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공파(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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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png 정읍 종중(입향조 휘 堪) 소개

    1) <군사공파 세거지 정읍 종중(입향조 휘 堪 ) 소개>(2002. 4. 16. 주회(안) 조사 제공)

 

군사공파 정읍 종중 (입향조 휘堪감)

요즈음 지나간 안동김씨 대종회보를 읽어보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정읍의 군사공파인 입향조 부휴재 세마공 휘堪(감) 후손 관련내용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55호 (1997년 1월)>

▣ 松岩 안동김공 榮得 송덕비 건수

 

 지난 1996년 11월 17일 11시 전북 정읍시 응등면 수천리 고 榮得현종의 8대조이신 浮休齋(부유재) 휘堪(감)의 재실 정원에 공의 송덕비를 건수하고 제막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날 정읍시 칠모면 면장을 비롯 유림인사와 지역유지 6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제막식을 가졌다.

 고 榮得현종은 군사공 17대손이며 정읍시 칠보면 태생으로 평소 숭조이념이 투철하여 공의 8대조인 부휴재공 휘堪(감)의 祠宇가 정읍군 칠보면 시산리 松山祠에 배향되어 있는데 여기에 同志인 월봉 김공, 오무재 김공, 아암 송공, 난곡 송공, 천묵재 이공, 관산 이공과 더불어 결사자목이광하니 세칭 7狂이라 하였다.

 공은 8대조인 부휴재 세마공 휘堪(감)의 후손계 종친회장직에 있으면서 송산사 유림 색장으로 다년간 공헌한 바가 컸고, 종사에는 재정난으로 난관에 봉착하자 사재답 2천평을 종회 운영기금으로 희사하여 세마공 묘소 수호관리 및 묘소 진입로를 개설하여 후손들이 선영 참배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재실보수 및 제반 종사를 솔선수범하여 온 훌륭한 분이기에 후세의 귀감이 되어 이에 송덕비를 건수하고 후손들에게 숭조정신을 전지전승코자 함이라

(군사공파 회장 在錫)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3호 (1999년 1월)>

▣ 종중 인물탐구

여기 소개하는 松巖 榮得현종은 충렬공 21대손, 군사공 17대손으로 낙향조 찰방공 휘堪(감)의 9대손이다.

송암은 전북 정읍시 칠보면 촌락에서 고 휘駿源과 비 밀양박씨의 5남매중 막내로 출생하여  원래 재능이 탁월하였으나 가정이 빈곤하여 학문을 연마치 못함이 한이 되던중 주경야독하고 가솔을 올바르게 하며 교육에 연연하여 지역사회에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으며 수신제가로 안동김씨의 명문가로 발돋움하였다.

 더욱이 충효사상과 숭조정신이 투철하며 예의범절과 애족인보 정신이 두터워 자수성가하여 8대조 휘得亮(득량)이하 선대제위 분묘정화 사업은 물론 타의 문화유적지의 중수사업에도 헌성으로 武我書院 유림 色掌(색장)에 8년간을 재임하면서 중책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찰방공 휘堪(감)조가 배향된 松山祠가 고종2년에 훼철되어 1954년 이건할 때 건축비를 헌성하여 복원한 다음 매년 춘추향사에 안동김씨 대표로 빠짐없이 참사하니 무아서원과 송산사의 주변 후손과 유림에서 노고를 치하하고 이 공을 후세에 전승코자 원사에 공적을 懸板하여 게시하였다.

 그 외에도 찰방공 재사 신축에도 물심양면으로 후원함은 물론 私畓 2,000평을 찰방공 종회에 희사하여 종중 경조사에 경조토록 하였다. 이처럼 숭조정신이 귀감이 되어 이번 종보에 소개를 하는 바이다.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6호 (1999년 10월)>

▣ 군사공파 정읍종중 선영산소 정화사업 완공

 군사공파 정읍종중은 낙향조 찰방공 휘堪(감)의 후손들로 숭조이념이 투철하고 종친화목이 돈독하여 문중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지난 5월 5일 찰방공, 그의 장남 휘聲亮, 손 증예의 휘坪의 춘계향제를 오십여 후손들이 참지한 가운데 향사를 엄숙히 봉향한후 문중회의를 개최하여 그간의 숙원사였던 휘聲亮, 휘坪 두분의 선조묘소 정화사업을 하고자 안건을 제안하여 가부를 물으니 타의없이 만장일치 찬성으로 가결하여 묘 둘레석과 묘정 난간 석축공사를 700여만원을 들여 문중 고문이신 榮得현종과 회장 彰會현종, 총무 在坤현종, 재무 元會현종, 이사 王默 종이 주관이 되어 지난 6월 25일 공사를 완성하고 안위제를 올리었다.

