9월5일에 바로 진주 고을 동쪽에 있는 마현(馬峴)의 북쪽 봉우리에 이르러서, 형세를 두루 살피고는 군사의 칼날을 번쩍이며 달려올 제, 공(公)이 영(令)을 내리되 '보았어도 못 본체 할 것이며, 한 알의 탄환이나, 한 개의 화살도 헛되게 쓰지 말라.'하고 다만, 성중에 있는 기사(騎士) 500명으로 하여금 적이 보이는 곳에서 분주(奔走)하게 쏘다니게 하고, 또 성안이 통해 보이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많은 장막(長幕)을 쳐서, 성안에 있는 남녀노약(男女老弱)에게 모두 남자의 의복(衣服)을 입혀서, 군사가 많은 듯한 모양을 보이게 하고서는 건장한 자를 뽑아 산에 올려 망을 보게 하니, 적은 수백만이 고을 동쪽에 있는 임연대(臨淵臺)같은 곳에서 진(陳)을 치고 있었다. 초 6일 아침 일찍이 적은 대탄(大灘)에서부터 일시에 기마(騎馬)가 길게 뻗치고, 삼진(三陳)으로 나누어, 일진(一陣)은 순천당(順天堂)위에 모여서, 성을 내려다 보고, 일진(一陣)은 봉명루(鳳鳴樓)앞에 열립(列立)하고, 일진(一陣)은 바로 순천당(順天堂) 산을 넘어 와서 봉명루(鳳鳴樓)의 적으로 하여금 한 진(陳)을 만들고서, 순천당(順天堂)에 결진(結陣)한 적의 총수(銃手)만 여명이 성중(城中)을 향해 일제히 탄환을 날리니, 그 소리가 우뢰 소리와 같고, 휘날리는 우박 소리와 같아서, 수백만이 일제히 소리치니 그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러나 성중에서는 전혀 동요(動搖)함이 없고 적적한 것이 마치 사람이 없는 것 같은지라, 그러다가 적세(敵勢)가 수그러지기를 기다려, 다시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며 밤이 새도록 엄중한 경계를 하였는데, 적중(敵中)에 있는 아이들이 성밖을 감고 돌면서 외치는 큰 소리가 "경성(京城)이 이미 함락(陷落)되고, 팔도(八道)가 모두 무너질 뿐 아니라, 진주성(晉州城)도 철통같이 포위(包圍)했으니, 그 누가 어떻게 지킬 것인가? 속히 항복(降伏)함 만 같지 못하리라. 오늘 저녁에 개산보(介山甫)가 오면, 너희 장수의 두골(頭骨)을 우리 깃대위에 달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소리를 들은 성중(城中)의 사람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큰 소리로 꾸짖고자 하였으나, 공(公)이 말을 못하게 하였다.

 

다음 날은 적이 대나무를 쪼개서 묶기도 하고 엮기도 하여 놓고 소나무 가지를 많이 모아, 진 앞에 높이 쌓고 또한 삼층의 산대(山臺)를 만들고 있으니, 공(公)은 솔가지를 많이 쌓는 것은 성(城)을 넘어 올라 오려는 것이오, 층대(層臺)를 만드는 것은 성을 돌면서 진압하자는 것이라 헤아리고 있었다. 공(公)이 이미 준비해 둔 화구(火具)에 생소나무는 습(濕)하여 태우기 어려움으로 종이에 화약을 싸서 마른 나무 단 속에 넣어 성밖으로 던지니 능히 나무를 태울 수 있었고, 성 위에는 진천뢰(震天雷)와 질여포( 藜 ), 큰 돌맹이들을 많이 모아 두어서, 성을 공격(攻擊)하려는 적(敵)에 대비하고, 또 긴 자루에 달린 도끼와 낫 같은 것을 준비하여 깨진 바퀴에 의탁하여 산대여장(女墻:성 안에 낮은 담)에 굴렸다. 또 많은 가마솥을 걸고, 물을 끓이어 적에게 퍼부으며, 성안에 군사를 매복시켜서 보지 못하게 하고, 풀로 허수아비를 많이 만들어서 활을 잡아당기는 형용으로 성 위에 출몰(出沒)하게 하며, 군인에게 엄명을 내려, 화살 한 개라도 헛되게 못쓰도록 하고, 항상 냇가에서 돌을 주워 던져서 적으로 하여금 성 가까이 못하게 하였다. 이날 달이 진 후 적은 성밖에 흙을 쌓아 토루(土壘)를 만들고  더 높이 층대(層臺)를 쌓아 올림으로서 많은 군사가 바로 올라올 계획을 하고 있었으니, 공(公)은 현자총(玄字銃)을 쏘아서 축대(築臺) 만드는 적을 향해 쏘니, 적(敵)이 조금 물러갔었다. 초 8일에 적(敵)은 다시 성중을 향해, 포를 쏘는데 종일토록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제 맞서 공(公)은 현자전(玄字箭)을 쏴서 죽편(竹編)을 뚫고 지나가, 다시 목판(木板)을 뚫으면서 적(敵)의 가슴에 명중시켜 적(敵)을 죽이니, 그 후로는 감히 적이 산대(山臺)를 바라보지 못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을 들고 부산하게 오가는 모양이 서로 약속이 있는 것 같은지라. 그 때 어린아이들이 신북문(新北門)밖에서 달려오는데, 바로 본 고을에서 포로된 자이라, 적(敵)의 정세를 물은 즉, "내일 새벽에 총력(總力)으로 성을 공격한다고 합디다." 하고 대답하였다. 초 9일 사경초(四更初)에 각 진(陳)에 불을 밝히고, 짐을 싣고 나가면서, 퇴각(退却) 하는 것 같이 해 보임으로서, 아군(我軍)이 태만한 것 같이 하고는 숨어서 돌아왔다.

