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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언공(휘 釴) 공덕비 건립 제막식 행사 후기 글-항용, 사진-태주(일명-병주. 정언공, 제학공, 문영공 차종손) 1. 일시 : 2010. 5. 16. 11:00시 2. 장소 : 경남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 정언공 묘정 3. 주관 : 제학공파종회 4. 일정 진행 내용 가. 09:00-11:00 : 공덕비 건립 나. 11:00-12:00 : 고유제 거행 다. 12:00-13:00 : 제막식 행사 및 식사.
1. 싱그런 오월의 새벽. 2010년 5월 16일. 철쭉꽃과 싸리꽃, 황매화와 튜울립이 온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1961년 이 날은 군사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늘은 우리 안동김씨의 최초 족보인 <경진보>를 30여년간에 걸쳐 편집 완성하신 정언공(휘 釴. 제학공 6대손) 선조님의 공덕비 건립 제막 기념식이 있는 날이다. 06시, 아직은 어둑하지만 하늘은 더 없이 맑고 계절의 여왕인 5월의 산야는 싱그러운 생기가 넘쳐났다. 이 시간, 충남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에서는 안동김씨 대종회 남응회장님께서 탑승하신 트럭 한 대가 힘차게 시동을 건다. 차에는 정언공(휘 釴) 선조님의 공덕비가 실려 있다.
2. 사업 추진 과정의 어려움을 딛고 정언공 선조님의 공덕비 건립을 위해 남응 대종회장님은 금년 봄 내내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 지난 3월 13일 제학공파 이사회의에서 최초로 건립안이 제안되었을 때, 이 자리에 참석하여 제안을 받으신 대종회장님은 직감적으로 ‘이 일은 대종회에서 벌써 했어야 할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큰 사업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구태여 이사회의 사업 승인을 거쳐 익년에 할 것 없이 약식 절차를 통해 추진할 수 있는 범위라고 판단하셨다. 정식 사업 추인을 받기 위한 이사회, 회장단 회의 소집의 지출 경비는 공덕비 건립비용과 맞먹기 때문에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나섰다. 3월 17일, 대종회 명으로 대종회 회장단 여러분에게 공덕비 건립을 위한 취지문, 비문을 회송용 서면 결의서와 함께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방법으로의 진행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양한 가치관과 각양각색의 성품을 소지한 분들로 조직된 대종회의 복합적 구조는 이 문제를 쉽게 진행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대종회장님은 대종회 추진 방법을 접고 상천 제학공파 회장님과 협의하여 제학공파종회 자체 사업으로 추진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4월 초, 제학공파 전 임원들에게 이에 대한 진행 계획을 우편으로 알렸다. 그리고 상천제학공파종회장은 남응 대종회장님과 부회장단 및 임원 여러분, 준회종손, 항용이사 등과 함께 긴밀히 협의하며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건립일을 4월 28일(음력 3월 15일)로 정했다. 이 날은 정언공의 5대조이신 사간공(휘 顧. 제학공 휘 益達의 아드님. 조선 세종조에 左司諫 역임)의 시제일이기에 이날 동시에 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행사 3일 전인 4월 25일, 뜻밖에 산청 현지의 제학공파 원로 고문이신 상의(相宜)고문님께서 불의의 사고로 별세하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행사일은 5월 16일로 연기되었다.
3. 전국 각지에서의 출발 5월 16일, 전국 각지에서는 이날 여러 현종들께서 아침 일찍부터 출발하셨다. 제일 먼저 06시에 병천에서는 남응대종회장님께서 비석을 실은 건립 공사용 차량을 타고 출발하셨다. 07시, 서울 선릉역에서는 봉회 대종회부회장님께서 운전하시는 승용차에 4분(재광(익) 문영공종회장님, 태욱(제) 전대종회 감사님, 태운(안) 대종회 사무총장님, 항용(제) 안동김씨 홈페이지 관리자 및 제학공파 이사)이 동승하여 출발했다. 새벽 6시에 제천에서 기차로 출발한 상천 제학공파회장님과 태헌 감사님은 증평역에서 괴산 능촌리에서 출발한 봉고버스와 만나 합승했다. 봉고버스에는 학응 전문영공종회장님, 태옥총무님, 복응, 용두, 진응이사님 등이 타고 계셨고, 청주에서는 한식 전 괴산군수님, 태환감사님, 영회, 규동, 태진이사님 등 여러분이 합승하셨다. 차는 대만원이었다. 08시, 충남 병천에서는 봉고차에 상옥 병천종약소장님, 천응부회장님, 태동님, 운철님 등이 승차하여 출발했다. 이 시각 대구에서는 태현(일명 윤천) 전대구종친회장님, 태기님, 정호님 등 비안공파 후손 4분이 탄 승용차가 출발했다. 금산휴게소에서는 청주팀과 병천 팀이 우연히 만나 초만원차인 괴산 청주팀의 몇 분이 넉넉한 병천팀 차로 옮겨 타기도 했다.