 이 사업을 마무리하고 임원들은 어려운 때인데도 57명의 후손들이 정성어린 성금을 헌납해 준데 대하여 크게 감사한다고 말하였다.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7호 (2000년 1월)>

▣ 松湖 金邦勳

송호 김방훈은 군사공 15대손이며 찰방공 휘堪(감)의 7대손으로  옛날 광해군 5년 (서기 1613) 인목대비 폐비사건에 호남 7君子 (월봉, 오무, 아암, 천묵, 부휴, 난곡, 관산)가 시국을 개탄하며 광인으로 가장하고 동지들을 모아 유유자적하며 7狂이라 자칭하고 그 가운데 다섯 어진 사람들이 5賢 를 설립하여 타 5현과 합하여 10현이라 칭하고 망국지한을 달래니 10賢이라 하고 사적을 7광도 드림으로 그려 유적이 남아 있어 매운 절개와 풍속을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이 선세의 아름다움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유림 42명이 선현을 추모하는 뜻으로 松亭아래 따로 정자를 짓고 後松亭이라 하고 매년 5월 단오절에 7광도 10현도를 영당에 봉안하고 추모하며 가을에는 소학강을 베풀어 詩會를 즐겼던 미풍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42명중 한 분인 김방훈이 자로 군사공 15대손이다. 이렇듯 의로운 우리 선현께서는 詩會에서 後松亭을 韻한 시가 있어 이에 소개하는 바이다.

 

壯觀無如亭與樓 (장관무여정여루)--- 장대한 광경이 정자와 더불어 루대만 같음이 없고

詩登新起小欄頭 (시등신기소난두)--- 시험을 올려 작은 난간머리에서 새로움을 일으키네

此地浪吟金上舍 (차지낭음금상사)--- 이땅의 금상의 집에서 낭만으로 시를 읊조리니

先天往蹟水東流 (선천왕적수동류)--- 선천의 옛 자취는 물 동쪽으로 흐르고

 

甲乙爭傳詩賦刻 (갑을쟁전시부각)--- 갑과 을을 다투어 시와 글을 새기고

丹靑眞寫畵圖留 (단청진사화도류)--- 붉고 푸른 빛을 담아 그림 가운데 머물게 하고

古松許老後松翠 (고송허노후송취)--- 옛 소나무를 이어 새 소나무가 푸르름을 자아내니

名冠湖南五十州 (명관호남오십주)--- 호남에 이름난 명관이 50고을에 가득하도다

 

이는 또한 숭조 효친의 사상이 두터워 전북 정읍에서 경기 파주까지 왕복 1,400여리 길을 멀다 않고 직손 현조의 시제에 한번도 빠짐없이 보행으로 참예하였으며 자 駿源, 손 榮采, 榮燮, 榮述, 榮先, 榮德 다섯 손자에게 숭조이념을 굳게 심어주어 현 정읍지방에서 우리 안동김문의 위상을 빛내고 있는 종친가문이다.

 

<정읍시청 홈페이지>

■ 송정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지정년월일 : 1990년 6월30일

소재지 :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 4

시대 : 조선시대

 

교통 : 역, 터미널에서 칠보행 시내버스로 30분, 승용차로 20분

주변관광명소 : 무성서원, 백암리남근석, 칠보섬진강댐수력발전소(옥정호), 불우헌정극인의 묘, 무성서원

 

조선조(朝鮮朝)의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사건(廢母事件)에 항소(抗訴)한 세속 7광(七狂) 10현(賢)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에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며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을 버리고 세월을 보내던 곳이라 한다.

이들 후손들이 영당(影堂)을 세우고 7광도(七狂圖)와 10현도(十賢圖)를 봉안하고 조상의 높은 기상과 우국(憂國)의 뜻을 기리며 춘.추(春秋) 중정(中丁)에 제사(祭祀)를 지낸다.

 7광(七狂)이라 함은 월봉(月峰) 김대립(金大立), 오무제(悟無齊), 김응윤(金應贇), 부휴제(浮休齊) 김 감(金 堪), 호암(壺巖)송치중(宋致中), 난곡(蘭谷) 송민고(宋民古), 천묵 (天默) 이상형(李尙馨), 관산(觀山) 이 탁(李 倬)을 칭하며 그들을 기린다.