 

9일 사경에 적(敵) 수십만이 동문신성(東門新城)으로 육박해 오는데, 삼층가면(三層 面)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앞세우고, 차례로 사다리에 기어 올라오고, 기마적(騎馬賊) 수백명이 뒤따라 돌진하는데, 방환(放丸)이 비오듯 하고, 고함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왜장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횡행독전(橫行督戰)하는데, 공(公)이 동문의 북격대(北隔臺)에서 사사(射士)를 거느리고, 진천뢰(震天雷)와 질여포( 藜 )를 쏘게하고, 혹은 큰 돌을 던지며, 혹은 화철(火鐵)을 던지고, 집단에 불을 붙여 던지고 끓인 물을 적에게 퍼부었다. 한편으로 남녀노약(男女老弱)들은 돌을 나르고, 불을 던지니, 성안에는 기와장과 이엉이 다 없어졌다. 적(敵)이 달군 쇠를 밟고, 화살에 맞고, 돌에 맞아 죽는데, 머리가 타고, 이마가 터진 자 무수하고, 또 진천뢰(震天雷)에 맞아 죽은자가 삼대 같이 흩어져 있었다. 동이 틀 무렵에는 적세가 크게 무너지고, 오전 열시 경에는 완전히 물러가고 말았는데, 이 전투에서 적병의 죽은 자는 부지기수라, 적들이 시체를 여염(閭閻)집으로 끌고 가고, 맹렬한 불속에서도 장왜(將倭)의 시체는 대나무 상자에 담아 메고 가는데, 참급(斬級 : 머리만 베는 것)의 수도 또한 많았다. 적(敵)이 물러간 뒤에, 여염(閭閻)집에는 타버린 뼈가 쌓여 있고, 사로잡았던 사람과 우마(牛馬)를 모두 버리고 달아났으니 이로써 진주성을 보전할 수 있었고, 또 다만 이 성 뿐이 아니라, 호남(湖南)·호서(湖西)와 내륙의 포구가 완전함을 얻게되어, 국가 중흥에 필요한 군량(軍糧)과 병기(兵器)가 모두 양호(兩湖)에서 판출(辦出)되었으니, 이는 국운(國運)에 다행함이 아니었는가? 본도(本道: 慶尙道)감사 김성일(金誠一)이 그날로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선조께서 이를 가상히 생각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릴 것을 명하였고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慶尙 右道 兵馬 節度使)겸 진주목사(晋州 牧使)를 제수 하였다. 공(公)이 이렇게 대첩(大捷)을 하던 날 시체를 점검하면서 성을 순회하는데, 왜적 하나가 소골적시(燒骨積屍)속에 숨어 있다가 총을 쏘아서, 공(公)의 왼쪽 이마에 맞아 가마로 관사(官舍)까지 돌아 왔었다. 이 때, 공(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아 하는 말이 '나의 운명은 이미 다 했노라. 적의 탄환을 나의 머리 속에 그대로 둘 수는 없노라.' 하여 드디어 나무 옷으로 상처를 헤치고, 빼내고, 논상(論賞)도 있기 전에 운명하였으니, 그 해, 12월 26일이며, 나이는 39세였다.

