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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004년도 강진 시제 참예기 (2004. 5. 6. 사진-발용(군), 글-윤식(문) 제공)
◈ 일 시 : 2004년 5월 3일(월)~4일(화) ◈ 시제일 : 2004년 5월 4일(음 3월 16일) ◈ 장 소 : 전남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 남산 ◈ 참석자(무순, 존칭 생략) 1)문온공파 대표 - 영환(문온공파 총무이사) 2)안 사 연 - 윤만(會항), 발용(會항), 정중(植항), 윤식
◈ 일정 1)5월 3일 : 서울 → 남원 용장서원 → 군동 내동마을 재실 → 마량포구 2)5월 4일 : 마량포구 → 군동 내동마을 재실 → 부사공(휘 季老) 묘소 → 대호군공(휘 儒) 묘소 → 선운사 → 서울
▣ 5월 3일(월요일)
◈ 07:00 서울 잠실 출발 → 남원 向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잠실 롯데호텔 앞은 차량들로 가득 찼습니다. 게다가 빗방울이 오락가락 한 탓에 시제 걱정이 앞섭니다. 내일은 맑게 개기를 빌면서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08:10분경 정중 종친께서 약속대로 대구에서 출발, 남원으로 향하고 있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윤만 종친께서는 회사일로 오후 2시쯤 출발하여 강진에서 합류하기로 하였습니다. 남원으로 가는 도중 하늘이 벗겨지면서 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이대로 날이 갰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남원시 경계로 들어서니 다시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제법 빗방울이 굵었습니다.
남원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예정보다 30분 가량 늦은 시각이었습니다. 진도까지 긴 여정이라 다소 무리하게 일정을 짰더니 출발부터 시간이 빡빡합니다.
정중 종친께서는 아침 일찍 출발한 우리 일행이 출출할 것을 생각해 바람떡을 잔뜩 사 들고 계셨습니다. 떡 빚은 솜씨도 솜씨려니와 정중 종친의 정성스런 마음에 참 꿀맛이었습니다.
◈ 남원 → 용장서원 이제 용장서원으로 향합니다. 이곳(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상동마을)에는 문온공(휘 九容 : 문온공파 파조) 할아버지께서 배향되신 서원입니다. 물계서원이 퇴락하여 아직 복원되지 못한 까닭에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문온공을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남원 시내에는 용장서원에 대한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어 남원시청 문화재 담당 직원과 두어 차례 전화통화를 하고도 서너 번씩 길을 물어서 간신히 찾아들어갔습니다. 그것도 그냥 지나칠 뻔한 것을 영환 종친께서 솟을삼문이 범상치 않다는 말씀에 고생을 한층 덜었습니다. 용장서원으로 들어가니 인기척이 없습니다. 서원 주위를 살펴봐도 사람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뒤편 숭덕사(崇德祠)로 올라가 향을 사르고 할아버지께 큰절을 올립니다.
2) 용장서원 방문기 (2004. 5. 6. 사진-발용(군), 글-윤식(문) 제공) ◈ 일 시 : 2004년 5월 3일(월)~4일(화) ◈ 시제일 : 2004년 5월 4일(음 3월 16일) ◈ 장 소 : 전남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 남산 ◈ 참석자(무순, 존칭 생략)
1)문온공파 대표 - 영환(문온공파 총무이사) 2)안사연 - 윤만(會항), 발용(會항), 정중(植항), 윤식
◈ 일정 1)5월 3일 : 서울 → 남원 용장서원 → 군동 내동마을 재실 → 마량포구 2)5월 4일 : 마량포구 → 군동 내동마을 재실 → 부사공(휘 季老) 묘소 → 대호군공(휘 儒) 묘소 → 선운사 → 서울
▣ 5월 3일(월요일) ◈ 07:00 서울 잠실 출발 → 남원 向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잠실 롯데호텔 앞은 차량들로 가득 찼습니다. 게다가 빗방울이 오락가락 한 탓에 시제 걱정이 앞섭니다. 내일은 맑게 개기를 빌면서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08:10분경 정중 종친께서 약속대로 대구에서 출발, 남원으로 향하고 있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윤만 종친께서는 회사일로 오후 2시쯤 출발하여 강진에서 합류하기로 하였습니다.
남원으로 가는 도중 하늘이 벗겨지면서 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이대로 날이 갰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남원시 경계로 들어서니 다시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제법 빗방울이 굵었습니다. 남원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예정보다 30분 가량 늦은 시각이었습니다. 진도까지 긴 여정이라 다소 무리하게 일정을 짰더니 출발부터 시간이 빡빡합니다.
정중 종친께서는 아침 일찍 출발한 우리 일행이 출출할 것을 생각해 바람떡을 잔뜩 사 들고 계셨습니다. 떡 빚은 솜씨도 솜씨려니와 정중 종친의 정성스런 마음에 참 꿀맛이었습니다.
