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학공파(익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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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png 11. <주요 유적지 탐방>

3) 괴산읍 턱골 상기 대부님 및 소수면 수리 형식 화백 댁 방문기 (2004. 1. 21. 항용(제) 제공)

 

 일시 : 2004. 1. 21.

 장소 : 충북 괴산군 괴산읍, 소수면 일대.

 

2004년 1월 21일, 오후, 능촌리의 奎文아저씨(구암공 휘 忠甲 14대손)와 聲銖(의재공 휘 悌甲 15대손) 아우와 함께 약속한 몇몇 문중 어른을 찾아뵙기 위해 차를 몰아 능촌리로 갔다. 두 분을 태우고 차는 능촌리 앞 강을 건너 턱골로 향했다. 가는 동안 차 안에서는 의재공 할아버지에게 내린 <忠孝烈 三旌門> 현판을 충민사 경내에 있는 충렬사 앞에 세우기로 관공서의 담당자와 협의를 마쳤다는 반가운 이야기, 앞으로 괴산 지역 문중 선조님들의 업적과 유 무형의 유적과 유산을 顯揚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모두 신이 났다.

 

턱골에 도착하여 相岐대부님댁을 찾아갔다. 대문을 들어서니 널찍한 터에 최근에 지은 단층 가옥이 왼편으로 있다. 안채는 한참 안쪽에 있었으나 오래 되어 보였고 아무도 살지 않아 좀은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에도 젊은이는 없고 노인들만 계신가 보다. 방문 앞에서 규문아저씨는 마치 내집 할아버지 방을 들어가듯 혼잣말로 ‘대부님 계신가’하면서 방문을 열고 무심코 들어간다. 이것이 사람 살만한 시골의 모습이요, 일가간의 흉허물 없음이리라. 먼저 할머님이 나오시며 반갑게 맞으신다. 만나려는 상기 대부님은 특수 의료시설이 부착된 침대에 누워 계신다. 한 눈에 뇌졸중으로 고생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를 알아보시고는 반가워하신다. 말씀은 어눌하여 1/3만 알아들을 수 있다. 나를 소개해 올리자 “비안공 후손이야? 아주 훌륭한 집안이지”하면서 자랑의 말씀을 하는데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대부님은 제학공의 6대손이신 영상공(휘 錫)의 3자이신 참봉공(휘 友甲)의 12대손이시다(友甲-紀(3자)-鼎臣-允孚-海徵-礪著-구(옥구슬 구)-天健-由岳-永年-東浩-相岐). 부친(휘 東浩)은 구한말 蔭補로 올라 秘書院 秘書監丞을 지내셨고, 조부(휘 永年)는 蔭補로 올라 廣州郡守를 거쳐 嘉善大夫에 오르셨다. 상기대부님은 1913년생이시니 올해 92세가 되신다. 일찍이 역사를 전공하시고 충북 지역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시고 여러 곳의 교장을 역임하신 뒤 정년 퇴임하셨다. 누워 계셨지만 90의 나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약간 웃으시는 듯한 갸름하고 고운 얼굴 속에는 학자요 교육자요 예술가이시기도 한 대부님의 품격과 덕성이 고이 배어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얼굴 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마음속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몇 가지를 여쭤보고 어렵게 반 확인하고는 정정하신 할머님의 안내로 옆방으로 갔다. 우리가 살피려는 그림들을 보기 위해서다. 영하 10도의 기온에도 불을 넣지 않은 냉방이었다. 바닥은 몹시 찼지만 호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들이었기에 발이 얼마나 시린지 몰랐다. 할머님이 가리키는 윗방 농 위에는 한참 높이로 한지 뭉치들이 수 백 장이나 쌓여 있었다. 무엇부터 봐야할지 몰랐다. 우 위에서부터, 귀한 것으로 보이는 것부터 살피기로 했다. 괘도 형태의 그림들이 제일 많았다. 거의가 학생 교육용으로 그린 것 같았다. 겉장에는 그림 주제와 작성연대, 그리고 작자의 호 <溪堂>을 꼼꼼하게 적어 넣었다. <심청>, <임진왜란도>, <용자상쟁도>, <성동수복도>, <금강산절경도>, <순왕효행도> 등  약 20여 묶음이 되었으나 모두 살피지 못했다. 모두 그림 중심에 간단한 해설을 적은 수묵화들이었다. 그리고 병풍용 산수화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다음으로 서예 작품들을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흉내도 못 낼 작품들이었다. 그 속에 우연히 낯익은 글씨체의 작품이 나왔다. 바로 이웃에 사셨던 相馨대부님(구암공 휘 충갑 후손. 괴산 花巖書院長 역임)의 글이었다. 상기대부님을 위해 쓰신 것이었다. 반가웠다. 문득 15년 전에 님이 사시던 잠실로 찾아 가면 내게 문중의 많은 역사들을 가르쳐 주시려 했던 생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두 촬영할 수는 없었다. 대표적인 것만 골라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다음 일정이 있어 적당히 중단하고 대부님께 인사를 드리려 하니 일어나 앉으시고는 어렵게 몇 말씀 하신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꼭 네 가지를 가슴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五倫을 지키는 일, 儒敎를 공부하고 이를 行하는 일, 修身하고 세상에 나아가는 일, 財物을 근검하게 모으는 일이다. 재물이 없으면 사람이 천하게 되기에 하는 말이다. 가난하더라도 남의 집 행랑살이는 하지 말아라. 그 집의 종이 된다. 초가삼간이라도 내손으로 짓고 살아라.’ 모두 귀한 말씀이시다. 특히 재물에 관한 말씀에는 오해 없이 하시려는지 여러 말씀으로 附言하셨다. 그리고는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내 막내 아들이야. 육사를 1등으로 들어갔어’하며 손가락의 엄지를 올리시고 좋아하신다. 아드님은 正應으로 1961년생이었다. 지금은 육군 중령으로 국방부 장관실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증평의 37사단 근무시에 수상한 국방부장관상 액자도 보이신다. 그러다가 할머님께서 벽장 속에서 오래된 사진 액자 하나를 꺼내 보이시자 대부님은 또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으로 열심히 설명하신다. 부친(휘 東浩)의 사진으로 승지급의 벼슬을 하신 분이라고 힘을 주신다.

