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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도사공(都事公-휘 大涉). 1549(명종 4)∼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사정(士亭). 할아버지는 경상도병마절도사 윤종(胤宗)이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질병으로 문과 응시를 단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 행재소로 달려가 왕을 호종하였다.
이듬해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 송응창(宋應昌)이 경략방해비왜군무(經略防海備倭軍務)가 되어 입국함에 이의 접대임무를 맡은 윤근수(尹根壽)밑에서 외교관계의 중요하고 많은 일들을 빈틈없이 수행하다가 격무로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象村集. 〈文守弘〉
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김윤종-김진기-김대섭-김확-김정지-김환
(1) 묘소
(2005. 8. 7. 발용(군) 제공)
(2006. 7. 8. 발용(군) 제공)
<사마방목>
▣ 김대섭(金大涉) / 宣祖 06 式年 生員
【시험년도】 선조(宣祖) 06 (1573) 식년(式年) 생원(生員)
【합격등위】 3등 0076
【본인성명】 김대섭(金大涉)
【본인 자】 사형(士亨)
【본인생년】 기유(己酉) 1549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영감하(永感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김진기(金震紀)
【부친품계】 승훈랑(承訓郞)
【부친관직】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
<도사공 소개 자료 >
안동김씨 게시판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9/08
▣ 9월의 문화인물 허균과 안동김씨
허난설헌은 안동김씨 서운관정공 후손인 김성립의 부인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허균의 부인 또한 우리 안동김문의 따님이시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아 여기에 소개한다. 허균의 대한 자료는 생략하고, 그의 조강지처인 김씨에 대하여 살펴보면.... 문온공(척약재 김구용)의 8세종손은 의금부도사를 지내신 김 대섭이다. 김 대섭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첫딸은 실학자로 유명한 지봉 이수광이고 그의 아들이 영의정을 지낸 이성구,대사성을 지낸 이민구이다. 둘째딸이 바로 교산 허균의 첫 번째 부인이다. 그 다음의 아들이 철원부사, 상의원정을 지낸 김 확이다..
안동김씨 게시판
■ 작성자 :김영환 작성일 : 2001/07/09
문온공 척약재(김구용)의 8세손은 의금부도사를 지내신 김대섭인바 그의 외아들 김확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철원부사를 지내셨으며, 큰사위 지봉 이수광과 작은사위 교산 허균은 이곳 금수정에서 처남매부사이를 떠나 당시 사회 개혁을 논의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오늘날 홍길동전이 전해질수 있었던 것은 교산의 첫부인(김대섭의 딸)의 외동딸이 몰래 감추어서 전해진 것으로, 국문학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2)금부도사공묘지명 (2004. 7. 1. 영환(문) 제공)
(1)원문
義禁府都事金公 宜人沈氏 合葬誌銘 幷序