◈ 남원 → 용장서원
이제 용장서원으로 향합니다. 이곳(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상동마을)에는 문온공(휘 九容 : 문온공파 파조) 할아버지께서 배향되신 서원입니다. 물계서원이 퇴락하여 아직 복원되지 못한 까닭에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문온공을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남원 시내에는 용장서원에 대한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어 남원시청 문화재 담당 직원과 두어 차례 전화통화를 하고도 서너 번씩 길을 물어서 간신히 찾아들어갔습니다. 그것도 그냥 지나칠 뻔한 것을 영환 종친께서 솟을삼문이 범상치 않다는 말씀에 고생을 한층 덜었습니다.
용장서원으로 들어가니 인기척이 없습니다. 서원 주위를 살펴봐도 사람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뒤편 숭덕사(崇德祠)로 올라가 향을 사르고 할아버지께 큰절을 올립니다.
숭덕사는 정면 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며, 현판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합니다. 숭덕사에는 서쪽부터 <병부낭중 돈암 양선생(兵部郞中 遯菴 梁先生 : 梁能讓)>, <용성군 삼강 양선생(龍城君 三江 梁先生 : 梁朱雲)>, <문경공 척약재 김선생(文敬公 惕若齋 金先生 : 金九容)>, <문장공 청계 양선생(忠壯公 淸溪 梁先生 : 梁大樸)>께서 모셔져 있습니다.
용장서원에 관한 자료는 영환 종친께서 우리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신 자료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현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네 분께 인사를 올리고 나오니 그제야 인기척이 납니다. 숭덕사 앞의 경의당(敬義堂) 원장실로 들어가 맞절로 양씨 문중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동김가라 말씀드리니 환하게 반색이십니다.
마침 모레(음력 3월 17일)가 시향을 올리는 날이라 제수 준비차 시내에 나가셨다 막 돌아오신 참이시랍니다. 배향되신 네 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새롭게 배우는 내용이 많습니다.
영환 종친께서 미리 준비한 척약재 할아버지에 대한 책자 <범급(帆急)>과 약소하나마 향촉대를 드리고, 척약재 할아버지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이 아니라 ‘문온공(文溫公)’이신 내용을 말씀드립니다.
남원양씨 남원양씨 용만공대종회(龍巒公大宗會) 양타(梁柁) 회장께서는 <무극집(無極集)>과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를 답례로 주십니다. 양 문중 할아버지 문집을 예물로 교환하니 더욱 뜻깊은 날입니다. 양타 회장께서는 문온공의 대표작인 한시 <범급>을 주욱 읽으시고는 이내 우리말로 풀이를 하면서 음미하십니다.(정말 부러웠습니다.)
현재 용장서원 관계 일은 우리 문중에서는 김제에 사시는 두식 종친께서 맡고 계시다고 합니다. 문온공파종회 총무이사를 맡고 계신 영환 종친께서는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문제를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경의당은 정면 4칸×측면 1.5칸의 팔작지붕집인데 주춧돌을 호박처럼 둥글게 다듬은 것이 특이합니다. 현판은 숭덕사 현판과 마찬가지로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것입니다.
경의당 좌우에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었을 터인데, 현재는 서재만 남아 있습니다. 정면 4칸×측면 1.5칸의 팔작지붕집이나 경의당보다는 규모가 조금 작습니다. 마당에는 <용장서원기적비(龍章書院記蹟碑)>가 서 있는데, 비문에도 ‘문온공’이 아니라 ‘문경공’이라 적혀 있습니다.
비문을 대한 채 다시 긴 정담이 이어집니다. 영환 종친께서 비문을 죽죽 읽어 나가며 관계되는 일들을 말씀드리자 양타 회장께서도 감탄하신 모양입니다. “오랜만에 한문을 잘 아는 분들이 오셔서 반갑소.” 하시며 얼굴이 더욱 밝아지십니다.
아쉽게도 이제 길을 재촉해야 할 시간입니다. 어느덧 12:20분이 되었습니다. 솟을삼문 앞에서 양타 회장을 비롯해 충장공파 종손 양진환 선생 등 남원양씨 어르신 네 분과 우리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고 아쉬운 이별을 나눕니다. 마당 앞까지 배웅을 나오신 남원양씨 어르신들께서는 “안동김문의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점심이라도 들고 가시오.” 하며 발걸음을 쉬이 놓아주지 않으십니다.
양타 회장께서 말씀 끝에 “서원 운영에 보태라고 안동김문에서는 밭 서마지기를 들여놓았네.” 하시던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 용장서원 가는 길
남원 시외버스터미널(10:30분) → 첫 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 → 도로 표지판을 따라 주생면 방향으로 계속 직진 → 약 20분간 주행 후 오른쪽 길가에 자그마한 ‘상동마을’ 표석을 보고 우회전 → 마을길을 따라 직진(상동교회가 비교적 눈에 띄는 건물임.) → 방음벽을 세운 육교 형태의 전라선 철로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상동수퍼, 왼쪽에 상동마을회관(왼쪽에 한 길 정도의 돌표석이 있으나 눈에 잘 띄지 않음) → 10여M 왼쪽 골목길 → 차량 서너 대 주차할 수 있는 마당 → 용장서원
(초행길이라 자세히 설명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용장서원 → 강진
다시 나주 시내로 들어가 대호군공(大護軍公 諱 儒) 할아버지 묘역으로 향합니다. 용장서원에서 정담을 나누는 사이 하늘이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강진으로 향하는 도중 발용 종친께서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소가 나주에 있으니 그곳을 찾아뵙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하십니다. 우리 일행은 웬만큼 오는 비는 맞기로 결정하고 영환 종친께서 대종회 사무국장(관묵)께 전화로 대호군공파 회장님 연락처를 부탁드립니다.
