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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북 충주시 엄정면 논강리 논동(논리동) 소재 익원공파 문정공계 문중 소개 <충북 충주시 엄정면 일대 익원공파 주요 자료 및 유적 소개> (2003. 12. 6. 완식(익) 제공) 가) 각종 유서, 교지, 호적단자 소개 (1) 병사공(휘 일-초명 述)) 전라도 관찰사 유서(諭書)
* 원문 및 역문. 역자: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 김세봉 선생님
諭守全羅道兵馬 節度使金述 卿受委一方體任 非輕凡發兵應機 安民制敵一應常事自有舊章 慮或有予與卿獨斷處置事 非密符莫可施爲 且意外奸謀不可不預防 如有非常之命合符 無疑然後當就命 故賜押第九符 卿其受之故諭
○ 수 전라도 병마절도사(守全羅道兵馬節度使) 김술(金述)에게 내리는 유서(諭書) 경(卿)은 한 지방의 체임(體任)을 위임받았으니 가볍게 군사를 내지 말고 임기응변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적을 제어하여 한결같이 상사(常事)에 응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 구장(舊章)이 있다. 생각건대 혹 나와 경이 독단으로 처치할 일이 있을 때 밀부(密符)가 아니면 시행하지 말고, 또 의외의 간모(奸謀)는 예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비상(非常)의 명령이 있을 때는 부절을 합하여 의심이 없은 연후에 마땅히 명에 따라야 한다. 고로 압(押) 제9부(符)를 내려 경에게 받게 하므로 (이에) 유서한다.
* 주 - 유서(諭書) : 왕이 각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찰사・절도사・방어사・유수 등에게 왕과 해당 관원만이 아는 밀부(密符)를 해당 관원에게 내리는 명령서이다. 부(符)는 제1부에서 제45부까지 있어서 비상한 명령이 있으면 부를 합해 보아 의심할 바가 없을 때에 명령대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2)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유서
諭全羅右道水軍節度使金述 爾受委一方體任非輕(凡發)兵應機安民制敵一應常事自有舊章慮或有予與爾獨斷處置事非密符莫可施爲且意外奸謀不可不預防如有非常之命合符無疑然後當就命故賜押第三十八符爾其受之故諭 崇德五年十一月二十四日
○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김술(金述)에게 내리는 유서(諭書) 네가 한 지방의 체임(體任)을 받았으니 가볍게 군사를 내지 말고 임기응변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적을 제어하여 한결같이 상사(常事)에 응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 구장(舊章)이 있다. 생각건대 혹 나와 그대가 독단으로 처치할 일이 있을 때 밀부(密符)가 아니면 시행하지 말고, 또 의외의 간모(奸謀)는 예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비상(非常)의 명령이 있을 때는 부절을 합하여 의심이 없은 연후에 마땅히 명에 따라야 한다. 고로 압(押) 제38부(符)를 내려 그대에게 받게 하므로 (이에) 유서한다. 숭덕5년 11월 24일
(3) 유서
日用鷄首不用於常時以爲勅使支供之用此事雖徵以是推之他亦可知其爲盡心國事極爲可嘉特賜表裏一襲爾其領受故諭 順治七年六月十七日
○ 날마다 계수(鷄首)를 씀은 평상시에는 쓰지 못하는데 칙사(勅使)의 지공(支供)을 위하여 쓴다고 하니, 이 일은 비록 징수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다른 일 또한 가히 알 수 있다. 그 마음을 다하여 국사를 위하는 것을 매우 가상히 여겨 특별히 표리(表裏) 1습을 하사하니 네가 그것을 받도록 (이에) 유서하노라. 순치7년 6월 17일
(4) 유서 (평안도 병마잘도사 겸 안주목사) (가) 입수일 : 2008. 4. (나)입수자 : 김완식(익). 50만원 (다)구입처 : 부산의 모 고서점 (라)크기 : 폭 73 cm 정도, 길이 140cm
*수교일 : 仁祖 25年(1647) 6月 20日 <김항용(제) 역문> 평안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안주목사인 김일에게 유하노라. 경은 한 지역을 위임받아 무릇 병사를 일으킴에 가벼이 하지 말며,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적을 제압하라. 일상적인 일은 지침서대로 하라.
생각건대, 혹시 내가 그대와 더불어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밀부가 없이는 시행치 말라. 또한 의외의 간사한 모략으로 불가불 이를 예방하지 않을 수 없어, 만약 비상의 명령을 내리는 경우에는 그 밀부를 합해보고 의심이 없다고 판단된 후에야 마땅히 그 명령을 따르라. 그러므로 제 31호의 밀부를 주노니 경은 이를 받으라. 순치 4년(1647년-인조25년). 6월 20일
(4) 金城年의 호적단자
擁正拾參年四月( )原縣 考乙卯成籍戶口帳內嚴政面第五內倉上第十六統第二號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城年七十( )丁酉生本安東父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胤輝祖贈嘉善大夫兵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折衝將軍守咸鏡北道兵馬節度使兼鏡城都護府使逸曾祖贈資憲大夫兵曺判書兼知義禁府事行折衝將軍滿浦鎭兵馬僉節制使繼賢外祖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金鼎鉉本慶州率子將仕郞始麗年五十一乙丑生婦權氏齡四十四壬申生孫彭金年十二甲辰生
率奴婢秩奴江霜年己卯生奴金乭屎年壬申生父班奴春金母班婢二礼婢庚玉年庚午生父私奴流連母班婢玉今婢某得年戊戌生父私奴士雄母班婢春伊逃亡奴婢秩奴水立年丁卯生奴貴萬年戊午生父士云母班婢( )( )婢自香年壬戌生母班婢毛乙老婢業伊年己亥生婢千礼年甲子生母班婢士業父季千婢順玉年丁酉生母班婢(奉?)(玉?)婢卯眞年甲 辰生母班婢信禮癸亥逃亡奴莫龍年壬午生婢乭德年丁酉生母班婢唜金婢水京年丁巳生母班婢善( )壬申逃亡婢唜丁年辛未生母班婢礼成癸酉逃亡奴鐵民年壬申生母班婢水今己亥逃亡婢開化一生奴明先年丁卯生二生奴甲先年甲戌生三生奴三先年庚辰生四生奴四先年癸未生五生奴五命丁亥生六生奴七先年己丑生等己亥逃奴夫貴年癸巳生母班婢唜生辛亥逃婢西德年甲辰生母班婢自化婢貴礼年壬辰生母班婢陽金伊辛亥逃婢同阝德年丙申生母班婢時介己亥逃婢忠礼年丙申生父班奴忠淂母班婢玉礼婢忠礼二生奴已尙年己丑生甲戌逃婢小礼年丁巳生父班奴丑生母班婢先今婢氣介年庚辰生乙丑逃婢香床年壬申生己丑逃亡等印 行縣監
○ 옹정 13년 4월 ( )원현 을묘(乙卯)년에 작성한 호구(戶口) 장내(帳內)를 고(考)하건대 엄정면(嚴政面) 제 5 내창(內倉) 상 제16통 제 2호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김성(金城) : 나이 70( ), 정유생(丁酉生), 본은 안동. 부(父)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윤휘(胤輝), 조(祖)는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절충장군 수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겸 경성도호부사 일(逸), 증조(曾祖)는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절충장군 만포진병마첨절제사 계현(繼賢), 외조(外祖)는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정현(金鼎鉉) 본(本)은 경주(慶州) 솔자(率子 : 거느린 아들) 장사랑(將仕郞) 시려(始麗), 나이 51세, 을축(乙丑) 생, 며느리 권씨(權氏), 나이 44세, 임신(壬申)생, 손(孫) 팽금(彭金), 나이 12세, 갑진(甲辰)생. 솔노비(率奴婢 : 거느린 노비) 질노(秩奴) 강상(江霜), 기묘생 노(奴) 김돌시(金乭屎), 임신생, 부(父)는 노춘금, 모(母)는 반비(班婢) 이례 비(婢) 경옥(庚玉), 경오생, 부는 사노(私奴) 유련, 노는 반비 옥금, 비 모득(某得), 무술생, 부는 사노 사웅(士雄), 모는 반비 춘이(春伊), 도망노비(逃亡奴婢) 질노(秩奴) 수립(水立), 정묘생, 노 귀만(貴萬), 무오생, 부는 사운(士云), 모는 반비 ( )( ), 비 자향(自香), 임술생, 모는 반비 모을노(毛乙老) 비 업이(業伊), 기해생 비 천례(千礼), 갑자생, 모는 반비 사업(士業), 부는 계천(季千) 비 순옥(順玉), 정유생, 모는 반비 (奉?)(玉?) 비 앙진(卯眞), 갑진생, 모는 반비 신례(信禮) 계해(癸亥) 도망 노(奴) 막룡, 임오생 비 돌덕(乭德), 정유생, 모는 반비 말금(唜金) 비 수경(水京), 정사생, 뫼는 반비 善( ) 임신(壬申) 도망 비(婢) 말정(唜丁), 신미생, 모는 반비 예성(礼成) 계유(癸酉) 도망 노 철민(鐵民), 임신생, 모는 반비 수금(水今) 기해(己亥) 도망 비 개화(開化)의 일생노(一生奴) 명선(明先), 정묘생 이생노(二生奴) 갑선(甲先), 갑술생 삼생노(三生奴) 삼선(三先), 경진생 사생노(四生奴) 사선(四先), 계미생 오생노(五生奴) 오명(五命), 정해생 육생노(六生奴) 칠선(七先), 기축생 등 기해(己亥) 도망 노[逃奴] 부귀(夫貴), 계사생, 모는 반비 말생(唜生) 신해(辛亥) 도망 비[逃婢] 서덕(西德), 갑진생, 모는 반비 자화(自化) 비 귀례(貴礼), 임진생, 모는 반비 양금이(陽金伊) 신해(辛亥) 도망 비 동은덕(同阝德), 병 신생, 모는 반비 시개(時介) 기해(己亥) 도망 비 충례(忠礼), 병 신생, 부는 반노 충득(忠淂), 모는 반비 옥례(玉礼) 비 충례(忠礼)의 이생노(二生奴) 이상(已尙), 기축생 갑술(甲戌) 도망 비 소례(小礼), 정사생, 부는 반노 축생(丑生), 모는 반비 선금(先今) 비 기개(氣介), 경진생 을축(乙丑) 도망 비 향상(香床), 임신생 기축(己丑) 도망등인(逃亡等印)