欽早從李公潤卿游。介而得雅於其舅金公。公蓋恂恂恬穆長德君子也。間嘗餉客。酒漿脯?(?=食+也)。卽毋不齊整而給也。婢御僮使。卽毋不謹恪而度也。於是乎復知公有賢內助焉以相之。曁金公歿。聞者咸咨嗟悼其不究。而至數婦人之飭行持節者。則又必以金公之室爲稱首。欽益驗疇襄所見知愈信也。一日潤卿氏使其子敏求携金公行狀及其室沈氏懿迹。合一通。來屬壙銘於欽曰。茲遺孤志也。欽辱習於金公也久。重與潤卿通家。於遺孤亦不啻忘年。則何敢不敬爲之言。按狀金安東大姓。公諱大涉。字士亨。新羅敬順主後也。遠祖上洛公方慶。有大功業。爲麗朝宗臣。有諱九容。以文章節義名當世。寔公七世祖也。高祖自壤。內贍寺僉正。贈戶曹參議。曾祖禮生。淸道郡守。贈兵曹參判。祖胤宗。慶尙道節度使。考諱震紀。活人署別坐。妣李氏。驪興望族。生員敏生女也。嘉靖己酉生公。生三歲。喪二親。鞠于姑家。少有異質。不煩師承。自力於學。萬曆癸酉。捷司馬。人嘖嘖謂曉夕發軔。俄以病廢擧子業。自守泊如。若無意於世者。壬辰兵起。挈家避嶺北。仍西指行在。癸巳。薦授義禁府都事。遷 紙署別坐。時皇朝將士東征者旁午。宋經略應昌嚴重自持。爲諸府最。尹海平根壽膺儐接之任。特擧公爲屬。公拮据辦治。俱中肯?(=戶+又+絲)有餘地。海平公亟稱其才。終以勞勩遘疾。甲午夏。卒于京師旅舍。年僅四十六。因亂權厝于水原。越八年辛丑。移窆永平縣南鍾賢山未坐丑向之原。距先壟二里。遺意也。公淳愨厚重。御家衆以寬。訓子弟以嚴。行已接物。必由諶信而不設町畦崖岸。且不喜言人過失。相識皆親慕之。以爲不可及。孝友天至。椎之宗黨。竝得其歡心。凡遇祀事。夙戒供具而致其蠲潔。節文儀式。畢据先賢制禮而行之。常以不得逮親之存爲至痛。語及必涕。孼姊之無歸者。分與臧獲而經紀之。庶出群從之失所者。家育之猶已出。不事生產。唯杜門自適。或數月不出。時與親舊樂飮。盡醉盤洽而止。性好山水。有小築於西湖。且買精舍于永平牛頭淵上。爲終老計。公之葆醇蘊朴旣如此。而得沈氏爲配。沈氏聰慧秀愨。拔於倫類。事夫子一於柔巽而無違也。待族姓一於敦睦而無間也。莅閫能範而肅也。享祀能敬而誠也。至於需應賓客。惠卹窮匮。各盡其道。而未嘗見其靳固也。巫祝禱禳。不接於門庭。子患痘而危。有勸禱者。答曰。有神可禱。莫如吾祖先。禱于家廟果愈。自遭公喪。以死自矢。水浆不入口。號哭不絶聲。廬于墓側。朝夕執奠。擗踊如初喪。過再朞猶垢面囚首。哀痛無節。秪以饘粥度日。如是者六七年。柴毀骨立。絶而復甦。猶不肯以醫藥求治。子矱泣諫。奉還京第。而衣服起居。不改斬衰之容。以終其身。嘗聞矱拜參奉不樂曰。官無卑。從官則王臣也。安可去病母而就仕。矱亦去官。沈氏與公同年生。戊申四月。竟不起。距公歿之十五年也。年六十。臨終不少戚。唯以護先塋立家廟爲托而已。若宜人者。可謂淑愼其身。令譽有終者矣。用是年九月。與公葬同墳。沈氏系出靑松。靑城伯德符之裔。華胄燀赫。世誕王妃。祖曰通禮院通禮達源。贈吏曹參判。考曰京畿監司銓。贈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母曰貞夫人李氏公生一男二女。男矱。十八。登進士。有文譽。擧授宣陵參奉不拜。娶議政鄭彥信女。生男幼。女長適李睟光。歷臺閣。今爲洪州牧使。淸名雅望。爲世模楷。迺所謂潤卿公也。洪州生二男一女。男長聖求。次敏求。女適進士權儆。生一男三女幼。嗚呼。以公之德。洎宜人之賢。而不克享有福履。卒止於斯。天之報施善人其何如也。或者畜而未發。歸成于後乎。銘曰。
坎而封。哲人之藏。順而寧。得天之常。茁于後。惟報之食。賁諸幽。其迹之卓。
(2) 역문
의금부도사 김공 의인 심씨 합장 지명(義禁府都事金公宜人沈氏合葬誌銘) 병서
내가 일찍부터 이공 윤경(李公潤卿)을 종유하면서 공의 소개로 그의 장인 김공(金公)과 친분을 갖게 되었었다. 그런데 김공은 대체로 진실하고 화평하여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였다. 빈객을 접대할 때에는 술과 음식등을 모두 정결하고도 넉넉하게 장만하여 대접하였고 비복들을 부리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근신하여 법도가 있었으니, 따라서 공에게 현명한 내조(內助)가 있어 돕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었다.
김공이 세상을 떠나자 듣는 이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공의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을 슬프게 여겼다. 그리고 부인으로서 몸가짐을 잘하고 정절을 지킨 이를 손꼽아 말할 적에는 반드시 김공의 부인을 제일이라 하였는데, 내가 지난날 보아 알고 있는 것에 징험해 보면 더욱 믿을 만하였다.