4. 공덕비 건립 공사 08시 40분, 산청 현지에 도착하신 남응대종회장님은 현지에 대기중이던 준회(俊會-제학공파 대종손, 정언공의 14대 종손) 종손과 함께 정언공 묘소 현지로 가서 산신제를 올리고 곧 바로 건립 공사에 들어갔다. 서울에 사시는 준회 종손님은 이 행사를 위해서 일주일 전부터 이곳에 내려와 있었다. 정언공의 묘소 위치는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한 혈자리의 명당이었다. 건립 공사는 약 1시간 이상이 걸렸다. 월곡리 판지마을의 모든 종친들은 이날 거의 모두 모였다. 외지로 나가 있던 젊은이들도 동원됐다. 남자들은 묘소로, 여자분들은 재실(弘毅齋)로 가서 정성스럽고 분주하게 행사를 준비하셨다.
산청의 재실 홍의재(弘毅齋)-원경
산청의 재실 홍의재(弘毅齋)-근경. 재실 뒷편 언덕에 사간공(휘 顧)의 단묘가 있다.
5. 고유제 봉행 10시 30분, 공덕비 건립 공사가 끝나자 곧 고유제 준비에 들어갔다. 10시 40분, 서울팀이 맨 먼저 산청 현지에 도착했고 이어 병천팀, 청주팀, 대구팀들이 속속 도착했다. 갑자기 판지 마을 일대에 차들이 가득하고 온 동네와 묘소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약 70여 명의 종친들이 모였다. 현지에서 만난 종친들은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정언공 묘소 위와 아래에 있는 정언공의 부친이신 도사공(都事公 휘 彦弘)의 묘소와 정언공 아드님이신 생원공(生員公 휘 潤運) 묘소와 정언공의 손자로 경진보를 마무리 지으신 시정공(寺正公, 휘 昉)의 묘소에도 참배하였다.
도사공 묘소를 참배하는 종친들
정언공 묘소
11시, 고유제 준비에 한창일 때 귀한 손님들이 묘정에 오셨다. 준회종손님과 각별한 친분이 있고, 이 마을을 극히 사랑하시는 이재헌 산청 군수님과 일행 몇 분이 오시어 인사를 하고 가셨다. 6.2 지방 선거 기간 중이기에 선거법 때문에 행사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묘소에 참배하고 수인사만 하고 떠났다. 11시 10분, 건립된 공덕비는 흰색 제막천으로 싸여 있었고, 묘소 중앙에는 경진보 영인본이 놓여 있었으며, 상석엔 정성스런 제물이 가지런히 진설되어 있었고, 묘소 주변엔 축하 화환이 아름다웠다. 화환 제공자는 다음과 같았다.
1)남응대종회장, 2)재광문영공종회장, 3)창회도평의공파종회장. 4)국회의원 강성천님, 5)국회의원 나경원님, 6)서울버스 운송 사업 조합 정진섭이사장님, 7)주식회사 진화 신동철대표님, 8)전자노련 서울버스 유근종위원장님
묘정과 진설
화환들
화환들
오늘 행사 사회 및 집례는 본 행사의 기획을 맡아 준비해 온 항용이사가 맡았다. 기가폰 마이크를 이용하여 행사 시작과 분정을 발표하고 헌관 및 집사는 제복을 입었다. 고유제 전에 제막행사가 먼저 진행되었다. 전 종친의 구령으로 제막되었는데 제막자는 상천제학공파회장, 남응대종회장, 재광문영공종회장, 봉회대종회부회장, 태운대종회사무총장, 상옥병천종약소장, 학응전문영공종회장, 준회종손 등이었다.
좌로부터-남응대종회장, 상천제학공파회장, 재광문영공종회장, 봉회대종회부회장
좌로부터-태운대종회사무총장, 준회종손, 학응전문영공종회장, 상옥병천종약소장
제막 직전
제창에 의해 제막되는 순간
공덕비 전면
공덕비 측후면
이어 고유제가 봉행되었다. 분정은 다음과 같았다.