곧이어 사무총장께서 다시 전화를 주시고, 함평의 상회 종친, 보성의 태식 종친 등 대호군공파 종친들과 숨가쁘게 전화가 오고갑니다.
아쉽게도 대호군공 할아버지 시제가 일요일인 어제(양력 5월 1일, 음력 3월 14일)였답니다. 대호군공 종친들께서는 전남 함평, 보성 등지에 주로 거주하시기 때문에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역은 나주 금천농협 이사이신 박민찬 씨께서 관리하고 계십니다. (연락처 박민찬 씨 - 금천면 죽촌2구 상촌마을 010-8331-7420)
나주 시내로 들어서니 장대비가 떨어집니다. 금천농협을 통해 박민찬 씨 연락처를 알아내 수차례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들일을 나가서 댁에는 사람이 없었고, 핸드폰이 바뀌어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예정지인 부사공(휘 季老) 할아버지 묘소를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강진의 재이 종친께서 마중을 나오시겠답니다. 송구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일이었습니다.
부사공께서는 군사공의 손자로서 계보는 다음과 같으며, 발용 종친의 18대조이십니다.
▲군사공(휘 七陽) → 3子 인수부윤공(휘 墩) → 외아들 부사공(휘 季老)
부사공 묘소는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에 계신 판서공(휘 愃) 할아버지 묘소에서 차량편으로 약 20분 거리입니다. 서둘러 강진으로 향합니다.
잘 닦인 도로를 달리니 기분이 상쾌합니다. 13:40분경 동광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왔습니다. 14:00시가 조금 넘어 윤만 종친께 연락을 취하니 방금 강진행 고속버스에 오르셨다고 합니다. 먼 길 심심하기도 하실 텐데……먼 길 무사히 합류하시기를 바라며 전화를 끊습니다.
광주를 빠져나오고서도 한참을 더 달려 14:40분이 되어서야 늦은 점심으로 허기를 달래고 15:00시 정각, 다시 강진으로 향합니다.
노곤한 기운에 깜빡 졸다 깨니 월남사 터 인근입니다(아침 일찍부터 운전대를 잡으신 발용 종친께 무척 송구스러웠습니다.). 지난 해 시제 때 답사한 곳이기는 하지만 상서공(휘 孝印) 할아버지 필적이 남아 있는 월남사 터를 다시 들르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일정이 빠듯해 올라오는 길에 일정을 잡아보기로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지난 해 시제 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을 통과하면서 발용 종친께서 강진의 재이 종친께 전화를 드리니 비 때문에 어려울 것 같으니 내일 시제 후에 찾아뵙는 것이 좋겠다고 하십니다.
아닌 게 아니라 비구름이 웅장한 월출산을 온통 휘감았습니다. 장관이었습니다. 다행히 성긴 빗방울이 간간히 차창에 떨어집니다. 월출산은 한 폭의 동양화였습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 비경을 담는 사진작가가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일정을 바꿔 군동면 내동마을의 군사공파 재실로 향했습니다. 시제에 참여하신 어르신들께 인사를 올리고 시제 전날 풍경을 종친 여러분께 전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내동마을에서 작천면 토마리 선영으로 넘어가는 고개 못미처에 동원그룹 재철 회장의 아버님(휘 敬默) 묘소가 있습니다. 비석이나 상석도 없이 산기슭에 단아하게 모셔진 묘소에는 잔디가 정성스레 덮여 있었습니다. 검소하면서도 기품 있는 산소를 보면서 여러 생각들이 스쳐갑니다.
내동마을 재실에 도착하니 저녁 16:45분이었습니다. 재실은 분주하면서도 왁자지껄 정겨운 소리가 연신 이어집니다.
재실로 들어가 군사공파 수인 회장과 재석 고문을 비롯해 여러 어르신들께 인사를 올리고, 재실 안팎을 둘러봅니다. 작년에 뵈었던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태영 종친의 아버님께서도 와 계셨습니다. 인사를 드리니 무척 반기십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이신 어르신들께서는 연로하신 데에도 불구하고 지극정성으로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곳까지 오셨는데도, 젊은 종친들이 시제에 참석해 주어서 고마운 일이라며 손을 ‘꼬옥’ 잡으십니다.