행현감(行縣監)
(5) 기타 교지류
2) 양천허씨(허적) 묘소 소개 양천허씨 묘역을 둘러보고 일전에 외삼촌의 상을 당하여서 소태면에 갔다가 저희 집안과 양천허씨 집안간의 관계에 대하여 인터넷 저희 홈페이지에 올리려고 자료를 수집 차 묵재 허적 공의 묘지 사진을 찍으려 소태면 오량동 청룡사 아래 청계산 산자락에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입니까. 산자락을 오르는 중에 좌측에 큰 산소가 보이길래 가보니 묵재공의 아버님 즉 행오 許 한 공의 묘지 였습니다. 그런데 비석의 상돌(석)은 앞으로 쳐박혀 있고 더욱이나 봉분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여기저기를 사진을 찍고 봉분에 뚫려있는 굴속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바로 소태면 파출소에 신고를 했습니다.(11월22일 15시경) 후래시 등이 없어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으나 나중에 사진을 확인해 보니 목관등이 드러나 있고 깊이는 약 3m정도는 약 80도 정도 되게 뚫려서 아래쪽은 평평하게 약간 넓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라이터 불에 의지에 보니 석회조각이 나딩굴고 목관이 파손된 흔적이 보였습니다.파출소 직원이 여기저기에 전화를 해보고도굴된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것이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집안 종인들간의 어려움으로 아직 보수를 못하고 있다고도 하더이다.행오공의 배위가 저희 안동김씨 이신데 너무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경찰분들과 묵재공 산소에 내려와 보니 그곳의 산소에도 여지없이 상돌을 바치는 돌을 빼갔는지 한곳의 받침돌 자리에는 그냥 돌맹이로 괴여 놓았더군요.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만 공개하기엔 너무 부담이 됩니다. 양천허씨 종인여러분 저도 일 가문의 평범한 세인에 불과 합니다만,조상님들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저희가 있겠습니까?. 조상님들의 유물이나 다른 물건들을 훔쳐가는 세태가 한심스럽습니다만 그런 것들을 잘 지키는 것도 저희의 몫이라 생각됩니다. 外孫의 한사람으로 너무나 안타까워 이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다음에 갈때엔 묵재공과 행오공의 묘지가 정성스레 보수되고 정비되어 있었으면 합니다. 대전에서 김완식 봉서
3) 하강서원
4) 청룡사지 유적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 소재 청룡사는 주봉인 청계산 자락에 위치해 있습니다. 융성한 사찰이었으나 조선말 민비의 오빠 소실의 묘를 쓰기위해 불태웠다고 전해집니다. 대대로 양천허씨의 원찰 역할을 했으며 저희 안동동김문의 많은 선조님들이 깊은 연관을 맺으셨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재건된 조그만 사찰로 남아 있으며 아래의 유물외에 청룡사 에서 출판된 많은 불경이나 서책들이 중요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각국사비(보물 제 658호) 위 치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 고려 공민왕과 공양왕 및 조선 태조의 국사로 있던 고명한 승려인 보각국사의 공적비이다. 문인선사 희달이 태조 3년(1394년)에 태조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비문은 풍우로 인하여 손상이 많이 되었다. 보각국사는 경기도 사람으로 성은 조씨이며,법명은 혼수이다. 고려 충숙왕 7년에 출생하여 우왕때 국사가 된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존경을 받았던 덕이 높은 분이었다. 대사가 돌아가신 후 태조 임금이 슬퍼하며 내린 시호가 보각이고, 탑의 이름은 정혜원 융이라 하였다. 이 비석은 윗 부분의 양면을 접은 간략한 형태로 고려 말기 비석의 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정혜원 융탑 사자석등(보물 제 656호) 위 치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 조선왕조 태조 3년에 왕명으로 세원진 보각국사비와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함께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측된다. 석등의 하대석은 희귀한 예로서 경주 남산 천룡사자귀부와 같은 형식으로 한마리의 사자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다. 간주석을 비롯하여 화사석 옥개석은 방형으로 고려이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조형미가 부도와는 수법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바 조선 중기의 것으로 정혜원 융탑이 조성된 후에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보각국사 정혜원 융탑(국보 제 197호) 위 치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 이 부도는 고려말의 고승인 보각국사(1320-1392)의 묘탑이다. 편평한 대지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1단의 축대를 쌓고 그 중앙에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건립 하였다. 기단부는 복련을 새긴 하대석 과 안상안에 사자상과 운룔문을 새긴 중대석,그리고 앙련을 새긴 상대석으로 이루어졌다.탑신부는 반룡이 감긴 엔타시스의 우주를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창방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각면에는 무기를 든 신장상이 1구씩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밑면 처마에 탑신 우주위에 창방머리와 접촉되는 부분이 보머리형으로 이루고 있으며 추녀와 사래를 양각하였고 연화문을 조각하였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상단부가 급경사이며 기왓골은 없으나 각 함각마루에 용두를 조각하였다. 옥개석정상에는 복련을 조각하여 상륜부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는 복발, 보륜,보주가 남아있다. 탑신 우주의 엔타시스와 창방의 조각,옥개석의 보머리형조각, 추녀와 사래의 표현, 지붕 합각부의 용두 조각등은 당시의 목조가구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의 앞에는 배례석이 있고 주위에 탑비 와 사자석등이 있다. 소태면 청룡사지 석종형 부도 & 부도부재석
소태면 오량동의 보각국사 정혜원 융탑과 보각국사비 및 석등과 함께 청룡사지 안에 있는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돌종 모습의 높이 1.7m의 화강암 부도이다. 하대석은 단석1매로 3단의 괴임이 있고 탑신의 윗 부분은 보발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적운당 사리탑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석종현 부도 앞에 파손된 채 놓여 있는 부도재로 옥개석,상대석,하대석등이 남아 있고 탑신석이 없어졌다. 부재들이 모두 6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고 구름무늬등이 장식되어 있다.옆에는 다시 사리공이 뚫어져 있는 방형의 돌이다.
청룡사 위전비 소태면 오량동 청룡사 정혜원융탑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청룡사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기증한 논과 밭의 내역을 적은 높이 1.65m 폭 0.75m 두께 0.23m의 비이다. 비석과 비석을 세운 돌만 있는 모습으로 매우 단조롭다. 소태 오량동에는 허적의 조부인 잠의 신도비도 있습니다. 이 분의 시호를 받는 날 잔치를 벌리는데 궁중의 유악을 가져다 썼다해서 허적이 정승나리에서 쫒겨나고 고향인 소태 오량으로 낙향했다고 합니다.
목계 반공의사비 가금면 장천리 솔밭에 높이 1.53m 폭 0.65m의 비로써 6.25전란때 반공활동을 하다가 순국한 이선규,권중대,변용출,김용기,홍선식,박삼수의 여섯 애국지사들이 잠든 무덤앞의 한 옆으로 대한노인회 중원군 엄정면 목계회에서 1977.1월 세운비석이다. 이 비석의 위치는 행정구역으로는 가금면 장천리이나 보통 목계 솔밭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이 비석에 적혀있는 사람들은 목계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이다.