 10현(賢)이라 함은 칠광 가운데 김응윤,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탁 외에 명천(鳴川) 김관(金灌), 췌세(贅世) 김정(金鼎), 만오제(晩悟齊), 김급(金汲), 월오(月悟) 김우직(金友直), 월담(月潭) 양몽우(梁夢禹)를 가르친다.

 송정(松亭)은 무성리(武城里) 성황산(城隍山) 동쪽에 있으며, 광해(光海)때 세칭 7광(七狂)과 10현(賢)이 모여서 놀던 곳이다. 광해의 폭정(暴政)이 극도에 이르자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항소(抗訴)를 했으나, 뜻을 이 루지 못하고 이곳에 모여 자적(自適)의 세월을 보내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가르켜 7광과 10 현이라고 불렀다.

 

7 광(七狂) : 김대립(金大立), 김응윤(金應贇), 김감(金堪), 송치중(宋致中), 송민고(宋民古), 이상형(李尙馨), 이탁(李倬)

10현(賢) : 김응윤(金應贇), 김관(金灌), 김감(金堪), 김급(金汲), 송치중(宋致中), 김우직(金友直), 송민고(宋民古), 양몽우(梁夢禹), 이탁(李倬), 김정(金鼎).

 

■ 후송정

소재지 :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 4

교통 : 역, 터미널에서 칠보행 시내버스로 30분, 승용차로 20분

주변관광명소 : 무성서원, 백암리남근석, 칠보섬진강댐수력발전소(옥정호), 불우헌정극인의 묘, 무성서원

 

송정(松亭) 아래 산 허리의 바위 위에 있다. 고종(高宗 光武3年) 때인 1899년에 화개헌(和介軒) 김직술(金直述)이 처음 지었다. 원래는 송정의 10현(賢)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十송정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후송정이라 했다. 1985년에 다시 좋게 지었고 바위 위에 후송정 42원비(員碑)를 세우기도 했다.

 

□ 후송정중수기(後松亭重修記)

 옛적에 우리 중조고 은암공(銀庵公)께서 동지 제공과 더불어 송정(松亭)의 십철(十哲)이 광해군(光海君)이 패륜(悖倫)할 때 은둔하여 스스로 편안히 하는 뜻을 본받아 결사하고 때로 술마시며 시를 읊기도 하고 또한 가까이에 최고운(催孤雲) 선생이 완상한 바의 유상대(流觴臺)는 호남의 병승지라고 일컬었다.

 지난 무슬(단기 4291)년간에 선조고 화개헌공(和介軒公)의 뜻을 계승하여 그 곁에 정자 두 칸을 지어 인하여 이에 이름을 지어 이르기를 후송정(後松亭)이라 하였다.

 대개 십현(十賢)의 송정(松亭)의 뜻을 추감(追感: 지난 일을 생각하여 느낌) 함이라.

간재 전(艮齋 田)선생의 친서로 석벽(石壁)에 후송정(後松亭)이라 제서하고 경향의 문인(文人)과 달사(達士)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춘추로 담론하고 시를 읊으니 문풍(文風)이 빛나 뒤를 이어 크게 후생의 준칙이 되었다.

 이로부터 풍조가 변혁된 후로 그 풍화(風化)가 떨치지 아니하여 정자 또한 썩고 부서져 길가는 행인들까지도 탄식하였다.

 근방에 사는 자손들은 선철(先哲)의 유풍 더욱 오래되어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김영득(金榮得), 양재근(梁在根), 송병호(宋丙浩)로 하여금 유사(有司)로 정하고 각각 비용을 갹출하여 증수하였다. 그 후 여러 사람이 상의하여 영구유지책(永久維持策)을 하고자 하였다.

 자손이 각처에 흩어져 살므로 서로 소원(疏遠)하니 누구의 아들인자 손자인지 알 수 없으므로 기왕의 십철(十哲)의 구비(舊碑)의 성휘(姓諱) 아래에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의 손자라 쓰고 후일에 잊지 않고 서로 찾는 데는 비(碑)에 새겨 그 곁에 세움만 같지 못하다고 여러 사람의 의논이 부합되었으나 재정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이리 저리 미루고 성과를 얻지 못하다가 다행히 송영옥(宋榮玉),김동옥(金東玉), 김동기(金東基)의 삼군(三君)이 이 정자에 오르더니 탄식하며 특별하고 돈독한 도움으로 이에 한 돌로 비를 정자의 뜰에 세우니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오직 자손가의 영구히 잊지 않고자 함과 도리어 또한 올라가 본 이의 감상의 발함이 있었음이다. 그러므로 전말은 약술하기로 드디어 이를 진실하게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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