◈ 내동마을 재실 → 마량포구
재실에서 다과를 조금 들고 해가 설핏해질 즈음 숙소로 정해 놓은 마량포구로 향했습니다. 18:00분경 재실을 나와 발용 종친께서 재이 종친께 연락을 드립니다. 작년에도 큰 신세를 졌건만 올해 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량포구로 가는 길은 유홍준 교수의 말마따나 ‘남도 답사 1번지’입니다. 기다란 산기슭을 따라 바다가 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지도를 놓고 보면 마치 ‘ㅅ’자 모양입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구불구불 따라가며 펼쳐지는 풍광은 사람 마음을 홀딱 빼앗습니다. 군데군데 ‘경치 좋은 곳’,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이제 그 아름다운 길을 따라 우리 일행은 저녁 어스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땅거미가 하늘에서부터 서서히 내려와 바다와 뭍을 검게 물들여가는 장관을 재주 부족한 제가 종친 여러분께 제대로 전해 드리지 못하는 것이 내내 아쉬울 뿐입니다.
마량포구로 들어서는 고개 바로 앞에 청자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근방이 재이 종친께서 사시는 마을입니다. 우리 일행이 막 고개를 넘어 대구면에 들어서자 재이 종친께서 곧바로 우리 차량 뒤로 따라붙습니다. 송구스럽게도 미리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재이 종친의 안내로 마량포구로 향했습니다. 예서 마량포구까지는 불과 3분 거리입니다. 까치발로 서서 고개를 길게 빼면 마량포구가 보일 것만 같은 곳입니다.
◈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바지락조개 국
재이 종친의 안내로 마량포구를 한 바퀴 돕니다. 밤바다가 제법 거셉니다. 음력 열닷새건만 날이 잔뜩 흐려 칠흑같은 어둠입니다.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로 향합니다. 바닷바람이 넥타이를 연줄처럼 말아 올립니다. 바로 앞의 섬을 연결하는 연륙교 공사가 얼마 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시원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시고 우리 일행은 식당으로 향합니다.
작년 환대가 너무 송구스러워 저녁 식대를 우리 일행이 내겠다고 하자 재이 종친께서는 극구 만류하십니다. “멀리서 오신 종친들께 약소하나마 이렇게라도 대접할 수 있는 것이 영광”이시라는 말씀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귀한 청자(靑瓷) 머그잔까지 선물로 내놓으십니다. 우리 일행은 작은 정표조차 마련하지 못했으니 더더욱 송구한 일이었습니다.
저녁을 맛있게 들고, 반주를 하는 사이에 윤만 종친께서 마량포구에 도착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녁 20:10분이 강진에서 마량으로 들어오는 막차시간인데, 날이 궂은 덕분에 막차가 늦게 들어와 간신히 그 차편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하십니다. 오시는 도중 고생이 크셨습니다.
부랴부랴 마중을 나갑니다. 허어, 낮선 길이라 어디쯤 계신지도 모르겠고, 포구 초입에서 소리쳐 불러 봅니다. 막차 시간에 맞추어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떠나는지 뱃고동에 윤만 종친을 부르는 소리가 묻혀 들어갑니다.
그 사이에 발용 종친께서는 PC방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간단한 현지 보고와 사진을 급히 전해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윤만 종친을 식당으로 안내하고 뒤따라 PC방으로 향합니다.
발용 종친께서는 미리 사진 올릴 장비를 준비해 오셨건만, 이곳 사정이 허락지 않습니다. 바닷가 마을의 구형 PC라 디지털 카메라를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컴퓨터의 달인이신 발용 종친께서 머리를 짜내 여러 방법으로 시도해 보았건만 사진을 올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밋밋한 현지 인사로 대신하고 식당으로 터덜터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식당에는 뜻밖의 귀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이 종친께서 그 늦은 시각에 댁에 계신 부인께 특별히 말씀을 하신 모양입니다.
공직 생활 틈틈이 자작으로 손수 지으신다는 바지락조개로 국을 끓여 오신 겁니다. 그 정성에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싱싱한 바지락조개로 끓인 국이기에 맛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 각별한 정성이 그득히 들어 있기에 귀한 국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최남단에 와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바지락조개 국을 들면서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 감동을 종친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강진시제 참예보고 제1보를 마칩니다.
졸필인 탓에 숭조목족(崇祖睦族)에 최선을 다하시는 우리 선김 종친들의 높고 귀한 뜻을 제대로 전해 드리지 못해 송구할 따릅니다.
▲5월 4일 : 마량포구 → 군동 내동마을 재실 → 부사공(휘 季老) 묘소 → 대호군공(휘 儒) 묘소 → 선운사 → 서울
▣ 5월 4일(화요일)
◈ 마량포구 → 토마리 선영 → 내동마을 재실
새벽녘에야 눈을 붙였는데 다들 이른 시간에 눈을 떴습니다. 07:15분 바닷바람을 맞으며 내동마을로 향합니다.
어제 하루 종일 일기가 나빠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자고 일어나니 화창한 봄날입니다. 모텔방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에는 티끌 하나 없고, 낮은 산꼭대기에 안긴 집들이 정겹습니다.
내동마을로 가는 길에 발용 종친의 안내로 청자자료박물관 인근의 푸조나무를 보러 갔습니다. ‘푸조나무’…… 처음 들어 보는 나무였습니다.