허잠 신도비 소태면 오량동(청룡)에 있는 비로써 허잠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영의정 허적의 할아버지이며 청백리로 뽑혔었다. 양천 허씨로 시호는 충정이다.
5) 충주 엄정면 논강리 논동(논리동) 소재 익원공파 문정공계 선조님들의 약력 (2005. 3. 2. 완식(익)제공) 가)김계현(金繼賢) (嘉靖丙寅(1566.명종21년)생-萬曆戌申(1608.선조41년) 본관 안동. 字 善承(선승). 충주 엄정 출생. 고조는 영흥부사 智童(지동) 증조 滂(방) 조 운봉현감 彦淸(언청). 부 愼(신) 모 파평윤씨. 25세 때 무과 급제하여 임진왜란 시 갑사(甲士)로써 선조임금을 호위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이후 선전관을 거쳐 도총도사(선조25), 의주판관(선조26), 호조 좌랑, 정랑, 군리첨정, 군자감정, 봉산군수(선조 27년), 여주목사, 개천부사, 단천군수를 지냈다. 선조 34년 영암군수를 지낼시 전염병을 목민관으로써 잘 처리한 공로로 선조로부터 표리(表裡)를 하사받았다. 봉산군수 및 남원부사, 만포진첨사(병마절제사)를 지냈으며 선조41년 43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2남 1녀를 두었다.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 를 증직 받았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선무원종공신녹권(규장각소장)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안동김씨 대동보, 엄정면 논강리 논동(논리동) 소재 비문.
* 계현공 선정비 탐방기 (2005. 9. 12. 완식(익) 제공) 2005. 8. 23 지난 주말에 다녀오고자 했던 전남 영암을 다녀왔습니다. 십 수년만에 식구들과 호남 고속도로를 달려백양사 그늘 아래 툇마루가 있는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습니다. 고추장으로 얻은 힘을 모아 광주로 달려 5.18 국립묘지를 들렀습니다. 그 일을 고3 때 듣고, 돌던지면서 거리에서 대학 생활을 한 지 25년 만입니다. 비문 하나 하나를 보면서 절절한 사연에 눈물이 흘렀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녀석은 왜 그러시냐고 묻고.... 망월동 묘지에서 낯익은 이름들을 봅니다. 잡초속에 덮혀진 이한열과 김남주시인과......
나주를 들러 여러 고분군을 바라보니 무한한 상상력이 넘칩니다. 영암에 들러 영암군청을 갔습니다. 13대 조의 형님이신 휘 계 현 공이 선조대에 임란 공신 3등에 책 되신 후 조야의 많은 사람들이 시기했는지 왕조실록에는 여주목사를 제수받고 가실 때 시골인 엄정에 들러서 갔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셨지요. 그런 후 선조 34년에 영암군수로 가셔서-직급 상 행군수 라 여겨집니다- 역병을 잘 다스렸다고 선조임금으로부터 표리를 하사받기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만큼 계셨는지 아득했는데 군청에 부탁을 몇 번해서 창고에서 남아있는 여분이라고 영암군지를 보내주셔서 확인해보니 선조 38년까지 약 4년여를 근무하셨습니다. 그 때 향교도 복원하시고 여러 정자나 누각 등을 복구하신 것 같습니다. 선정비라도 남아 있을 까 찾아보니 군청에는 없고 영암 읍 사무소 담장켠에 근세의 선정비 몇 점이 있습니다. 군청앞 중원회관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음식 맛이 입에 착 붙습니다. 김치와 젓갈과 음식의 간이 충청도 토박이인 제게도 딱 맞습니다. 읍사무소 직원이 일러준 여관에서 하루를 묵고 월출산을 돌아 구림과 왕인 박사 유적지를 들렀습니다. 경치와 멋과 역사와 충절이 어딜가나 넘칩니다. 월출산 입구 상가에서 식사를 낙지해장국으로 들자니 매콤함과 낙지의 맛과 무우의 시원함이 입에 그득합니다. 향교에 들러 선정비등을 보고자 했으나 아 일요일.......
해남으로 달립니다. 윤선도와 윤두수와 대흥사와 미황사를 거칩니다. 땅끝으로 달려가자니 해수욕장이 한산 합니다. 바다를 못보았던 아이들을 하냥 놀자 합니다. 땅끝들러 큰 숨 한번 쉬고 고구마 하나물고 달리자니 3000원만 내면 바지락을 잡는 체험을 할 수 있답니다. 식구들 저마다 호미하나 씩 들고 갯벌에서 신나게 잡았습니다. 바지락 칼국수를 생각하면서.....
시원한 길로 올라서니 비는 하염없이 옵니다. 광주를 지나 백양사를 지나 전주를 와도 비는 옵니다. 향교의 선정비를 못본것이 눈에 밟힙니다. 그곳에는 아마도 계현 공의 선정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돌아와 향교에 전화를 드려보니 10여개 이상의 선정비가 있답니다. 하지만 와서 확인하라는 말씀에 내일 또 달려 볼렵니다. 남도로. 참고로 충주 엄정 출신의 익원공파 문정공 - 지동- 방- 언청 -신 공의 장자 휘 계 현 공의 약력은 충주시 홈페이지에 게시한 데로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계현공의 2남 중 장자 인 휘 적 공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겸 삼도수군 통제사를 지내셨으며 동생 휘 일 공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북병사)를 지내셨습니다.
2005. 8. 25 이른 아침 들뜬 마음에 아침을 먹는지 마시는지 허겁지겁 서두릅니다. 대충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집을 나섭니다. 기름값 타령을 할 마누라에게는 학교에 가노라고 해놓고 유성 톨게이트를 올라 호남 고속도로를 내려 갑니다. 모악산이 나오고 내장산이 나올 때쯤은 서서히 휴게소의 커피 한잔이 생각 납니다. 백양사 휴게소에서 자동판매기의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시자니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서가 지났다드니 가을인가 봅니다.
광산 나들목을 나가 나주로 갑니다. 왕건의 전설같은 얘기와 조선시대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를 총괄하던 너른 벌판 위 아늑하게 자리잡은 나주의 전경이 새삼 눈에 들어옵니다. 영산포를 지나고 조금 더 달리니 영암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 옵니다. 영암가는 길 섶의 통나무집 식당에서 5천원 짜리 백반을 시키니 반찬이 스무가지는 넘게 나옵니다. 시원한 냉수 한 잔까지 곁들이니 포만감이 넘실댑니다.
영암에 도착해서 먼저 영암 향교를 갑니다. 사무국장 님께는 사전에 전화를 드려 놓았었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리니 어렵지 않게 "선정비가 비림속에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열 두어개의 선정비와 중건비 등이 홍살문을 지나 전각 옆 담장 밑으로 깔끔하게 일열로 서있습니다. 사무국장 님 말씀으로는 17-8년 전에 영암 읍내에 산재해 있던 것들을 향교내로 이설을 했는데 마모되거나 파손될까 노심초사 해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좌측 세번째 것이 휘 계현 공의 군수 선정비라 하시길래 긴가민가 합니다. 글씨가 마모되어 흐릿하게 보이고 내리는 빗자락에 글자가 더욱 않보였기 때문 입니다. 국장님이 '전남향교문화사' 라는 두툼한 두권의 책을 꺼내시더니 영암향교 편의 선생안을 펼쳐보이십니다. 관안이라고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영얌향교에 실린 기록으로는 1476년(성종7년) 부터 1972년까지 총 296명이 군수를 지냈답니다. 평균 재임기간은 20개월 이고 조선시대에는 264명이 군수를 지내셨고 왜정.미군정기 동안은 14인, 정부수립이후 37인 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군수 264 명 중 순직1명. 병사 4명. 처귀(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감) 는 68명. 파면 79명. 영전33명. 전근.기타 81명 이라 합니다. 파면된 79명 중에서도 체포되어 형벌을 받은 자가 13명.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파면시킨자가 23명. 기타 각종 사유의 파면이 28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군수의 대부분이 행군수 이고 수군수는 단 3명이었다고 합니다.이는 조정에서 영암을 다른 군에 비하여 같은 군이라도 높이 대우하였음을 반증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계가 높고 직이 낮은 것은 행이라 하고 계가 낮고 직이 높으면 수라 하는 행수의 제도가 조선 세종때 정립되어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휘 계현 공은 임란 시의 공적으로 선무원종호성공신 3등에 책되시어 여주목사로 부임시 향리인 충주 엄정을 들렀다고 비판을 받으나 선조께서 너그러이 봐주신것이 왕조실록에 나옵니다만 그 이후 이곳 영암군수로 오시니 공신을 특별하게 중요한 지역으로 보내신 듯 합니다. 이곳 영암은 육지로는 평야와 산물이 많고 바다로는 왜적의 출입로니 중요한 곳일 수 밖에 없는 듯 합니다.