 

끝으로 대부님의 사진 촬영을 부탁드리자 쾌히 응하신다. 인사를 드리고 방을 나가는 우리에게 잘 올라가지 않는 팔로 천천히 연신 흔드신다. 대문을 나오며 여유를 갖고 다시 올 것을 할머님께 말씀드리고 다음 탐방지인 칠성면 율원리 성산마을로 향했다. 이유는 상기대부님의 아버님(東浩)께서 자신의 아우집(龍浩-恒黙. 문화재 지정. 김기응댁)에 걸려있는 현판 <飛鶴樓> 글씨를 쓰셨다는 말씀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이곳에 여러 번 갔었으나 이 현판을 보지 못했었다. 사랑채의 바깥문 안쪽 문틀 위에 결려 있었기에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현지에 도착하니 집은 한참 공사중이었다. 물론 관청비용으로 하고 있었다. 종손이신 泰錫아저씨를 만나 간단히 인사하고 사진 촬영을 한 뒤 곧 바로 소수면 수리로 향했다.

 

몹시 추웠다. 짧은 겨울 해는 벌써 서산마루에 걸려 우리를 재촉했다. 서둘러야 했다. 약 15분간을 운행하여 먼저 萬應대부님(참봉공 휘 友甲 13대손) 댁에 들렀다. 작년 겨울, 꼭 오늘(섣달 그믐날) 같은 때 방문했었다. 나는 그때 대부님 댁의 호적단자와 각종의 문서들을 사진으로 찍은 뒤 이를 분석하고 정리하여 1년 만인 오늘 대부님께 전달해 드리러 온 것이다.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분석 자료를 보시고는 무척 기뻐하신다. 작년에 살아계시던 대부님의 어머님은 지난 추석 즈음에 별세하셨다고 한다.