그렇게 잘생기고 장대한 나무도 드물 겁니다. 천연기념물 35호인 푸조나무의 위풍당당함이란! 강진에 다시 가면 찬찬히 살펴보고 싶은 나무입니다. 푸조나무는 팽나무 4촌쯤 되는 나무로 생김새가 비슷하고, 키는 20m쯤까지 자라는데 소금기에 강해 바닷가 방풍림으로 제격이랍니다.
▲ 천연기념물 35호 푸조나무
▲ 재이 종친이 사는 대구면 마을 전경. 고려청자 도요지입니다.
07:20분경 강진에서 마량포구로 들어가는 꿈결같은 바닷가 도로가 시작되는 ‘남강식당’에 도착했습니다. 별다를 거 하나 없는 음식점이지만, 꼭 집에서 먹는 아침상 같아서 벌써 그 맛이 그리워집니다.
허기를 달래고 07:51분 음식점을 나와 내동마을에 도착하니 08:35분입니다. 내동마을은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앞에 너른 들이 길게 펼쳐진 곳입니다.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길에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庄碑)>가 서 있습니다.
1984년에 동원그룹 재철 회장께서 세우셨는데, 건립위원은 경묵, 영호, 사묵 종친 등 3분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에는 내동마을에 안동김씨가 들어와 살게 된 내력과 충렬공을 비롯한 선대 할아버지에 대한 계보가 적혀 있습니다.
▲ 내동 마을입구의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庄碑)
비문에 따르면, 내동마을의 입향조는 충순위공(忠順衛公 휘 礩)이시랍니다. 충순위공께서는 중종 14년인 1519년에 태어나셨는데, 20세 되시던 봄에 성묘차 강진에 오셔서 머무르셨답니다. 이때 강진의 사족(士族) 해주인(海州人) 진사 오팽수(吳彭壽) 공께서 충순위공을 보시고는 사위로 삼으시고, 가전지(家田地)까지 나누어 주셨답니다.
그 후 충순위공께서는 충순위 벼슬을 지내신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선롱(先壠 : 선영) 남쪽인 군동면 내동(內洞)으로 이주하여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답니다. 충순위공의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군사공(휘 七陽) → 3子 인수부윤공(휘 墩) → 외아들 부사공(휘 季老) → 외아들 좌랑공(휘 石精) → 3子 충순위공(휘 廷健) → 외아들 충순위공(휘 礩) → 외아들 직장공(휘 興業)
잠시 재실을 들여다보고 토마리 남산(南山) 선영으로 향합니다. 남산 선영은 지난해 시제 보고에서 말씀드린 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작년만 해도 선영 입구에 별다른 이정표나 랜드마크가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쉬웠는데 그 사이에 <토동마을>이라는 큼지막한 돌표석과 정자 형태로 지은 버스정류소가 생겼습니다. <토동마을> 돌표석에서 좌회전하면 <능성구씨세장산>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돌표석이 서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죽 올라가다 우회전하면 남산 선영에 이르게 됩니다.
선영 오른쪽에 재실인 <영모당(永慕堂)>과 살림집이 있습니다만,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많이 퇴락했습니다. 영모당 왼쪽의 샘물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솟는데 빈집만 남아 마음이 아픕니다. 재실 안에는 영모당 건축과 전기공사에 참여했던 종친들 명단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재실과 살림집을 둘러보고 남산 선영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선영의 할아버지 설단과 묘소는 참 아늑해 보입니다. 낮은 구릉을 따라 판서공(휘 愃) 할아버지 설단을 시작으로 대제학공(휘 承用) 할아버지 묘소, 평리공(휘 厚) 할아버지 묘소, 군사공(휘 七陽) 할아버지 묘소가 잘 모셔져 있습니다.
▲ 위로부터 판서공(휘 愃) 설단, 대제학공(휘 承用) 묘소, 평리공(휘 厚) 묘소, 군사공(휘 七陽) 묘소
직장공(휘 興業) 할아버지 묘소는 군사공 할아버지 묘소 아래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 10여m 올라가시면 됩니다.(남산 선영에 대한 내용은 지난해 시제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직장공(휘 興業) 묘소
남산 선영에 도착하니 불현듯 지난해 시제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유건과 도포를 입으신 어르신들, 정갈하게 준비한 제수, 그리고 시제 후 나무그늘에 둘러앉아 나누던 음복 등등…….
▲ 올해는 밤 늦게 까지 내린 비로 인하여 묘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시향은 어제 쏟아진 비 때문에 부득이 내동마을에 있는 재실에서 모시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내동마을에 거주하시는 군사공파 종친들이 주관한 올해 시제에는 판서공(휘 愃) 할아버지 후손 80여 명이 전국 각지에서 모이셨습니다. 그 때문에 내동마을 재실에는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어제처럼 날씨가 궂었다면 참 불편했을 텐데 할아버지 음덕으로 화창한 날을 맞이했나 봅니다.