'전남향교문화사' 중의 영암의 역대 군수 기록을 보니 선조 34년(1601) 에 취임하셔서 선조 38년 (1605)에 이임하신것으로 나오고 요적 항목에는 "만포첨사로 이임. 비가 세워짐" 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어사의 계로 부정으로 파면된 사람 등등 역대 군수의 치적이나 공과가 짧지만 적시된 요적에 우리 조상님은 안동 김문의 선조님은 자랑스러이 적혀 있었습니다. 긍지와 뿌듯함이 부풀어 오릅니다.
향교를 나서서 영암군청으로 갑니다. 문화관광부 문화예술 담당자께 영암군지를 보내준 것을 감사인사 여쭙고 영암지역의 금석문 등을 조사한 자료등이 있는지 물어보니 1996년 12월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고한 '영암군 금석문 조사 보고서'를 보여 줍니다. 그것을 살펴보니 앞부분에 2번째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 군수 김공 계현선정비" 소재지: 영암읍 교동리 365 영암향교내. 실측: 비좌: 100x50x12. 비신:124x53x15. 비향:서. 건립연대:조선선조38년(1605). 기타: 1601 - 1605 군수 역임. 만포첨사로 이임. 전면에만 음각하여 새김. 마멸이 심한 상태. 자경은 12.5 cm. 전면(서): 군수김공계현선정비"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찾고자 하니 찾아 지는가 봅니다. 담당 직원에게 감사드리니 자신의 일인 양 기뻐 합니다. 영암군의 곰무원들이 모두 친절하신 것 같습니다. 일회용 카메라를 하나 구입해 다시 향교로 옵니다. 비석 앞에 서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글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 옵니다. 사진을 찍고 사무국장님께 그런 사정을 말씀드리니 축하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안동김씨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씀들을 해주십니다. 대성 벌족이고 유명하신 학자와 경세가와 충신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니 하나같이 정확하고 확실하십니다. 또 마음이 뿌듯해 집니다. 향교문화사가 잘 만들어진 것 같아 인쇄비만 드리고 책을 한질 구해 길을 나섰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나주를 지나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멋진 분재원이 있어 잠깐 들렀습니다. 화신 분재원 이랍니다. 이곳에 들러 분재를 구경하고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같이 구경하신 분이 광주로 가는 지름길을 일러줄테니 따라 오라는 군요. 그분의 BMW 승용차를 따르니 얼마안되어 고속도로 나들목이 나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고속도로에 올라 살살내리는 빗길을 달립니다.
백양사에서 빠져나와 담양을 갑니다. 메타스퀘이어 가로수길을 달려 담양을 거쳐 순창으로 갑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아찌 반찬을 몇 개 사고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아주머니는 덤으로 된장도 맛보라며 한봉지 담아 주십니다. 인정을 담아 다시 전주를 향합니다. 강천산을 지나니 모악산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전주를 돌아 대전으로 오니 유성 나들목 앞 월드컵 경기장 불 빛이 환합니다. " 아, 오늘이 k-리그 축구가 있는 날이지" 경기장에 들어서니 후반전이라고 입장료도 안받습니다. 대전과 대구의 시합이 있습니다. 빗물먹은 푸른 잔디가 싱싱합니다. 대전이 2:1 로 이겼지요. 경기장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 오늘만 같아라". 조상을 알고, 사람살이를 느끼고, 사람의 정을 맛보았던 오늘만 같아라.
집으로 돌아와 "향교문화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전라우도 수군절제사를 지내셨던 휘 계현 공의 아드님 휘 일(초명 술) 이 생각 납니다. 공의 기록을 찾다보니 상권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휴가 땐 공의 흔적을 찾아 전라 우수영 을 또 찾아 헤메야 할 것 같습니다. 영암은 제게새로운 임무를 주는 곳 같습니다. 그렇듯 영암은 저의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올 여름엔......
<사진 소개> (2005. 9. 12. 완식(익) 촬영. 10. 6. 항용(제) 편집 제공) <영암 향교 내의 선정비군, 좌측에서 세번째가 판서공(휘 계현)의 선정비임>
<판서공(휘 계현)의 선정비 전면>
<선정비 후면>
<영암 향교 정문>
<향교 내의 정자>
나) 김적(金 책받침+易) 만력갑오(1594,선조27년)생-1660(?)) 본관 안동. 자 而遠(이원). 부 계현 모 양천허씨 무과 급제후 인조5년 선전관 인조 9년 무과 參考官,무과 알성 초시 참시관,인조 10년 개천군수, 인조14년 군기시첨정,인조23년 선천부사,인조25년 은성부사를 거쳐 인조 27년 경상좌병사를 지냈다.효종2년 정주목사, 효종4년 6월7일 -효종6년 4월 평안병사,효종6년 9월 북병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효종8년9월18일 동지중추부사,11월18일 전남병사,효종10년 3월26일에 경상우병사 겸 3도수군 통제사를 제수받아 현종 원년 12월까지 병을 얻어 사직하는 날까지 남해바다를 지켰다. 대략 1660년 9월에 졸하여 엄정면 논강리 논리동에 묻혔다.가선대부. 정부인 전주이씨 사이에 5남 3녀를 두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다) 김일(金逸초명 述(술)) 萬曆癸酉,선조36년1603년-효종2년(신유)1651) 본관 안동. 부 계현, 모 양천허씨. 자 而緖(이서) 무과 급제 후 인조 5년 江都좌초관(훈국파총)(정유난)으로 왕실을 扈駕했다.인조8년 용천부사를 제수 받고 인조 임금으로부터 甲?(갑주)를 튼튼하고 우수하게 제작한 공로를 인정받아 가자를 받았다.인조8년 형조 정랑,부산진결포수군만호,인조9년 창성부사인조15년 중화현감, 인조16년 충청수사,인조18년 의금도사,동년 11월 전라우수사,인조21년 전라병사,인조23년 정주목사,인조24년 황해병사,인조 25년 안주목사,평안병사를 제수 받았다. 인조 26년 인조임금으로부터 숙마1필을 하사받았다.인조 26년 6월9일 五衛將,인조27년 경기우방어사장단부사를 지내고 효종즉위년 10월23일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兒馬1필을 하사받았다. 통제사를 거쳐 그해 7월함경북도 병마절도사겸 경성도호부사(북병사) 제수받았다. 북쪽 국경을 지키던 중 효종 2년 임소에서 49세에 병으로 죽었다. 생전에 수차에 걸쳐 파격적인 승진을 하거나 왕의 총애를 입은 바 다른 대신이나 대간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여러 번 받은 바 있다. 공의 사후 엄정면 논리동 구장곡(구장골)에 반장을 한 뒤 엄정면 용산리 향림에 묻혔다.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兄 김적 과 더불어 인조, 효종 때 통제사,북병사를 지냈다.
부인은 충주출신으로 임진왜란 시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워 광남군으로 책봉된 광주이씨 광악의 따님이다.정부인 광주이씨에게서 두명의 딸을 두었다. 정부인 의령남씨 에게서 5남을 두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및 비문.