1)초헌관-상천제학공파회장, 2)아헌관-준회종손, 3)종헌관-재광문영공종회장, 4)축관-천응제학공파부회장, 5)좌집사-규문이사(괴산), 5)우집사-동회(산청), 6)사준-규동이사(청주), 7)찬인-용두이사(괴산), 8)집례-항용이사(서울) 9)직일-학응전문영공종회장 진설과 제수는 산청종중의 관례에 따르기로 했고, 홀기는 국한문체로 약식화 했으며, 축문은 한글식으로 했다. 집례의 봉행전 안내가 있은 다음 제례가 봉행되었다. 햇볕은 따가워졌지만 모든 참사자들은 엄숙하고 경건하게 정언공의 공덕과 업적을 가슴에 새기며 제례에 임했다. 참신과 강신, 초헌관 헌작에 이어 독축이 시작되었다. 축관 천응부회장의 독축 음성은 기가폰 스피커를 타고 묘역 전체에 낭랑하고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참신 재배
초헌관(상천 제학공파회장)의 헌작과 축관 독축
독축 모습
독축 장면
正言公 功德碑 建立 告由祭 祝文 단군기원 4343년(서기 2010년) 5월 16일(음.4.3)에 13대손 안동김씨 제학공파종회장 상천은 삼가 고하옵니다. 정언공 선조님이시여! 선조님께서는 1486년(성종17) 제학공(諱 益達)의 6대 종손으로 출생하시어 왕성한 향학열로 학문 탐구에 전념하셨으며, 조선 중종조에 생원시를 거쳐 현량과에 급제하신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셨사옵니다. 일찍이 정암 조광조(趙光祖)선생의 문인으로 도학정치를 주장하셨던 선조님은 기묘사화 때는 정암선생의 구명운동에 앞장서셨으며, 1521년엔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이후 20여 년간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을 하셨사옵니다. 방면되신 후엔 용담현령이 되셨다가 1548년(명종3) 63세로 몰하시어 서울 상도동에 모셔졌으며, 1968년엔 이곳 경남 산청으로 이안되셨사옵니다.
선조님께서는 순후(淳厚) 방정(方正)하신 덕행과 높은 학식, 탁월한 재행(才行)을 지니시어 당시 조정의 사대부들로부터 높은 추앙을 받으셨으며, 특히 우리 문중에 대한 애족심(愛族心)이 지대하시어 안동김씨 최초 족보인 경진보를 만드시는 빛나는 업적을 이루셨사옵니다. 1500년경 당시 착오가 많은개인적 보첩만이 전하고 있어 모든 이들이 정제된 대동보를 갈구했지만 방대하고 힘겨운 작업이었기에 아무도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선조님께서는 굳은 의지와 용기로 이 작업을 착수하시어 30여 년 동안 위태로운 정치상황과 유배생활 중에서도 대동보 초고를 완성해내는 대역사를 이루어 내시고 몰하셨사옵니다. 발간만이 남아있던 이 유업은 그 후 아우 통천공(通川公-諱 钁)과 조카 경력공(經歷公-諱 齊賢), 손자 시정공(寺正公-諱 昉)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연속 작업과, 선각하신 몇몇 선조님들의 합심 노력으로 드디어 1580년 경진보가 탄생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옵니다. 이로써 우리 안동김씨 모두는 한 보책(譜冊) 속에 일가를 이루어 혈통 계열과 종친간의 상호관계를 소상히 알 수 있게 되었고, 자자손손 족보를 속간(續刊)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우리 후손들이 숭조목족(崇祖睦族)하고 무궁번창(無窮繁榮)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이에 오늘 안동김씨 제학공파종회에서는 선조님의 노고로 실현된 경진보 제작의 높고 큰 공(功)과 덕(德)을 온 세상에 널리 현양(顯揚)하기 위하여 모든 종친들의 뜻을 모아 본 공덕비(功德碑)를 세우게 되었기에 삼가 아뢰오니 선조님께서는 이로써 더욱 평안하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삼가 맑은 술과 간소한 제수를 올리오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시옵소서.
16대손 恒鏞 謹撰, 14대손 天應 奉讀 이어 아헌례, 종헌례, 사신 재배, 분축, 음복을 마치고 전체 기념촬영을 함으로써 고유제를 모두 마치고 재실로 내려갔다.