 

간단히 인사를 올리고, 이어 형식 형님 댁으로 향했다. 같은 동네의 아래쪽에 있는 집이다. 홀로 살고 계시기에 다시 큰 길로 나가 정종과 안주를 하나 샀다. 날은 이미 어둑하다. 커다란 집터다. 그런데 안채는 모두 헐어 없어지고 사랑채만 허술하게 남아있다. 名門大家의 집이요, 독립 유공자로 이름 높았던 집이다. 집 옆에는 부자 독립운동비(鏞應, 泰珪)와 증조이신 相一대부님의 頌德碑가 서 있기도 하다. 그런데 관청에서도, 동네에서도, 문중에서도 아무도 이를 복원하거나 현양하는 일에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안타깝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 혀를 차며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다짐하면서 비닐로 임시 덧문을 한 사랑채로 들어섰다.

 

형님은 식사중이셨다. 1926년생으로 올해 79세이시지만 나에게는 형님 항렬이시다. 우리를 작업실로 안내하고는 식사를 마치고 들어오셨다. 좁은 작업실은 빈 자리가 없이 각종의 미술 도구와 생활 도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작업실의 여러 장면을 열심히 찍었다. 작년에 보았던 작품 외에 몇 개의 새 작품들이 눈에 들어 왔다. 형님은 ‘내 그림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개성이 있어요’ 하면서 간단한 자신의 그림 설명과 새로 그린 작품들을 소개하신다. 방 가운데는 <希望>이란 붓글씨로 쓴 한지가 걸려있었다. 나이와 다르게 세련된 붉은 색 쉐터와 목도리를 두른 형님의 깔끔한 용모와 섬세한 눈에서는 예술가의 혼과 정렬이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우리 일가분이신 김학응 지사와 김태동 장관님과의 근친 관계를 묻자  ‘장관이나 도지사 따위 하는 것에 나는 그리 큰 관심과 의미를 두지 않아요.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요. 이곳은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전개하신 나의 조부님과 부친의 넋이 살아 있는 곳이에요. 그 두 분의 업적을 그런 몇 가지 벼슬한 사람들과 감히 비교할 수가 있나요?’ 하면서 목소리를 높이신다. 우리는 모두 옳다고 했다. 그런데 그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던 분들에 대한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바로 남루하고 헐어져 가는 이 집의 현재 모습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민족정신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현양활동을 이 주변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집 옆에 있는 <부자 독립운동기념비>도 찬바람에 허황하게만 보인다. 한 쪽 구석에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다. 관청에서는 매년 벌이는 축제에 이와 관련한 어떤 행사도 없다. 깊이 연구하여 발표하는 학술 세미나도 없었다. 그래서 형님은 이를 그림으로 토해냈던 것은 아닐까? 그림 속에는 형님의 가슴에 맺혀 있는 어떤 한이 담겨 있는 듯 하였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고목 그림에서는 준엄한 꾸짖음이 있는 것 같았다. 묵묵히 가슴 속에만 담고 있는 형님의 강한 욕망과 혼이 그림들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 일행 중 한사람의 휴대폰이 열심히 울린다. 가족들이 열심히 찾는다. 아쉽지만 돌아가야 했다. 형님은 따뜻해지면 여유를 갖고 다시 만나자고 하신다. 가슴에 맺힌 할 말씀이 너무나 많다고 하신다. 전시회 때 만든 안내 圖錄 하나를 보여주신다.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 하기에 복사한 뒤 다시 우편으로 돌려 드리기로 하고 받아 나왔다. 이미 날은 어두워 졌다. 되돌아오는 우리들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았다. 올 여름에 다시 온다고 했다. 그때 허물어져가는 저 집터 사이에서 형님과 밤새 대화하자고 했다.

 

 *사진 소개

 1)김상기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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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김상형 서예작품(좌),  김상기 서예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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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동호 영정과 김상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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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괴산군 칠성면 김기응 고가옥(문화재)에 있는 김동호님의 친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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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김형식님의 작업중인 작품들과 발표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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