라) 김익휘 (金益輝) (? -- 1705.6.14졸(숙종31년) 본관 안동 자는 輝甫, 부는 김 적 모는 정부인 전주이씨의 3남, 무과급제 후 효종6년 조령첨사, 효종6년11월 13일 명천부사(도호부사)현종10년 3월15 혜민서 참봉, 숙종28년 1월10일 감찰, 숙종28년 윤6월28일 이성현감, 숙종31년 6월 22일 임지인 함경도 이성 에서 사망, 묘지:충북 충주 엄정 논리동 선영, 배는 숙인 김해김씨 참고문헌:승정원일기.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마) 김광휘 (金匡輝) (1636(인조14년(병자)-1686(숙종12년 본관 안동 자는 季輔, 무과급제 후 현종6년 7월 5일 부장, 숙종 원년 7월 27일도총도사, 숙종 원년 12월27 갑산부사, 숙종3년 4월26일 정초(훈련도감)파총, 숙종4년 5월18일 군기시 첨정, 숙종4년 8월14일 창주첨사, 숙종7년 1월28일 무 겸 선전관, 숙종8년 1월9일 평안병로후(북로후), 숙종11년 1월19일 숙종 임금에서서 평안 북로후 의 책무를 다한 공로를 인정받아 궁시를 하사받음. 묘는 충주 엄정 논리동 선영. 배 숙부인 원주이씨
바) 김사묵 (金思默) (2008. 4. 28. 완식(익) 제공) (1)觀察使公 諱 思默 가계표 소개 : 사형(士衡) - 승(陞) - 종숙(宗淑) - 질(礩)- 지동(智童) - 방(滂) -언청(彦淸)(운봉현감) - 신(愼) - 계현(繼賢)(호성공신3등.만포진첨사.영암군수) - 적(멀적)(통제사) - 익휘(益(輝)(명천도호부사) - 감(戡)(사헌부감찰) - 서하(瑞夏)- 근(根)(군수) - 재혁(載爀) - 호(壕) - 원복 (源 福 )- 전 (橏) - 사묵(思黙 )
(2)약력 소개 *1856년. 04. 09 : 출생. 주소: 경성 북부 연동 30의 3 *1897년. 01. 15 : 독립협회에 보조금 50전 기부. 동년 3.31일 50전 기부 *1895(고종32) 7월2일 : 일본유람신사단 참여. 중추원참사관(1900). *1900년. 05. 10 : 겸도지부각항문부조사위원, *1902년. 07. 05 : 평리원검사 *1902년. 07. 19 : 중추원 의관 *1903년. 04. 07 : 경무국장 경무사(경무청 경무국장) (참고:1903.7.2일 도민의 난식해소위한 쌀공급을 잘못해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인해 해소를 못한 것에대해 자핵소를 제출 2개월 감봉처분 받음) *1905년. 03. 07 : 경무청 경찰국장(정3품) *1905년. 09. 27 : 경무청 경무사 *1905년. 10. 25 : 국민교육회 찬성금 10원 기부 *1907년 : 중추원 특진관 *1907년. 01. 18 : 경사정임 중추원부찬의에서 경무사로 승진. 동년 7.1 중추원찬의 *1907년. 04. 21 : 군부대신 권중현 피습,박용화 피습 사망으로 견책 받음 *1907년. 05. 30 : 정2품 내부경무국장 임명 *1907년. 06. 28 : 경남관찰사 *1908년. 06. 11 : 경기관찰사(칙2급 공훈 종2품). 중추원찬의 *1909년. 01. 07 : 경시총감.헌병대장(이상일본인) 등과 성환역에서 소견 *1909년. 01. 12 : 대구행재소에서 순종황제 소견 *1909년. 01. 27 : 개성역에서 순종황제 소견 *1909년. 02. 01 : 순종황제 소견 *1910년. 06. 07 : 대한매일신보- “융희 4년 6.7(화)이 날짜 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중앙정부와 지방관리 간의 공문을 일문(日文)으로 행하는 것을 내각령으로 금지하였는데도 근일 각 관찰사의 공문을 보면 경기관찰사 김사묵 이외에는 모두 일문으로 시행한다고 한다 *1910년. 10. 17 : 중추원 찬의. 신사보감 기록 *1910년. 12. 19 : 찬의 의원면직 (주: 이 기간 중의 활동을 문제로 삼아 민족문화연구회에서는 친일활동1차 조사자로 관찰사공을 지목했으나 2008. 4. 심사 후 최종 명단에서 제외됨) *1920년. 06. 27 : 조선교육회 창립총회를 윤치소의 집에서 개최. 회장:이상재. 부회장:김사묵.이사:윤치소.유진태.김후병 *1934년 : 「삼천리」제6.7권 기록에서 공을 평하기를, “강직 고결한 인격자. 지금은 존침도 알 수 없으나 병합 후에는 일시 찬의 노릇을 한것 같다” 고 평함 묘지: 충북 충주시 엄정면 논강리 논동 선영
(3) 묘비 건립 (2010. 1. 12. 완식(익) 제공) 1. 일시 : 2009년 10월 8일 2. 찬자 : 김완식(익) 3. 재질: 오석 4. 크기 : 54cm (넓이) x 150cm (높이) x 24cm (두께) 5. 건립 장소 : 묘소(충북 충주 엄정 논리동 선영)
묘소 및 묘비
묘비
<관찰사공 묘역 및 가승, 초상화 탐방기> (2008. 5. 26. 완식(익) 답사 제공, 항용(제) 편집) 관찰사공 휘 사묵의 자료를 얻기위해 주말을 이용해 시골을 다녀 왔습니다. 시골에 도착하여 어머님을 잠깐 뵙고 아버님 산소에 들러 고하고 바로 논동마을의 중터말(속칭 방아다리골) 에 위치한 관찰사공의 묘지로 갔습니다. 관찰사공의 묘지는 휘 서하 공의 바로 아래에 잇대어 있으며 동네가 한자락에 내려다 뵈이는 양지바른 곳 이었습니다. 이러저런 형태로 살펴보고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근자에 세운 묘비를 살펴보니 고종 대 원성의 상징이었던 이용익 일파를 가두었다가 곤욕을 치루시고 벼슬을 내어놓고 낙향한 후 다시 고종 임금에게 불려올라간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비석의 건립기에 직계후손들의 이름은 적고 방손들의 이름이 많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태균아저씨가 몇 번이고 묘지명을 좀 지어달라 부탁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갑니다.
다음날 관찰사공의 후손 족숙부 태균 아저씨를 일요일 오후에 엄정 목계 휴게소에서 만나 인접 앙성면 능골로 이동하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휘 양묵공의 후손인 태홍 아저씨(태균아저씨와는 육촌지간)가 저희를 반갑게 맞아 들이시며 다과를 내어 주셨습니다. 인사를 여쭙고 나니 젊은 사람이 종사에 관심을 가져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송구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양묵 공은 관찰사공의 형제 이십니다. 관찰사공이 후사를 잇기위해 입적은 하셨지만 우애가 아주 깊으셔서 그 어려운 살림에도 꼭 먼저 "큰집"을 챙겨주셨다고 합니다. 태홍 아저씨가 소장하고 계시는 전신 사진을 내어 주셨습니다. 사진은 3번 접는 절첩본 형태이며 검은색 표지로 되어 있습니다. 사진의 후면에 K.Iwata.keijo 라고 쓰여 있는것을 보니 경성의 이와타출신사진사의 사진관에서 찍으셨던 것 같습니다. 사진 속의 관찰사공은 단아하시고 꼿꼿한 모습이셨습니다. 체구는 적으셨던 것 같고 오만하게 보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품이 단정하시고, 지조가 있으신 풍모가 절로 드러났습니다.
그런 후 태균아저씨가 소장하고 계시는 관찰사공의 친필 가승을 내어주셨습니다. 자그마한 절첩본 형태이며 7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었습니다. 우리 집안의 시조 김알지 공으로 부터 관찰사공까지 기재 되어 있고 글씨체는 행서로 정서하신 것이었습니다. 글씨는 너무도 잘쓰신 명필 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승에서 특이한 사항, 새로이 알게 된 몇가지 사항이 있었습니다. 특히 문정공 휘 질 의 손 휘 방 공이 통덕랑 이었다는 점, 언청 공이 족보의 기록대로 운봉현감만이 아니라 진도군수 이셨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통제사공 휘 적 공이 가승에는 가의대부로 적혀 있는 것은 묘비석의 가선대부와 달랐습니다. 품계는 같으나 용어가 달리 적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휘 감 공이 합천군수를 지내셨다는 사실 등은 제게 더 많은 과제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태균아저씨가 소장하고 계시는 통제사공 휘 적 소계파의 가승을 보여주셔서 촬영을 했습니다. 두루마리 형태의 필사본이었고 족보의 내용을 요약한 것 이었습니다. 두서너시간 아저씨들과 관찰사공에 관한 일화등을 모으고 추후 새로이 건립할 묘비석의 내용에 추가할 것들을 확인하다보니 저녁 입니다.
식사를 하고가라는 말씀을 뒤로 하고 대전으로 내달려오니 어둠이 도시를 덮고 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광명성으로 선조님들이 자리하시길, 그리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그 빛을 따르게 하시기를 간구하면서 잠자리에 듭니다
<사진 자료> 1. 초상화 경기.경남 관찰사 휘 사묵 공의 사진. 촬영장소: K.Iwata Keijo
주: 게이조는 일본어로 경성 즉 “서울”을 의미합니다. 이와타는 시즈오카에 속한 지명입니다. 즉 시즈오카에서 온 사람이 경성에서 운영하던 사진관이 아닌가 싶습니다
2. 가승
<가승1> 관찰사공이 친필로 정리하신 가승 1페이지입니다. 절첩본이며 인쇄체 같은 행서로 한눈에 보아도 달필이셨습니다.
<가승2>
<가승3>
<가승4>
<가승5> 15세조 휘 방 공이 통덕랑이었음은 족보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16세조 휘 언청 공은 운봉현감으로만 기재되어 있습니다. 군수위의 한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승6> 6페이지. 통제사공의 품계를 종2품 가의대부로 적으셨는데 묘비에는 가선대부로 되어있습니다. 가의대부는 가정대부로 불리기도 합니다
<가승7> 증조에 이르러서는 생부와 양부를 모두 기재해 주셨습니다. 휘 양묵 공은 관찰사공의 형님이십니다. 미루어 보건데 위 가승은 손자를 위해 관찰사공이 친히 만들어 주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관찰사공의 가승은 확대 복사하여 영인을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내용은 문서화하여 조만 간에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가승8> 위 가승은 관찰사공의 후손들을 위해 만들어 종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는 신라 김알지 왕으로부터 관찰사공의 직계손 태균까지 되어 있습니다. 관찰사공은 무후 이셔서 입양손으로 계를 이으셨습니다.