올해 헌관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판서공 초헌관 洙寅(군사공파 회장) 아헌관 榮煥(문온공파) 종헌관 景黙(군사공파)
▲대제학공 초헌관 在殷(부사공파) 아헌관 在哲(군사공파) 종헌관 道中(도평의공파)
▲평리공 초헌관 相國(개성윤공파) 아헌관 昌植(개성윤공파) 종헌관 榮應(밀직사공파)
▲군사공 초헌관 昌會(군사공파) 아헌관 仁會(군사공파) 종헌관 元會(군사공파)
시제를 모신 뒤에 참석하신 종친들이 모두 재실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넓은 마당이 꽉 찼습니다. 지난해 기념사진이 다시 떠오릅니다. 제수는 제가 잘 모르는 데에다 ‘가가례’라 했듯이 강진 특유의 문화가 스며 있는 듯했습니다. 어물의 경우에는 병어, 농어, 전어 순서로 포개 얹었으며, 과일은 깍지 않고 그대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팥을 넣어 만든 떡을 사용하는데 ‘복두떡’이라 부른답니다. 맛이 참 좋습니다. 생김새는 다른 지방의 밀전병이나 부꾸미 비슷하기도 한데, 색깔은 흰색입니다.
아참! 중요한 걸 깜빡할 뻔했습니다. 강진 시제에서는 방명록 외에 <남산시도기(南山時到記)>를 작성해 오고 있습니다. 줄여서 <도기>라고 부른답니다. 아마도 ‘남산 선영 시향에 참석한 종친들의 명단 기록’이라는 뜻 같은데, 맨 첫장이 1959년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도기를 작성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도기는 성명, 나이, 주소 등을 적게 돼 있는데, 이 도기에 적힌 명단을 보고 시제 전날 저녁에 파(派), 연령, 참석 횟수 등을 감안해서 헌관을 정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 1959년부터 기록된 도기로 강진시제의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리고 내동마을 재실은 군사공파 종친께서 희사하신 건물로서 무후(無后)하신 까닭에 군사공파 재실로 내놓으셨는데 오래 전에 작고하셨답니다. 삼가 그 어른의 명복을 빕니다.
◈ 내동마을 재실 → 부사공(휘 季老) 묘소 음복과 간단한 요기를 한 다음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11:30분경 부사공 묘소로 출발했습니다. 부사공 묘소는 남산 선영에서 약 20분 거리인 황곡마을에 있습니다. 송구스럽게도 재이 종친의 안내로 황곡마을에 도착하니 11:55분입니다.
부사공 묘소 관리인 최도상 씨를 만난 다음 그 집 뒤울을 따라 부사공 묘소로 향합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울창한 대나무 숲입니다. 마치 밀림을 헤치고 나가는 기분입니다.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오솔길만 남기고 양쪽으로 까만 오죽(烏竹)이 빽빽합니다.
▲ 부사공 묘소 가는 길
부사공 묘소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깜짝 놀랐습니다. 묘소 크기가 거의 능(陵)만합니다. 일반 묘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봉분이었습니다. 재실에서 준비해 온 제주를 올리고 담양부사를 지내신 할아버지께 큰절을 합니다. 본래 부사공 유택은 민가가 있던 자리라고 재이 종친께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군사공파 집안에 전해 오는 구전으로는 이곳이 명당 터라 집주인에게 좋은 집과 후하게 값을 치르고 사들였다고 합니다.
▲ 부사공(휘 季老) 묘소
봉분 둘레는 40여 보에 달하는데 오래 된 문인석과 새로 세운 망주석이 각각 1쌍씩 배치돼 있습니다. 비석과 상석 역시 최근에 새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사공 묘소 제절에 해당하는 곳이 봉곳하게 솟아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원래 지형이 그렇게 생긴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봉분인 듯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듯합니다. 영환 종친께서는 부사공과 동시대 묘소들에서 상하분 형태의 묘소가 있다고 들려주십니다. 이 문제는 현지에서는 풀 길이 없어 훗날 부사공 묘소를 참배하시는 종친들께서는 잊지 말고 참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부사공 할아버지 묘소옆의 야생화
부사공 묘소 참배를 마친 다음 마을회관 앞으로 온 우리 일행은 재이 종친과 다시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눕니다. 올해 여름캠프 행사에 가능하면 참가하실 예정이라고 하시니 이 큰 신세를 그때는 꼭 조금이라도 보답해 드려야겠습니다. 재이 종친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온 길을 되짚어 나갑니다. 큰 고갯길을 구불구불 내려온 다음 영암으로 갈라지는 4거리에서 두 차량이 각기 다른 방향을 잡습니다. 재이 종친께서 차창 너머로 연신 손을 흔드십니다.