아헌관 준회종손의 헌작 재배
종헌관 재광문영공종회장의 헌작 재배
학응 전문영공종회장의 직일평 집례-항용이사
기념촬영1-헌관 및 집사들
기념촬영2-헌관 및 집사, 임원들
기념촬영3-전 참석 종친들 합동
6. 제막식 거행 12시, 일행이 마을로 내려와 재실(弘毅齋)로 들어가니 방안과 마당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여기서는 제막식을 가졌다. 행사 해설 유인물을 나누어 준 다음 사회자 항용이사의 개회사에 이어 상천 회장님의 내빈 인사소개가 있었고, 준회종손님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경과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경과 보고> 1. 2010. 3. 13. : 제학공파 임시 이사회의장에서 정언공 공덕비 건립 최초 발의. 2. 2010. 3. 17. : 남응 대종회장은 대종회 명의로 공덕비를 건립할 목적으로 대종회 회장단 24명에게 공덕비 건립 동의 서면 결의서를 안내문, 묘비문, 경진보 발간 경위서와 함께 발송. 4월 2일까지 회송 요청함. 3. 2010. 4. 5. : 회송된 서면 결의서의 찬성자수가 만족할 만한 인원(2/3 이상)이 되지 않아 대종회장은 대종회 주관을 포기하고 상천 제학공파회장에게 제학공파종회 주관으로 건립할 것을 제안함. 4. 2010. 4. 10. : 상천 제학공파회장은 파종회에서 건립할 것을 결심하고 파종회 전 임원 및 이사진에게 공문을 보내 건립 추진 과정과 당위성을 공덕비문과 함께 우송함. *건립비용(230만원) 완비 : 남응대종회장-100만원 기증, 상천제학공파종회장-30만원 기증, 제학공파종회-100만원 5. 2010. 4. 12. : 공덕비문 최종 완료. 제작 및 건립 업체 선정. 묘비석 결정(국산 오석 5자비, 갓머리). 6. 2010. 4. 17. : 비문 교정 완료. 각자(刻字) 작업 실시. 7. 2010. 4. 20. : 공덕비 제작 완료. *4월 28일을 건립 제막일로 정하고 행사를 준비 중 제학공파 고문이신 상의님의 별세로 연기함. 8. 2010. 5. 16 : 09시부터 대종회장, 제학공파종회장, 준회 종손 주재. 공덕비 건립. 11시 제막식 거행에 이름.
이어 상천회장님은 인사말을 통해 정언공 선조님의 격 높은 정신과 업적, 우리 문중에 대한 지극한 애족심 등을 강조하면서 이를 오늘에 이어받자고 역설하셨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학공파종회 25년사>의 편집 과정을 설명하셨으며, 원로에 찾아 주신 내빈 여러분과 종친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올렸다. 이어 남응대종회장님은 축사에서 정언공 공덕비 건립 과정을 설명하면서 본 행사를 대종회 차원에서 일을 추진하지 못한 아쉬움을 말씀하셨고, ‘종사일에는 무엇보다도 대승적(大乘的) 차원의 사고와 판단, 그리고 열성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10억 모으기 운동의 현 진행 과정을 설명하셨으며, 대종회의 건의사항을 주문하셨다.
축사를 하시는 남응대종회장님
경청하는 종친들
마당에서도
안방의 귀빈들
손님들이신 재광 문영공종회장님(좌), 봉회 대종회부회장님(우)
원로분들
대청에서
대청에서
사용된 축문
<유인물 소개>
유인물 전면 표지 유인물 뒷면 표지 식순(1p)
2, 3p
4, 5p
6, 7p
8, 9p
10, 11p
12, 13p
14, 15p
다음 항용 사회자는 경진보 발간과정, 정언공 소개, 묘비문 소개는 유인물로 대신하였고, 공지사항에서 현재 준비 중인 제학공파 주소록 정리 과정과 제학공파 25년사 편집 진행과정을 설명하였으며, 제학공파 수도권 종회 구성과 초대 회장으로 태욱(泰煜-병천 생원공파. 전 대종회 감사)님이 위촉되었음과, 오는 6월 13일 11시 서울 대종회 사무실에서 창립총회가 있음을 알렸으며, 대종회 사무총장이 준비해 온 판매용 경진보 영인본을 소개하는 것으로 모든 행사를 마쳤다.
13시경, 모든 종친은 다음 만날 것을 약속하며 산청 종중에서 준비해 준 기념품을 감사하게 받아 들고 푸른 하늘, 푸른 산이 맞붙은 길을 따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해산하였다. 본 행사에 성금 주신 분이 있어 소개하면서 묘비문을 싣는 것으로 후기를 마친다.