어느 날 윤경(潤卿)씨가 아들 민구(敏求)를 시켜 김공의 행장과 부인 심씨의 훌륭한 행적을 함께 기록한 한 통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그 아들의 뜻입니다.”
하였다. 내가 김공과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윤경과도 통가지의(通家之誼)가 있으며 그 아들 역시 망년(忘年)의 친구일 뿐만이 아니고 보면 어떻게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상고해 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씨는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이고, 공의 휘는 대섭(大涉), 자는 사형(士亨)으로 신라(新羅)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그리고 원조(遠祖)인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은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고려의 종신(宗臣)이 되었고, 휘 구용(九容)은 문장과 절의로 명성이 당대에 드높았는데 이분은 바로 공의 7대조이다. 고조 자양(自壤)은 내섬시 첨정으로서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증조 예생(禮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로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 윤종(胤宗)은 경상도 절도사를 지냈고, 아버지 휘 진기(震紀)는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를 지냈으며, 어머니 이씨는 여흥(驪興)의 명문 거족으로서 생원(生員) 민생(敏生)의 딸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 4)에 공을 낳았는데 3세 때 양친을 여의고 고모 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에 주력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자 사람들이 곧바로 벼슬길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스스로 담박함을 지키어 마치 세상일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임진년에 병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영북(嶺北)으로 피난갔다가 이어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에 갔다.
계사년에는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에 옮겨졌다. 이때에 동정(東征) 나온 중국 장사(將士)들이 모두 기세를 부렸으나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은 엄중히 규율을 지키는 제부(諸府) 중에 으뜸이었다. 해평군(海平君)윤근수(尹根壽)가 빈접사(擯接使)의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특별히 공을 추천하여 그의 관속(官屬)으로 삼았는데, 공이 모든 일을 힘껏 조치하여 복잡한 상황을 여유있게 처리하였으므로 해평공이 공의 재능을 자주 칭찬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과로로 인하여 병이 나서 갑오년 여름에 서울 객사(客舍)에서 별세하였는데 나이가 겨우 46세였다. 난리로 인하여 임시로 수원(水原)에 장사했다가 8년이 지난 신축년에 영평현(永平縣) 남쪽 선산에서 2리(里) 떨어진 종현산(鍾賢山) 미좌(未坐) 축향(丑向)의 언덕에 이장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공은 순박하고 성실하고 후중하여 집안 사람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자제들을 엄하게 교육시켰으며, 몸가짐에 있어서나 남을 대할 때나 반드시 성실한 마음으로 하여 물아(物我)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서로 아는 사람은 모두가 친애하고 연모하면서 스스로 공에게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타고난 효성과 우애를 종족에게까지 베풀었으므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리고 제사지내는 일을 당해서는 일찍부터 재계하고 제물을 정결하게 장만하였으며 절차와 의식을 모두 선현(先賢)의 예제(禮制)에 따라 시행하였다. 항상 부모가 생존했을 때 섬겨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기어 부모에 언급이 될 적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모(庶母)가 낳은 누이가 갈 곳이 없게 되자 비복을 나누어 주어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의지할 곳이 없는 서출(庶出)의 사촌 형제들을 집에 데려다가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길러주었다.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다만 집에 들어앉아 유유자적하며 몇 달씩 나오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마냥 취하여 다분히 즐기기도 하였다. 품성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서호(西湖)에 조그만 집을 지었고 또 영평(永平)우두리(牛頭里) 연못가에 있는 정사(精舍)를 사서 노년(老年)을 보낼 계획을 하였다.
공이 이처럼 순박한 심성(心性)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심씨(沈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심씨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빼어나고 성실하여 무리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부군을 섬기는 데는 한결같이 유순하여 거역하는 일이 없었고, 일가 친척을 대해서는 항상 화목하여 간격이 없었으며, 규중 규범이 엄숙하였고 성경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었으며, 빈객을 접대하거나 궁핍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데 있어서도 가각 도리를 극진히 하여 인색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도 푸닥거리하는 무당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는데 아들이 천연두를 앓아 위태롭게 되자 어떤 사람이 기도하기를 권하니 이에 부인이 대답하기를 “기도할 만한 신(神)이 있다면 우리 선조(先祖)만 한 신이 없을 것이다.” 하고, 가묘(家廟)에 기도한 결과 아들의 병이 과연 나았다.