★부사공 묘소 찾아가는 길
내동마을 재실 → 남산 선영 → 상남 → 우회전 2차선 → 발천마을 → 병영농협주유소(주유소 맞은편에 병영성이 있음.) → 도로표지판(작진 작천, 좌회전 장흥, 우회전 병영)을 보고 <작천>으로 직진 → 산 위의 레이더 기지를 보면서 계속 직진 → 옴천사 → 옴천요양원 → 도로표지판 <광주>를 보면서 계속 직진 → 도로표지판 <황막>을 보고 우회전(갓길이 없는 2차선 도로) → 고개를 넘자마자 <황곡마을> 돌표석을 보고 좌회전(돌표석은 너무 작아 지나치기 쉬움. 바로 옆에 간이버스정류소 있음.) → 20여m 좁은 마을길로 들어서면 <황곡회관(마을회관)> 이곳 마당에 주차한 다음 황곡회관 오른쪽 고샅길을 따라 맨 위에 있는 집(부사공 묘소 관리인 최도상 씨)에 문의하시기 바람.
※부사공 묘소는 안내하는 사람 없이는 찾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관리인 최도상 씨를 찾아가시면 그 집 뒤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실 겁니다. 연락처는 군사공파 내동마을 종택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부사공 묘소에서 나오는 길
※위의 길안내는 강진 내동마을에서 부사공 묘소로 오는 길입니다.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서 오실 때에는 강진으로 들어가지 않고 광주에서 곧바로 부사공 묘소를 찾아가시게 되므로 참조하실 수 있도록 부사공 묘소에서 큰길로 나오는 이정표를 기록합니다.
부사공 묘소 아래 황곡회관(12:37분) → 20m쯤 가서 도로 → 우회전(버스정류소) → 작은고개를 넘어서 도로표지판(좌회전 장흥․병영, 우회전 영암)을 보고 영암으로 우회전(12:40) → 영복마을(버스정류소) → 저수지(12:43) → 큰 고갯길 구불구불 내려옴 → 4거리, 도로표지판을 보고 영암向 → 새로 난 길 → 청풍원 휴게소
◈ 부사공 묘소 → 대호군공(휘 儒) 묘역 시간이 빠듯해 아쉽지만 월남사 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역을 참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제 알아둔 연락처로 계속 전화를 합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관리인 박민찬 씨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역은 나주시 금천면 죽천2구 상촌마을입니다.(이곳 역시 지리를 잘 몰라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는 점을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주 중심지에서 광주 쪽으로 향하다가 금천면으로 방향을 잡은 다음 나주배연구소 안내판을 보고 우회전하니 바로 금천농협입니다.
인근 슈퍼에서 제주와 간단한 제수를 준비한 다음 금천농협으로 들어가 박민찬 씨 댁으로 찾아가는 약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별다른 랜드마크가 없어 조금 고생했습니다. 다행히 달리는 차에서 발용 종친께서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葬碑)>라 적힌 비석을 보고 이 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나주시 금천면의 대호군공파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葬碑)
산길을 몇 군데 확인한 다음 세장비와 마주 보고 있는 산 쪽으로 난 작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 길로 50m쯤 들어가 산모퉁이를 돌자마자 잘 단장된 묘역이었습니다. 묘역 앞에 차량 두어 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묘역으로 올라가 확인하니 대호군공 할아버지 묘역이었습니다. 잠시 후 관리인 박민찬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나주시 금천면 죽천리 옥현(玉峴) 선영입니다. 맨 위 대호군공(휘 儒) 할아버지를 비롯해 네 분 할아버지 묘소가 잘 단장돼 있습니다.
이곳에 영면해 계신 할아버지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호군공(휘 儒) → 사재시판사공(휘 彦龍) → 주부공(휘 汝) → 長子 참찬공(휘 世重)
묘역이 잘 단장돼 있는 데에다 구릉지를 따라 널찍널찍하게 묘소가 자리잡고 있어 활달한 기운이 넘칩니다. 봉분마다 비석과 문인석 망주석이 배치돼 있는데 특이하게도 혼유석 뒤에 반원형의 석물이 있어서 눈길을 끕니다.
▲대호군공(휘 儒) 묘소
▲ 사재시판사공(휘 彦龍) 묘소
▲ 주부공(휘 汝) 묘소
▲참찬공(휘 世重) 묘소
▲ 대호군공파 묘역 전경
준비해 온 제주와 제물을 올리고 큰절을 올립니다. 대호군공파 종친들께서는 주로 전남 함평과 보성 등지에 살고 계시고, 종인 수도 그리 많지 않아 늘 마음이 쓰이기도 합니다. 발용 종친께서는 항용 종친과 함께 제1회 여름캠프 직후에 전남 보성 등지로 탐방을 계속하셨는데 당시 보성에 살고 계신 대호군공파 태식 종친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멀리서 오신 종친을 대접하신다고 대호군공파 태식 종친께서는 진한 꿀물에 얼음을 띄워 내오셨는데 그 맛과 정성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태식 종친께서 손수 치신 양봉에서 얻은 꿀이니 여행길에 참으로 귀한 정성이었습니다.
대호군공 할아버지 비석에서부터 참찬공 할아버지 비석까지 차근차근 읽은 뒤에 조금 떨어져 계신 나주목사공(휘 守證) 묘소를 찾아갑니다.