<가승9>
<가승10>
<가승11>
<가승12>
<가승13> 자료제공, 관찰사공의 사진: 김태홍 (충주 앙성면 거주) 관찰사공의 가승 및 가승: 김태균(충주시 거주)
3. 관찰사공 묘소 <묘비> 관찰사 공의 묘지 최근 사진입니다(2008년 5월24일 촬영) 묘비석 전면 (묘비는 다시 문구를 수정. 보완하여 새로이 세우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봉분과 입석(전 좌측면에서 촬영)
비석의 후면(이용익 일파를 체포하였다가 곤욕을 치루셨다는 공의 강직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묘소의 후면에서 정면을 향해 촬영 하였습니다
<서찰 소개> (2008. 5. 1. 완식(익) 제공, 항용(제) 편집)
1. 서찰1 1) 작자 : 김사묵 2) 작성일 : 미상 3) 탈초, 번역자 : 김세봉, 박상수(단국대 교수) 4)원문 및 역문
刪蔓白 去夜大官有變 通之說 而軍協 亦爲遞改云 果 聆燭耶 下示伏望 侍生 金思黙 白 (인사말씀을 생략하고 아룁니다. 지난 밤 대관(大官)에서 변통하는 말이 있었고 군협(軍協)1)도 바뀐다고 하는데 과연 들었는지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시생(侍生) 김사묵(金思黙)은 아룁니다. * 주1: 군협 = 군부협판을 줄여서 이름
2. 서찰2 1) 작자 : 김사묵 2) 작성일 : 미상 3) 탈초, 번역자 : 김세봉, 박상수(단국대 교수) 4)원문 및 역문 刪冗白 去夜 果 入監 而有何處分耶 侍生 金思黙 白 (인사말씀을 생략하고 아룁니다. 지난밤 과연 수감이 되어 어떤 처분이 있었는지요? 시생(侍生) 김사묵(金思黙)은 아룁니다.)
3. 서찰3 1) 작자 : 김사묵 2) 작성일 : 미상 3) 탈초, 번역자 : 김세봉, 박상수(단국대 교수) 4)원문 및 역문 伏問日間 氣體候萬安 伏溸伏溸 侍生 印昨已耳 生雉二 首 靑魚一級 時物也 故 敬呈 或助饌需耶 愧汗 姑擱 上候書 侍生 金思黙 白 再拜 〈추신〉 年終月銀受領 故略表菲 誠耳
요사이 건강은 어떠신지요. 그립습니다. 저는 이전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을 뿐입니다. 살아 있는 꿩 두 마리와 청어 한 마리는 제철 물건이라 삼가 보내니 혹시라도 반찬거리에 보탬이라도 될 런지요? 부끄럽습니다. 이만 줄이고 글을 올립니다. 시생(侍生) 김사묵(金思黙)은 재배(再拜)합니다. 〈추신>세밑에 월은(月銀)2)을 받아 간략하게나마 보잘 것 없는 정성을 표했을 뿐입니다. 주2 : 월은= 월급으로 받은 돈
4. 서찰4 1) 작자 : 김사묵 2) 작성일 : 미상 3) 탈초, 번역자 : 김세봉, 박상수(단국대 교수) 4)원문 및 역문
刪蔓白 頃者 入鑑錄 得或有閪 失之慮 故一紙更呈 以爲致兩件 若何 亦不無守奉官等啣 爲之之 慮 如此 則還爲昌皮矣 或可 提稟耶 悚仄已耳 侍生 金思黙 白 再拜
(인사말씀을 생략하고 아룁니다. 지난번에 입감록(入鑑錄)을 얻었는데 혹시라도 잃어버릴 근심이 있어서 종이 한 장을 다시 보내 두건으로 만들려고 하니 어떨지요? 또 수봉관(守奉官-주3)등의 직함이 없을 수 없으니 그로 인한 근심이 이와 같다면 도리어 창피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제품(提稟)할 수 있을 런지요? 송구할 뿐입니다. 시생(侍生) 김사묵(金思黙)은 재배(再拜)합니다.
주3 : 수봉관= 조선 시대에, 원소(園所)를 맡아 지키는 일을 하던 벼슬아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순강원(順康園), 소령원(昭寧園) 따위에 2명씩 두었다
5. 서찰5 1) 작자 : 김사묵 2) 작성일 : 미상 3) 탈초, 번역자 : 김세봉, 박상수(단국대 교수) 4)원문 및 역문
刪 冗白 山訟事 今承對質 裁判之題 明當就質 而彼 必 又事誣囑 以錢脅制矣 是所深慮也 以此 下燭 惟依法律施行 從速 判決 扶挽法紀之意 鄭重 措辭 又裁一柬於宋 令許 伏望伏望 伸此㥽惋 在明一質耳 侍生 金思黙 白 〈추신〉期於今夕明早間 送簡若何 (인사 말씀을 생략하고 아룁니다. 산송(山訟)의 일로 오늘 대질 재판의 제전(題箋)을 받아 내일 마땅히 나아가 대질을 할 것인데, 저쪽에서는 반드시 무고함을 일삼고 돈으로 위협할 것이니 이것이 매우 걱정입니다. 이를 굽어 살피시어 오직 법률에 따라 시행하여 되도록 빨리 판결하여 기강을 돕는다는 뜻으로 정중히 조사하시고 또 송령(宋令)께 서찰 한통을 보내주시기를 빕니다. 저의 원통함을 푸는 길은 내일 한 번의 대질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시생(侍生) 김사묵(金思黙)은 아룁니다. <추신〉오늘 저녁이나 내일 이른 아침 사이에 서찰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6)충주 엄정 소재 익원공파 문정공계 선조님 묘지석 비문 및 해석 (2007. 5. 31. 완식(익) 제공) (휘 신. 휘 계현. 휘 적. 휘 일)
<원문> 贈 嘉善大夫 刑曹參判 兼 同知 義禁府使 金公 愼 之墓 贈 貞夫人 坡平尹氏祔左
公姓金諱愼 字謹叔系出安東高麗忠烈公諱方慶之後也高祖諱礩領議政諡文靖曾祖 諱智童永興府使祖諱滂考諱彦淸雲峯縣監妣陽川許氏諱(?)女也公聘(빙)贈左通禮坡平尹公諱耔(북돋울자)女生 男繼賢滿浦僉使庶子繼哲繼聖僉使二男一女長■三道統制使次逸咸鏡北道兵使女適郡守成後益繼哲二男稷茂(무성할무.아름다울무.힘쓸무)實繼聖四男(?) 陞(?)統制使五男三女男振輝挺輝益輝府使正輝匡輝府使女適奉使(→事?)金得元士人鄭爾(꽃번성할이)說鄭世演庶出子永(?)輝及四女兵使二女適營浮李延沃佐郞鄭載海庶子五人胤輝良輝德輝世輝自輝郡守男 鼔 (두드릴고) 武科都正稷四男景輝重輝揚輝明輝茂實二男元輝(?)時輝 陞(?) 子就諱適者澤輝內外曾玄百餘人公生卒年歲( ) 不可( )而公子僉使嘉靖丙寅生則公之年代 㴃(?)可推失墓在忠州嚴政論里洞負(짐질부)良原夫人 柎 焉山人兩孫推恩贈公刑曹參判配貞夫人孫兵使良无
(? )代墓石未及磨承而卒公玄孫戣戡等與諸後孫( )財( )實首祭田又浮刻表以堅(→竪?)未逐(→遂?)而 殘(?)兵使外孫鄭是先爲忠州牧使始完其事去
皇明崇禎紀元後八十季丁險立 祭田 論里洞就(?) 字第十沓三十二束內興十四夜未第十一沓八束二夜八合四斗 痲陽坪年(?)字第二十一沓十三卜五夜內十一十一夜束四斗幷巳(→己?)酉量 高山洞累字十七沓十六十七束六十卜四束王夜未五斗洛(→落?)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使行折衝將軍滿浦津兵馬僉節制使金公繼賢之墓 贈貞夫人陽川許氏祔左
公姓金諱繼賢字善承其出安東人高麗忠烈公諱方慶後也高祖諱智童永興府使曾祖諱滂祖諱彦淸雲峯縣監考諱愼贈刑曹參判批(→妣?)破(→坡?)坪(→平?)尹氏考贈左通禮諱耔公以嘉靖丙寅生年二十五登武科卽拜宣傳官而 麽(?)都摠(?)都事戶曹佐郞正郞軍吏僉正軍資正外而拜義州判官豈川(개천)府使端川都(→郡?)守靈巖郡守而鳳山郡麗牧南原府則不