공의 상을 당하고부터는 죽기로 맹세하여 미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전(奠)을 올릴 적에는 초상 때처럼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대상(大祥)을 치르고도 때묻은 얼굴에 죄인의 머리와 같은 모습으로 그지없이 애통해하고 죽만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6, 7년 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뼈만 남도록 몸이 야위어 기절을 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도 약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아들 확(矱)이 울면서 간하여 서울 집으로 모셔왔으나 의복이며 일상 생활에 있어 상복 중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일생을 마쳤다.
언젠가 확(矱)이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벼슬을 하면 왕의 신하인데 어떻게 어미를 버리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겠는가.” 하자, 확도 역시 관직에서 떠났다.
심씨는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무신년 4월에 끝내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죽은 지 15년이 되는 해로서 향년은 60세였다. 부인은 임종 때에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오직 선영(先塋)을 보호하고 가묘(家廟)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만 부탁하였다. 의인(宜人) 같은 분은 몸가짐에 있어 근신하였고, 훌륭한 명성을 끝까지 지닌 분이라고 이를 만한다. 이해 9월에 공과 같은 무덤에 합장하였다.
심씨는 관향이 청송(靑松)으로 청성백(靑城伯)덕부(德符)의 후예인데, 후손이 혁혁하여 대대로 왕비(王妃)가 탄생하였다.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를 지낸 조부 달원(達源)은 이조 찬판에 증직되었고, 경기 감사를 지낸 아버지 전(銓)은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자헌대부 예조 판서청파군(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이씨이다.
공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확(矱)은 18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문명이 있었고, 천거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받았지만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정승정언신(鄭彦信)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어리고, 큰 딸은 이수광(李晬光)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수광은 바로 윤경공(潤卿公)으로서 대각(臺閣)을 거쳐 지금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으며 청아한 명망으로 세상에 모범이 되고 있다.
이공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성구(聖求), 차남은 민구(敏求)이고 , 딸은 진사 권경(權儆)에게 출가하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아, 공 같은 훌륭한 덕과 의인 같은 현숙(賢淑)함으로 복록을 누리지 못하고 끝내 여기에 그쳤으니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하려는 것이 무엇이던가. 아마도 비축하여 내놓지 않다가 후손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길고도 높은 봉분 / 坎而封
철인이 묻힌 곳이로다 / 哲人之藏
순하게 살다가 편히 잠들었으니 / 順而寧
하늘의 상도를 얻었도다 / 得天之常
번창한 후손들이 바로 / 茁于後
그 보답받는 것이리 / 惟報之食
묘도에 지명 새기니 / 賁諸幽
그 행적 우뚝하여라 / 其迹之卓
상촌 신흠 찬
서기2004년 6월 일
김영환 옮김
* <계표>
문온공(김구용)-부사공(김명리)-직제학공(김맹헌)-참의공(김자양)-참판공(김예생)-병사공(김윤종)-별제공(김진기)-도사공(김대섭)-철원부사공(김확)
*도사공(휘 대섭) 선조님 생원시 급제 기록 자료 소개 (2005. 2. 28. 윤식(문) 제공)
출전 : 국립중앙도서관
萬曆元年癸酉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 : 宣祖 6년(1573년)
생원과 25인 명단에 기록됨.
*주 해설 : 우측 사진 우에서 세번째 줄의 기록
영감하'는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시고, '안행'은 형제간에 급제한 경우를 뜻함
구경하 :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신 경우
엄시하 : 아버님만 살아계신 경우
자시하 : 어머님만 살아계신 경우
<도사공 배위 심씨 묘지명> (2005, 2, 2, 주회(안) 제공)
象村稿卷之二十三 . 墓誌銘 一十三首.