 

이 부음(訃音)을 상감께서 들으시고 대단히 슬퍼하시고, 바로 병조판서(兵曹判書)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또 상공(相公)의 아우 시약(時若)도 일찍이 공(公)을 따라 진주성에 있다가, 이 난을 만났는데, 지모(智謨)나 형상(形象)이 형제가 흡사해서, 형과 아우의 구분이 어려웠고 이 싸움에서 내조(內助)한 공(功)이 적지 않았다. 공(公)이 임종(臨終)에 가만히 부탁하기를 "네가 절대로 발상(發喪)하지 말고 옛과 같이 적과 대치하다가, 후임자(後任者)를 기다려서 장사(葬事)하라." 하여 따랐다. 공(公)이 돌아간 다음 해 계사(癸巳)에 군무(軍務)를 넘긴 후에 발상(發喪)하니, 성중(城中)의 사녀(士女)가 곡성(哭聲)이 우뢰같고, 이 소문을 들은 호남의 사녀(士女)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공(公)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죽은지 오래다." 하였다. 계사년(癸巳年)에는 진주성(晉州城)이 참패(慘敗)를 하였는데, 이는 대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전일의 진주성 참패(慘敗)가 분해서 부하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돌아오는 길에 힘을 모아 진주성(晉州城)을 전멸(全滅)시킨 후에 강화(講和)에 임하라." 고 하였다. 또 "우리의 장관(將官)으로 죽은 자 5백명이요, 우리 군병으로서 죽은자, 수십만으로 계산되는 것은 고금(古今)에 없었던 참패(慘敗)였다."고 말한 까닭이며, 이로서 공(公)이 임진왜란(壬辰倭亂)에 크게 이긴 것을 증거 할 수 있으나, 마침 이 때에 본도(本道)가 다 흩어져서, 상황을 보고 아는 사람이 없었고, 행재(行在)가 멀어서 통신이 끊어졌으니, 조정(朝廷)까지 상달(上達)되지 못해서, 그 실적을 알지 못하였다. 또 "충렬의 공(忠烈之功)을이정암(李廷 )의 연안(延安)의 전적과 같이 비등(比等)하게 말하는 것은 정론(正論)이 아니라." 한 것은 백사 이 상공(白沙 李相公)의 말이오, 하담 김상서(荷潭 金尙書)의 말은 임진의 삼대첩(三大捷)은 이통제(李統制)의 노량(露梁)과, 권원수(權元帥)의 행주(幸州)와, 김절도(金節度)의 진주(晋州)인데, 그 공적(功績)이 모두 사람의 이목(耳目)에 혁혁(赫赫)하여, 당시에 제공(諸公)들의 말이 혹은 "모두 동등하다"고도 하고, 혹은 "진주가 더하다"고도 하니, 공(公)의 위열(偉烈)을 가히 알 수 있겠다고 하였다.

 

난이 있은지,13년만인 을사(乙巳)년에 조정에서 훈공(勳功)을 책정할 때, 증 효충 장의 협력 선무공신(贈  忠 仗義 協力 宣武功臣)에 상락군(上洛君)을 봉(封)하고, 또 그 후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과 부원군(府院君)을 추증(追贈)하였다. 공(公)이 진주판관(晉州判官)에서 시작해서, 외로운 성(孤城)을 지키면서, 대적(大敵)을 물리치고 영남(嶺南)을 온전히 하였으니, 그 신모비계(神謨秘計)와, 풍운변환(風雲變幻)의 술법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 날카로운 적의 칼날을 당해냈으리요? 다행함이었도다!! 하늘이 만약에 이러한 사람을 낳지 아니했더라면, 국가가 어찌 맥을 지탱하고 적을 어찌 꺾었겠으며, 사람이 어찌 군신(君臣)의 직분을 알았으며, 순충(殉忠)의 혼(魂)은 만세(萬世) 동안에 누가 알 것인가? 사기(史記)를 가히 믿을 것 같으면, 그 사실을 반드시 대서특필(大書特筆)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두드러진 공(功)을 세운 분은 김 절도사(金 節度使)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에 승전(勝戰)의 실적을 오히려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통탄(痛歎)할 뿐이다. 일본 역사를 살펴보면, 다만 진주(晉州)에서 대패(大敗)함만 실려 있고, 그 외에는 패전의 말이 보이지 아니한다.이를 보더라도, 그 위열외훈(偉烈巍勳)을 그 누구에게 비교하리오. 다만 김학봉 성일(金鶴峯 誠一)의 장계(狀啓)와 진주지(晋州誌)에 있는 적을 친 사실 및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하담 김시양(荷潭 金時讓)같은 여러분의 기록과, 진사 성여신(進士 成汝信)이 지은 전성 각적비(全城 却敵碑)·