기념품 포장과 내용물
<성금자 명단> 1.상묵(제.공주)-10만원, 2.봉회대종회부회장(도평의파))-20만원. 3. 상옥병천종약소장-10만원 4.괴산능촌종중-10만원. 5.상길(제.산청)-10만원. 6. 용두(제.괴산 사리)-5만원. 7. 박원서(준회종손 처족)-5만원
<정언공 공덕비문> <전면 글씨> 安東金公司諫院正言諱釴功德碑
<비음기> 公의 諱는 釴이요 字는 君擧이며 本貫은 安東이다. 敬順王의 孫子인 平章事公 諱 叔承은 始祖시고 고려조의 대표적 出將入相으로 높이 追崇받는 忠烈公 諱 方慶은 中始祖로 公의 十代祖시며 派祖이신 提學公 諱 益達은 六代祖요 承旨公 諱 壽亨은 祖父이시며 都事公 諱 彦弘은 父親이시다. 公은 一四八六年 출생하여 타고난 비범한 재능으로 학업에 힘써 一五一六年 生員科에 入格하였으며 一五一九年에는 賢良科에 급제하여 司諫院 正言에 오르셨다. 그런데 일찍이 靜庵 趙光祖의 門下에 들어가 그 學問과 思想을 따르던 중 己卯士禍가 일자 靜庵의 救命 上疏를 올리고 一五二一年 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유배되셨다. 방면 후 一五四五年 재등용되어 叅奉과 主簿를 거쳐 龍潭縣令이 되었으며 一五四八年 六十三歲로 歿하여 서울 상도동에 모셔졌다가 一九六八年 이곳 慶南 山淸으로 移安되셨다.
公은 淳厚 方正하고 學識과 才行이 높았는데 특히 최초의 安東金氏 족보인 庚辰譜를 편집하는 大偉業을 이루어낸 功이 크시도다. 一五00年경 착오 많은 개인적 譜牒만이 전수되어 그 폐단이 매우 컸으나 방대하고 至難한 大同譜 편집작업을 아무도 시도하지 못하고 있을 때 평소 우리 門中에 깊은 愛情을 지니고 계시던 공께서는 굳은 의지와 용기를 발휘하여 一五一九年부터 약 三十여년동안 혼란한 정치상황과 유배생활 중에서도 모든 譜牒과 각종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大同譜 草稿를 편찬해내는 큰 업적을 이루셨다. 그러나 이를 책자로 발간하지 못하고 별세하고 마셨으니 안타깝기 이를 데 없도다. 이에 아우이신 通川公 諱 钁께서 이 과업을 이어받아 七권의 보완 草稿를 완성하셨고 二十七年 뒤인 一五七七年에는 正言公의 조카인 經歷公 諱 齊賢께서 여러 宗長들을 설득하여 發刊 작업을 추진하셨다. 또한 一五七八年에는 正言公의 손자인 寺正公 諱 昉께서 조부의 뜻을 이어받아 직공을 모아 刻字토록하여 行狀과 序文의 板刻작업을 시작하셨다. 그 후 翼元公 후손 監司公 諱 億齡께서 序文을 짓고 訥菴公 諱 瓚과 함께 여러 종친들의 힘을 모았으며 당시 忠淸道 節度使이신 典書公 후손 諱 鋘께서 寺正公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받아 自費로 板刻하고 발간하였으니 이것이 곧 우리의 자랑스러운 一五八0年의 庚辰譜로다. 이는 公께서 시작한 지 六十一年만의 성과요 공으로부터 한 집안 三代에 걸친 집념과 意志의 所産이며 先覺한 여러 선조님들의 협동과 노력의 결정체인 우리 모두의 보물이 탄생한 것이로다.
이로써 우리 安東金氏 모두는 한 族譜 속에 一家를 이루어 血統 系列과 종친간의 相互關係를 쉽게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子子孫孫 族譜를 續刊할 수 있게 되었도다. 또한 우리 종친 모두가 崇祖睦族하고 無窮繁榮할 수 있는 礎石이 마련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런가!
이에 公께서 歿하신 지 四百六十二년이 지난 지금 安東金氏 提學公派宗會에서는 公의 높고 큰 功과 德을 온 세상과 累世에 널리 顯揚하기 위하여 모든 宗親들의 뜻을 모아 본 功德碑를 세우도다. 西紀 二千十年 四月 二十八日
安東金氏提學公派宗會長 金相天 짓고 提學公 十九代孫 金相宜 쓰고 安東金氏提學公派 宗親 一同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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