義禁府都事金公宜人沈氏合葬誌銘 幷序
欽(신흠)早從李公潤卿(이수광)游。介而得雅於其舅金公。公蓋恂恂恬穆長德君子也。間嘗餉客。酒漿脯。卽毋不齊整而給也。婢御?使。卽毋不謹恪而度也。於是乎復知公有賢內助焉以相之。?金公歿。聞者咸咨嗟悼其不究。而至數婦人之飭行持節者。則又必以金公之室爲稱首。欽益驗疇襄所見知愈信也。一日潤卿氏使其子敏求携金公行狀及其室沈氏懿迹。合一通。來屬壙銘於欽曰。?遺孤志也。欽辱習於金公也久。重與潤卿通家。於遺孤亦不?忘年。則何敢不敬爲之言。按狀金安東大姓。公諱大涉。字士亨。新羅敬順主後也。遠祖上洛公方慶。有大功業。爲麗朝宗臣。有諱九容。以文章節義名當世。寔公七世祖也。高祖自壤。內贍寺僉正。贈戶曹參議。曾祖禮生。淸道郡守。贈兵曹參判。祖胤宗。慶尙道節度使。考諱震紀。活人署別坐。?李氏。驪興望族。生員敏生女也。嘉靖己酉生公。生三歲。喪二親。鞠于姑家。少有異質。不煩師承。自力於學。萬曆癸酉。捷司馬。人??謂曉夕發?。俄以病廢擧子業。自守泊如。若無意於世者。壬辰兵起。?家避嶺北。仍西指行在。癸巳。薦授義禁府都事。遷 紙署別坐。時皇朝將士東征者旁午。宋經略應昌嚴重自持。爲諸府最。尹海平根壽膺?接之任。特擧公爲屬。公拮据辦治。俱中肯?有餘地。海平公?稱其才。終以勞??疾。甲午夏。卒于京師旅舍。年僅四十六。因亂權?于水原。越八年辛丑。移?永平縣南鍾賢山未坐丑向之原。距先壟二里。遺意也。公淳?厚重。御家衆以寬。訓子弟以嚴。行已接物。必由諶信而不設町畦崖岸。且不喜言人過失。相識皆親慕之。以爲不可及。孝友天至。椎之宗黨。竝得其歡心。凡遇祀事。夙戒供具而致其?潔。節文儀式。畢据先賢制禮而行之。常以不得逮親之存爲至痛。語及必涕。孼?之無歸者。分與臧獲而經紀之。庶出群從之失所者。家育之猶已出。不事生?。唯杜門自適。或數月不出。時與親舊樂飮。盡醉盤洽而止。性好山水。有小築於西湖。且買精舍于永平牛頭淵上。爲終老計。公之?醇蘊朴旣如此。而得沈氏爲配。沈氏聰慧秀?。拔於倫類。事夫子一於柔巽而無違也。待族姓一於敦睦而無間也。??能範而肅也。享祀能敬而誠也。至於需應賓客。惠?窮?。各盡其道。而未嘗見其?固也。巫祝禱禳。不接於門庭。子患痘而危。有勸禱者。答曰。有神可禱。莫如吾祖先。禱于家廟果愈。自遭公喪。以死自矢。水?不入口。號哭不絶聲。廬于墓側。朝夕執奠。?踊如初喪。過再朞猶垢面囚首。哀痛無節。?以?粥度日。如是者六七年。柴?骨立。絶而復甦。猶不肯以醫藥求治。子?泣諫。奉還京第。而衣服起居。不改斬衰之容。以終其身。嘗聞?拜參奉不樂曰。官無卑。從官則王臣也。安可去病母而就仕。?亦去官。沈氏與公同年生。戊申四月。竟不起。距公歿之十五年也。年六十。臨終不少戚。唯以護先塋立家廟爲托而已。若宜人者。可謂淑愼其身。令譽有終者矣。用是年九月。與公葬同墳。沈氏系出靑松。靑城伯德符之裔。華胄?赫。世誕王妃。祖曰通禮院通禮達源。贈吏曹參判。考曰京畿監司銓。贈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靑坡君。母曰貞夫人李氏公生一男二女。男?。十八。登進士。有文譽。擧授宣陵參奉不拜。娶議政鄭?信女。生男幼。女長適李?光。歷臺閣。今爲洪州牧使。淸名雅望。爲世模楷。?所謂潤卿公也。洪州生二男一女。男長聖求。次敏求。女適進士權儆。生一男三女幼。嗚呼。以公之德。?宜人之賢。而不克享有福履。卒止於斯。天之報施善人其何如也。或者畜而未發。歸成于後乎。銘曰。
坎而封。哲人之藏。順而寧。得天之常。茁于後。惟報之食。賁諸幽。其迹之卓。
형태서지
권수제 象村稿
판심제 象村稿
간종 활자본
간행년도 1629年刊
권책 年譜, 目錄, 原集 60권, 附錄 합 20책
행자의 수 11행 20자
반곽의 크기 20.6×13.6(㎝)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도서번호 ?松D1-A156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71~72