 

녹천 이유(鹿川 李濡)의 시장(諡狀)에 가장 요점만 따서 기록되어 있다. 배위(配位)는 증 정경부인 부여 서씨(贈 貞敬夫人 扶與徐氏)니, 부사과(副司果) 응문(應文)의 따님으로 혈육이 없어, 백형(伯兄) 부평부사 시회(富平府使 時晦)의 제 4남경상감사 치(慶尙監司 緻)로서 후사(後嗣)하여, 1남을 낳으니 안풍군 득신(安豊君 得臣)이라. 안풍군이 3남을 낳으니 장자 천주(天柱)는 화은군(花恩君)이요, 차자 천장(天挺)은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며, 3자 천규(天揆)는 통덕랑(通德郞)이라,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銘)에 말한다.

 

어려서 진터놀이, 원님 통과 불허하고 (幼作陣戱 不容 過)

인축(人畜) 해친 큰 배암을, 쑥대활로 쏴 죽이니 (洞有 害 蓬矢射蛇)

큰 절개 그의리(義利)는 잠시도 잊지 않아 (日節與義 不可乍去)

온 나라가 놀랜것은, 임진년의 대적(大賊)이라 (擧國有驚 壬辰賊巨)

승세(勝勢)라고 방화약탈, 대적하기 어렵도다. (乘勝焚掠 衆寡難敵)

이 때에 우리 공은, 진주판관(晋州判官) 되시어서 (公於是時 適判晋州)

분하고 한탄하며, 주야로 계략(計略) 하되 (憤 計劃 朝暮不休)

적을 만약 불거(不拒)하면, 국치(國恥) 어찌 씻을손가(賊若不拒 國恥何雪)

격축(擊逐)을 감행할제, 사절(死節)을 맹세하고 (載擊載逐誓以死節)

성지(城地) 수리 무기수선, 군사 기율(紀律) 정비하고 (繕修城機 整備軍律)

몸소 주육(酒肉)들고 돌며, 사졸(士卒)을 대접하고 (親持午酒 巡餉士卒)

거문고 피리소리, 군정(軍情)을 편히하니 (吹笛鳴琴 以安軍情)

계략이 신기하고, 몇번 군성(軍聲) 떨쳤던가 (出計神奇 屢振軍聲)

대포는 질여포( 黎 )요, 폭뢰(爆雷)는 진천(震天)이라 ( 是 黎 雷昌震天)

현자총(玄字銃) 바로 쏴서, 적의 가슴 꽤뚫었네 (有銃玄字 貫賊胞顚)

싸움마다 승리하니, 호남 호서(湖南 湖西) 안전하고 (累戰累捷 兩湖賴完)

전공(戰功)으로 승진하여, 절도사(節度使)가 되셨으니 (隨捷陞秩 至於節度)

우리나라 기록에는 三대첩(三大捷)의 하나이오 (我國有記 三大捷)

왜사(倭史)의 기록에도, 진주패전(晋州敗戰) 뿐이로다 (倭史之載 只擧晋敗)

왜병 하나 거짓죽음, 시체 밑에 엎드렸다 (一倭佯死 潛伏屍襄)

쏘는 탄환 명중하여, 위국순충(爲國殉忠) 하셨도다. (妨丸被中 殉忠乃巳)

선조대왕(宣祖大王) 가상(嘉賞) 하사, 가진 포상 다하시니 (宣廟嘉之  降褒具)

영의정(領議政)은 증직이요, 충무공(忠武公)은 시호로다(贈政領議 謚曰忠武)

 

안동 권용직(安東 權容稷) 삼가 짓고

안동 김사달(安東 金思達)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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