목사공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찬공(휘 世重) → 3子 훈도공(휘 熏) → 長子 나주목사공(휘 守證)
나주목사공 묘소는 대호군공 묘역에서 인삼밭을 끼고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인삼밭 끝에 난 오솔길로 서너 발짝 올라서면 됩니다.
대호군공 묘역에 계신 할아버지 묘소는 모두 배위와 함께 모신 합봉인데, 나주목사공 묘소는 쌍분입니다. 석물 배치는 대호군공 묘역의 석물 배치와 같습니다. 하지만 오래 된 망주석이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크기입니다.
▲ 나주목사공(휘 守證) 묘소
▲ 고태가 흐르는 망주석
▲ 찔레순을 먹어보며 동심에 젖어보는 참예단
큰절을 올리고 비문을 살펴본 다음 이제 서울로 향합니다.
★대호군공 묘역 찾아가는 길 나주 중심지 → 금천면 → 광주로 나가는 큰길을 따라 가다가 나주배연구소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 → 바로 금천농협 보임 → 도로를 따라 약4km 가서 3거리에서 우회전 → <신방>이라 적힌 버스정류소에서 좌회전(중앙분리선을 넘게 되므로 주의 요망) → 직진 → 은혜교회 앞에서 우회전 → 조금 가서 왼쪽 산모퉁이에 난 좁은 비포장도로로 진입 → 산모퉁이 돌자마자 대호군공 묘역
※은혜교회 앞에서 우회전한 다음 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상촌마을 돌표석이 있습니다. 이 돌표석이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안동김씨세장비(安東金氏世葬碑)>가 나옵니다. 대호군공 묘역은 세장비 건너편 산입니다.
◈ 대호군공 묘역 → 선운사 14:37분 대호군공 묘역을 출발해 15:25분 광주시 농성역에서 정중 종친과 아쉬운 작별을 나눕니다. 이제 정중 종친께서 대구로 가셔야 하는 시각입니다. 나머지 일행은 15:25분 귀로에 선운사를 잠깐 들렀습니다. 추사 선생의 필적을 감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운사 입구의 부도(浮屠) 밭에는 한국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고승들의 부도가 많은데, 그 가운데 조선 철종 9년(1858년)에 세운 백파 스님의 비석이 있습니다. 이 비석의 글씨가 바로 추사 선생의 친필입니다.
전면에는 “華嚴宗主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라 쓰여 있습니다. 뒷면의 비문에는 “가난해서 송곳을 꽂을 땅은 없으나 기운은 수미산을 삼킬 만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경내로 들어가 만세루, 대웅전, 5층석탑, 당간지주, 범종 등을 둘러보고 대웅전 뒤의 울창한 동백 숲을 감상합니다.
▲ 천연기념물 제184호 동백나무숲.
▲ 참예단을 반기듯 수줍게 피어있는 동백꽃
시간이 부족해 도솔암을 비롯한 선운사 풍광을 즐기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습니다. 선운사 앞에는 선운사 동백꽃을 노래한 미당 서정주의 시비와 선운산가비가 서 있습니다.
선운산가비(禪雲山歌碑)는 백제 시대에 싸움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이 선운산에 올라가 지어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선운산가의 노랫말은 전해지지 않고 그 설화 내용만 고려사 ‘악지’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노래가 정읍사인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숙제”라고 하신 영환 종친의 말씀대로 사전을 찾아보니 전혀 다른 노래였습니다. 정읍사는 백제 가요 중에서 유일하게 현재까지 전해지는 노래이자 한글로 기록된 가장 오래 된 백제 가요라고 합니다. 이 노래는 행상을 나간 남편의 밤길을 염려하는 여인의 마음을 담고 있는데 악학궤범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 선운사 → 서울 선운사 풍광과 추사 선생의 필적을 감상한 다음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합니다. 노동절과 주말, 어린이날로 이어져 예상했던 대로 도로가 막힙니다. 우리 일행의 귀가가 염려스러웠던지 항용 종친께서는 떠나던 날부터 여러 차례 전화를 주셨습니다. 귀로에 서해안고속도로가 막히면 평택 인근에서 경부고속도로로 갈아타는 게 조금 낫다는 귀한 정보를 따라 진로를 바꿉니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경부고속도로 역시 교통체증이 심합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빠져 나온 직후 정중 종친께서 대구에 도착하셨다는 안부 전화를 주십니다. 19:50분 선운사를 출발, 행담도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서울 강남에 도착하니 어느새 23:00 정각입니다.
참예 기간 동안 잘 이끌어 주신 영환 종친과 윤만 종친, 그리고 이틀 내내 혼자서 운전대를 잡으신 발용 종친과 헤어질 시간입니다. 아울러 참예단의 무사 귀가를 염려해 주신 전국의 종친들께 감사 인사를 올리며, 이번 시제에 참석하신 종친들께서도 무사히 귀가하시기를 빕니다. 매년 따뜻하게 맞이해 주신 재이 종친 가족과 시제 준비에 노고가 크신 강진 군사공파 종친들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이상 2004년도 강진시제 참예보고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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