赴(달릴부)乙巳 陞(?) 階拜滿浦僉使以萬曆戊申卒壽四十三配陽川許氏列椗
(? )卞女一十浚(?)壽三十八合葬于忠州嚴政論里洞寅坐原以丙子追贈戶曹判書配貞夫人有二男一女男長■三道統制使次逸咸鏡北道兵使女連(→適?)郡守成後益統制使五南(→男?)振輝良輝益輝府使正輝匡輝府使三女適奉事金得元士人鄭爾說世演兵使二女適罃抔(?)李延沃兵曹佐郞鄭載海庶子胤輝輝德輝世輝自輝郡守男鼔(두드릴고)武科都正振輝二男揚輝一女匡輝內外曾玄孫百與人公次子兵使逸祖祖(→考?)兩代墓克人水沒列立其外孫鄭是先爲忠州牧使諆諸後孫以成兵使公遺志云
皇明崇禎紀元後六(→八?)十年丁亥十一月日立統制庶子永輝庶女四遺志忠烈
祭典 木麻(?)原(?) 字第七畓十三卜一束三夜未五斗落己酉量案下同 高山洞進(?)字第十九畓十五卜三束內上적(멀적)七十七束六夜(?)(→未?)五斗落
朝鮮國折衝將軍守咸鏡北道兵馬節度使兼鏡城都護府使 金公逸之墓 貞夫人慶州李氏祔左
公姓金諱逸字而緖初名述有存避( )又(?)其先安東人高麗忠烈公諱方慶之後也曾祖諱彦淸雲峯縣監祖諱愼贈刑曹參判考諱繼賢滿浦僉使贈刑曹判書批(→妣?)陽川許氏列(→別?)坐冰女公以萬曆癸酉生歲餘而失( )恃婢乳甫得成長年什(→卄?)二登武科丁酉(→卯?)之亂扈駕江都爲訓局把( )( )自己巳至壬申援龍川昌城倅不赴
拜刑曹正郞 軍器僉正刹(→利?)城縣監丙子爲中和府使父淸人入寇( ) 元帥力于( )山戊寅以戰功陞(?)資拜忠淸水使自庚辰至已(?)(→己?)丑拜宣傳官訓練都正南陽府使全羅右水使春川府使全羅兵使安州牧使潢(→黃?)海兵使平安兵使五衛浮(?)長端府使陞統制使旋( )庚寅北兵使卒(→辛?)卬(?)十二月什(→卄?)三日卒于任所壽四十九返葬忠州內倉香林丑坐原夫人李氏潢(→慶?)州大姓弘文敎理諱( )慶旌善郡守諱好約南道兵使廣南君諱光岳曾祖若祖( )而主簿沔川(?)閔公諱建外祖也夫人後公什六年卒( )丁巳十一月十一日享年七(?)十六合葬于公墓有二女長適官浮李延沃生三女次適兵曹佐郞鄭載海生二男公側出五男胤輝양(→良?)輝德輝世輝自輝胤輝承遺命奉公祀胤輝五男三女양(→良?)輝女一及庶子一德輝三子世輝一子四女自輝一子二女公卒之五十七年外孫鄭是先爲忠州牧使立石墓前略記公也系生卒子姓及歷官次序(?)如石去
皇明崇禎甲申後六十四年丁亥秋立
** 글자가 틀렸거나 틀렸다고 간주되는 경우 使(→事?)와 같은 형식으로 제 의견을 반영해 보았습니다. 혹시 참고가 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불확실한 것은 억지로 해석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해석문> 증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김공 신의 묘 증 정부인 파평윤씨를 좌측에 부묘함
공의 성은 김씨요, 휘는 신(愼)이며, 자(字)는 근숙(謹叔)이요, 계(系)는 안동(安東)에서 나왔으니 고려시대 충렬공(忠烈公) 휘(諱:이름)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고조는 휘가 질(礩)이니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증조는 휘가 지동(智童)으로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고, 조(祖)는 휘가 방(滂)이며, 고(考:부친)는 휘가 언청(彦淸)으로 운봉 현감(雲峯縣監)을 지냈고, 비(妣:모친)는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휘 (?)(주.파보에는 磧 공으로 기재되어있고 양천허씨 가보에서 확인함. 당대의 유명한 처사였음)의 따님이다. 공은 증 좌통례(贈左通禮) 파평 윤공(坡平尹公) 휘 자(耔)(주.파보에는 承文의 공의 따님으로 기재됨) 따님과 혼인하여 생남하니 계현(繼賢)으로 만포 첨사(滿浦僉使)를 지냈고, 서자(庶)로는 계철(繼哲)과 계성(繼聖)이 있다.
첨사(僉使 : 계현)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 (주. 적(멀적) 공임)은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요, 차남 일(逸)은 함경북도 병사(咸鏡北道兵使)요, 따님은 군수(郡守) 성후익(成後益)에게 출가하였으며, 계철(繼哲)은 2남을 두었으니 직(稷)과 무실(茂實)이고, 계성(繼聖)은 4남을 두었으니(?)․․․승(陞?)이다.( 주. 이 부분은 파보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음. 직 공의 적손은 직 공으로 기재. 께성 공은 무과부장을 지내신 수(遂 )공이 있으나 절손된 것으로 나옴)
통제사(統制使 : 첨사의 장남)는 5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드님은 진휘(振輝)․정휘(挺輝)․익휘(益輝 : 府使)․정휘(正輝)․광휘(匡輝 : 府使)이고, 따님은 봉사(奉事) 김득원․사인(士人) 정이설(鄭爾說)․정세연(鄭世演)에게 출가하였으며, 서출(庶出)로 아드님 영휘(永?輝)와 4녀가 있다.
병사(兵使 : 逸)는 두 따님을 두었으니 영부(營浮?) 이연옥(李延沃)․좌랑(佐郞) 정재해(鄭載海)에게 출가하였고, 서자(庶子) 5인은 윤휘(胤輝)․양휘(良輝)․덕휘(德輝)․세휘(世輝)․자휘(自輝)이다. 군수(郡守 : 성후익을 가리키는 듯?)의 아드님 고(鼔)는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도정(都正) 벼슬을 지냈다.
직(稷)은 4남을 두었으니 경휘(景輝)․중희(重輝)․양휘(揚輝)․명휘(明輝)이고, 무실(茂實)은 2남을 두었으니 원휘(元輝)와 시휘(時輝)이며, 陞(?) 子就諱 適者 택휘(澤輝) 내외의 증현손이 백여 인이다.
공(公)의 생졸 연세(生卒年歲 :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공의 아들 첨사(僉使)가 가정(嘉靖) 병인(丙寅 : 1566년, 명종 21)년에 출생한 즉 공의 연대는 그 잃은 것을 대략 추정할 수 있다. 묘(墓)는 충주 엄정 논리동(嚴政論里洞) 부양원(負良原?)에 있고, 부인(夫人)을 합장하였으니‥‥ 焉山人. 양손(兩孫)으로 인하여 추은(推恩)을 받아 공은 형조 참판(刑曹參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손자인 병사(兵使)가 良无(? )代墓石未及磨承而(‥묘석을 세우려다 하지 못한 듯?) 졸(卒)하였다. 공(公)의 현손 규(戣)․감(戡) 등이 여러 후손들과 더불어 재물을 갹출하여 제전(祭田)을 마련하고 또 묘표를 깍아 세우고자 하였으나 완수하지 못하고 남은 것을(?) 병사(兵使)의 외손(外孫) 정시선(鄭是先)이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일을 완성하고 갔다.
황명 숭정(皇明崇禎) 기원 후 80년 정해(丁亥 : 1707년, 숙종 33년) 겨울에 세우다.
