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공파(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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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png 한가락회 강진 탐방기

       11) 한가락회의 전남강진 탐방기

 영모재(永慕齋)에서

온아흔일곱 번째 한가락 모임

때: 4339(2006) 8월 6일. 일요일. 맑음

곳: 영모재(永慕齋)-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

 

집중 폭우로 전국을 수해로 휩쓸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연일 계속된 폭염으로 낮에는 땀으로 흠뻑 적시고, 밤에는 더위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 매달 한 번의 역사탐방이지만 긴장한 탓인지 잠을 설치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이것저것 하다가 사당행 전철을 탔다. 오전 7시 약속된 곳에 도착하니 항상 보는 회원들이 반겼다. 이번 역사탐방지는 남도 천릿길 전라남도 강진으로 고려 말 충신 강은공(康隱公) 김칠양(金七陽)선생의 유적지를 찾아 간다. 강진은 백제 때 도무군(道武郡)이며, 신라 때 양무(陽武), 고려 때 도강현(道康縣), 조선 명종 때 도강현과 탐진현을 합하여 오늘에 일으게 되었다.

 

장흥.영암.해남.완도를 이웃하고 유적지로는 병영성, 도요지, 다산 정약용이 귀양와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초당(茶山草堂)과 “모란이 피기 까지는”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 김영랑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오전 7시 중관선생님과 회원 23명은 사당역을 출발 하였다. 강진으로 가는 중에 내가 ‘화동인물총기‘를 강독 하였고, 갑고선생님의 선창으로 평소 배웠던 시조창, 한시창 등 노래 연습을 하였다. 전남 광주 나들목을 나와 한참을 달리니 영암 월출산의 제법 우뚝하고 기세 있는 모습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장흥읍에서 유명하다는 명동가든에서 문중의 점심 대접을 받았다. 바다와 인접한 지역이라 홍어회 등 생선과 시골 맛이 살아있는 돼지볶음 등 남도의 푸짐한 반찬으로 밥 두 공기를 후딱 먹어 치웠다. 오후 2시 작천면 토동마을 입구에 도착하여 군사공파 총무이신 김준회,김재이,김이남씨 등 문중 분들의 안내로 마을 뒷산에 있는 강은공의 묘소로 향했다.

 

10여 분 거리에 있으나 찌는 무더위로 회원 전체가 땀으로 몸을 적셨다. 묘소에 도착하니 위에서부터 차례로 공의 증조부 단, 할아버지,아버지,공의 묘가 원분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묘소에 참배를 마치고 뒤쪽에 위치한 재실로 이동 하였다. 재실은 관리가 안 되어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아랫채는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문중 분들은 외부 손님들을 맞이하기가 부끄럽다고 하나 이 집안만의 일이 겠는가? 후손들은 다 도시로 떠나고 이 외진 곳까지 와서 관리 할 사람이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인 것을... 재실에 돗자리 몇 개를 깔고 강은공에 대한 중관선생님의 자세하면서도 열의 있는 설명을 들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이름은 김칠양(金七陽)이며 호는 강은(康隱)으로 안동김씨 이다. 고조는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이고, 증조는 김선(金愃)으로 전법판서를 지내셨고, 조부는 김승용(金承用)으로 보문각대제학이었으며, 아버지는 김후(金厚)로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공은 어려서부터 청렴하고 곧으며 모습이 단정하였다. 재주가 비범하고 지모가 뚜어났으며 가정(稼亭) 이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부모의 말씀을 잘 따라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부모가 기뻐하며 말씀하시길 “너는 우리 가문을 잘 보존할 것이다.”하였고 가정선생도 칭찬하여 말하길 “너는 나라의 큰 기둥이 될것이다”하였다. 그러나 과거 시험에 힘쓰지 않고 평소 정몽주.이색.김구용 등과 더불어 성리학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느즈막이 한 현을 맡아 온 힘을 다하여 열심히 다스렸다.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불사이군의 정신을 지키며 새 조정에서 예로써 몇 번 불렀으나 끝내 관직에 올르지 않았다. 세 자식을 앉혀놓고 가르쳐 말하길 “우리 가문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으로 나라가 망한 때를 당하여 비록 나라와 함께 죽을 수는 없으나 나라의 막중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망령되게 새 조정의 총애를 구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선왕과 선조를 뵐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 선산에 묻되 비석을 세우지 말고 후세 사람들이 내 무덤을 알수 없도록 하라.” 하고 집에서 돌아가시니 한창 때인 40세였다. 증관선생님이 찬한 한시 끝부분에

 

惜乎四十天鄕去  아깝도다, 40세 돌아가니

世事當時若是嗟  당시 세상일이 이 같이 아팠던가

 

표현한 것처럼 고려가 멸망할 당시 중요한 위치가 아니고 한 고을을 맡고 있었으나 공 스스로 책임처럼 자책하고 아파했기에 일찍 돌아가신 것이리라. 부인은 봉상예의총랑 김용진(金用珍)의 따님으로 정숙한 덕이 있어 예로써 가정을 바르게 다스리고, 의로써 집안을 돈독하게 했으며 세 아들을 두셨다.

 

문중 분들의 보충 설명을 듣고 난 다음 공을 생각하면서 시조와 한시를 지을 시간도 없이 곧바로 서울로 향해 출발하였다. 광주를 지나자 한 차례 소낙비가 더위를 식혀주고 차안에서는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고 기장떡으로 배를 채우며 담소하는 가운데 서울에 도착하니 예상보다 이른 저녁 9시 정도였다. 회원들의 좋은 시조를 기대하며 역사탐방을 마친다.    -고룡 맹치덕-

 

마파람 일렁이면

갯물결 멍이 들고

 

가여운 땅끝 동백

서러워 붉은 마음

 

부르고 새기지 마라

가슴 속에 품어라

-벽고 장대열-

 

우뚝한 어진이가

숨어든 땅끝 마을

 

새 임금 불러보나

더욱 더 깊은 골로

 

한 마음 옛님 받들어

이은 이들 지킨다

-가산 임봉훈-

 

한여름 찌는 더위

마녘골 땅끝 마을

 

솔숲에 숨어들어

한 마음 지키던 임

 

돌새겨 남기지 말라

벼리지킨 내 할배

-서원 김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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