제전(祭田) 논리동 취(就)자 제10답 32속, 내흥(內興) 14배미 제11답 8속 28(?)홉 4두 마양평 년(年?)자 제21답 13복 五夜內十一十一夜束 4두 모두 기유(己酉?) 양안(量案?) 고산동 루(累)자 17답 十六十七속 60복 四束 왕배미 5마지기(斗落)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절충장군 만포진병마첨절제사 김공 계현의 묘 증정부인 양천허씨를 좌측에 부묘함
공(公)의 성은 김씨요, 휘는 계현(繼賢)이며, 자(字)는 선승(善承)으로 그 출자는 안동 사람이니 고려 충렬공 휘 방경(方慶)의 후예이다. 고조의 휘는 지동(智童)이니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고, 증조의 휘는 방(滂)이며, 조(祖)의 휘는 언청(彦淸)으로 운봉 현감(雲峯縣監)을 지냈고, 고의 휘는 신(愼)이니 증형조참판(贈刑曹參判)이요, 비(妣 : 모친)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니 부친(곧 外祖)은 증좌통례(贈左通禮) 휘 자(耔)(주.승문 공을 말함)이다. 공은 가정(嘉靖) 병인(丙寅 : 1566년, 명종 21)년에 태어나 25세에 무과에 합격하여 곧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도총부 도사(都摠莩事)․호조 좌랑(戶曹佐郞)․정랑(正郞), 군리 첨정(軍吏僉正)․군자정(軍資正)을 거쳤으며, 외임으로는 의주 판관(義州判官)․개천 부사(豈川府使)․단천 군수(端川郡守)․영암 군수(靈巖郡守) 등을 지냈고, 봉산군(鳳山郡)․여주?목(麗牧)․남원부(南原府)는 부임하지 않았다. 을사(乙巳)년에 품계가 올라 만포 첨사(滿浦僉使)에 제수되었다. 만력(萬曆) 무신(戊申 : 1608년, 광해군 즉위년)년에 졸하니 수가 43세였다. 부인은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의 따님이니, 一十浚(?) 수는 38세로써 충주 엄정 논리동(嚴政論里洞) 인좌원(寅坐原)에 합장하였다. 병자(丙子)년에 (공은) 호조 판서(戶曹判書),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 (주. 적 공을 말함)은 삼도 통제사이고, 차남 일(逸)은 함경 북도 병사(咸鏡北道兵使)이며, 따님은 군수(郡守) 성후익(成後益)에게 출가하였다.
통제사(統制使)의 5남은 진휘(振輝)․양휘(良輝)․익휘(益輝 : 府使)․정휘(正輝)․광휘(匡輝 : 府使)이고, 3녀는 봉사(奉事) 김득원(金得元)․사인(士人) 정이설(鄭爾說)․정?세연(鄭?世演)에게 출가하였다.
병사(兵使)는 두 따님을 두었는데, 앵부(罃抔?)(주. 영부 의 오기) 이연옥(李延沃)․병조 좌랑(兵曹佐郞) 정재해(鄭載海)에게 출가하였고, 서자(庶子)는 윤휘(胤輝)․양(?)휘(良?輝)․덕휘(德輝)․세휘(世輝)․자휘(自輝)이다. 군수(郡守)의 아드님 고(鼔)는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도정(都正)이 되었으며, 진휘(振輝)․2남 양휘(揚輝)․1녀․광휘(匡輝) 내외의 증손․현손이 100여 인이다.
공의 차자(次子) 병사(兵使) 일(逸)이 조․고(祖考?) 양 대의 묘를 단장하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하고 졸(卒)하엿다. 그의 외손 정시선(鄭是先)이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어 여러 후손과 의논하여 병사공(兵使公)의 유지(遺志)를 이룩하자고 하였다. 황명 숭정(皇明崇禎) 기원후 80년 정해(丁亥 : 1707년, 숙종 33년) 11월 일에 세우다.
통제(統制) 서자(庶子) 영휘(永輝), 서녀(庶女) 4 유지 충렬(遺志忠烈)?
제전(祭典) 목마(木麻) 원(原)자 제7답 13복 1속, 3배미 5두락. 기유 양안(己酉量案). 아래도 같음 고산동(高山洞) 진(進)자 제19답 15복 3속, 內上적 77속, 6배미 5두락
조선국 절충장군 수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겸 경성도호부사 김공 일(逸)의 묘 정부인 경주이씨를 좌측에 부묘함
공의 성은 김씨요, 휘는 일(逸)이며, 자(字)는 이서(而緖)이다. 처음 이름은 술(述)이었는데 피휘하기 위해 개명하였다. 그 선조는 안동인으로 고려 충렬공 휘 방경(方慶)의 후예이다. 증조의 휘는 언청(彦淸)이니 운봉 현감(雲峯縣監)을 지냈고, 조의 휘는 신(愼)이니 증형조참판이요, 고(考)의 휘는 계현(繼賢)이니 만포 첨사(滿浦僉使)를 지냈으며, 형조 판서에 증직되었고, 비(妣)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이니 별좌?(列坐?) 빙(冰)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계유(癸酉 : 1773년, 선조 6년)년에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을 잃어 비(婢)의 젖을 먹고 자랐다. 22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정유(丁酉?, 丁卯일 듯) 란 때 강도(江都 : 강화도)에 호가(扈駕)하여 훈국(訓局 : 훈련도감) 파총?(把?)이 되었다. 기사(己巳 : 1629년, 인조 7년)년부터 임신(壬申 : 1632년, 인조 10년)년에 이르기까지 용천(龍川)과 창성(昌城) 군수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형조 정랑(刑曹正郞 )․군기 첨정(軍器僉正) ․이?성 현감(刹?城縣監)을 역임하였고, 병자(丙子 : 1636년, 인조 14년)년에 중화 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침입하자 元帥力于( )山 무인(戊寅 : 1638년, 인조 16년)년에 전공(戰功)으로 품계가 올라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임용되었다. 경진(庚辰 : 1640년, 인조 18년)년부터 기축(己丑, 1649년, 효종 즉위년)년에 이르기까지 선전관(宣傳官)․훈련도정(訓練都正)․ 남양부사(南陽府使)․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춘천 부사(春川府使)․전라 병사(全羅兵使)․안주 목사(安州牧使)․황해 병사(黃海兵使)․평안 병사(平安兵使)․오위?(五衛浮?)․장단 부사(長端府使)를 역임하고 통제사(統制使)에 올랐으며, 곧 경인(庚寅 : 1650년, 효종 1년)년에 북병사(北兵使)가 되었다. 신묘(辛卬 : 1651년, 효종 2년)년 12월 23(?)일에 임소에서 졸하니 수가 49세였다. 충주 내창 향림(忠州內倉香林) 축좌원(丑坐原)에 반장(返葬)하였다. 부인 이씨(李氏)는 광주(廣州) 대성(大姓)으로 홍문관 교리(弘文敎理) 휘(諱) ????( )경(慶)(주. 증조부) 정선 군수(旌善郡守), 휘(諱) 호약(好約)(주.조부) 남도 병사(南道兵使) 광남군(廣南君), 휘(諱) 광악(光岳)(주. 부를 말함) 曾祖若祖( )而主簿沔川(?) 민공(閔公)의 휘(諱)는 건(建)이니 외조(外祖)이다.???? 부인은 공보다 26년 뒤인 정사(丁巳 : 1677년, 숙종 3년)년 11월 11일에 졸(卒)하였으니, 향년 76세(?)로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두 따님이 있으니, 장녀는 관부?(官浮?)(주 영부로 다름 묘지에 기재됨) 이연옥(李延沃)에게 출가하여 3녀를 낳았고, 차녀는 병조 좌랑(兵曹佐郞) 정재해(鄭載海)에게 출가하여 2남을 낳았다. 공의 측실에서 난 5남은 윤휘(胤輝)․양휘(良輝)․덕휘(德輝)․세휘(世輝)․자휘(自輝)이니, 윤휘는 유명(遺命)을 받들어 공의 제사를 모셨다. 윤휘는 5남 3녀, 양휘는 1녀 및 서자 1명, 덕휘는 3남, 세휘는 1남 4녀, 자휘는 1남 2녀를 두었다.
공이 졸(卒)한 지 57년 째 되는 해에 외손 정시선(鄭是先)이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어 묘 앞에 비를 세우고 공의 계통, 생졸(生卒), 자성(子姓?) 및 지낸 관직 등을 차례로 기록하였다. 如石去?
황명 숭정(皇明崇禎) 갑신(甲申 : 1644년, 인조 22년) 후 64년 정해(丁亥 : 1707년, 숙종 33년) 가을에 세우다.
주: 묘지석은 공들의 사후 한참 지난 숙종 연간에 세워졌으며, 세운이는 외손인 정시선 공이 충주목사로 부임하여 세웠습니다. 묘지석 내용에 드러나 듯 계현 공 이래 큰 벼슬을 하셨으나 인조. 효종 년간에 있었던 격변기 즉 낙흥부원군의 역모에 북병사공이 관련이 있다하여 정사에는 임지인 함경도 경성에서 병으로 명을 달리하셨으나 시골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북병사공의 형님인 통제사 공 (휘 적)이 자살을 명했다고 합니다. 그런고로 세웠던 비석들은 땅에 묻고 이후 세우려고 했으나 세우지 못하다가 외손의 위선사업으로 세워진 것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석등 및 문관. 무인석 등이 온전했으나 몇 년 전에 문관. 무인석. 석등을 도난 당하고 현재 새로운 것을 세워 두었습니다.
주: 해석은 단국대 역사연구소 김세봉 선생님 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주석. 내용 보충은 제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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