저자
성명 신흠(申欽)
생년 1566년(명종 21)
몰년 1628년(인조 6)
자 敬叔
호 敬堂, 百拙, 南皐, 玄軒, 象村居士, 玄翁, 放翁, 旅菴
본관 平山
시호 文貞
<김대섭 여 (허균 배위) 행장> (2005. 2. 2.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惺所覆?稿卷之十五 文部十二 . 行狀
亡妻淑夫人金氏行狀
夫人姓金氏。上洛大姓也。前朝大相方慶之玄孫?若齋九容。有盛名於麗季。官至三司左使。其四代孫胤宗。武擧官節度。而其子震紀。庚子司馬。筮仕別提。寔生諱大涉。亦司馬癸酉。而筮仕都事。娶觀察使靑松沈公銓之女。夫人卽其第二女也。生隆慶辛未。年十五歸吾家。性謹愿樸而無飾。勤於織任組?無少怠。言若不出口。事母大夫人甚恭。晨夕必親省。食必嘗進。遇節則饋時食甚?。待婢僕嚴。而怒罔?以惡語。母大夫人稱之曰。我賢婦也。余方少年好狎遊。無幾微見於?面。若或少縱則輒曰。君子處己當嚴。古人有不入酒肆茶房者。況甚於此乎。余聞而心愧。少或?焉。常勸余勤學曰。丈夫生世。取科第??仕。可以爲親榮。而私於己者亦多。君家貧姑且老。勿恃才而悠泛度日。光陰迅速。後悔曷追乎。及壬辰避賊之日。方 困頓至端川。七月初七日。生子。越二日。賊猝至。巡邊使李瑛退守磨天嶺。余侍母?君。達夜踰嶺。至臨溟驛。氣之不能語。時同姓人許珩。邀與俱避海島。不得留。?至山城院民朴論億家。初十日夕。命絶。以牛買棺。裂衣以斂。肌肉尙溫不忍埋。俄聞賊攻城津倉。都事公?命權?後岡。享年二十二。而同住凡八年。嗚呼痛哉。其子以無乳夭。初生一女。長適進士李士星。生子女各一。己酉。余陞堂上拜刑曹參議。以例追封淑夫人。噫。以君之淑行。年不克中壽。且絶其嗣。天道亦難諶矣。方其窮時。對君挑短?。熒熒夜艾。展書讀之。稍倦則君必?曰。毋怠慢遲我夫人帖也。豈知十八年之後。只以一張空誥。薦之於靈座。而享其榮者。非吾結髮之逑。君若有知。亦必嗟悼。嗚呼哀夫。乙未秋。返自吉州。又?於江陵外舍。庚子三月。從先夫人永?於原州西面蘆藪。其原則在先壟之左。寅坐而申向也。謹狀。
惺所覆?稿卷之十五
형태서지
권수제 惺所覆?藁 판심제 없음 간종 寫本 간행년도 筆寫年未詳 권책 26권 8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10행 18자 반곽의 크기 18.5×12.6(㎝) 어미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도서번호 貴192-한46-가188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74
저자
성명 허균(許筠)
생년 1569년(선조 2) 몰년 1618년(광해군 10) 자 端甫 호 蛟山, 惺所 본관 陽川
<역문> (2005. 7. 31. 윤만(문) 제공)
교산 허균
아내의 성은 김씨로 서울 명문가의 출신이다. 고려 때의 정승 방경의 현손인 척약재 구용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으니 벼슬이 삼사의 좌사에 이르렀고, 그 4대손인 윤종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렀다. 그 아들 진기가 경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별제로 처음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 분이 대섭을 낳으니 그도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또한 都事(도사)가 되었다. 관찰사 심공 銓(전)의 딸에게 장가드니, 나의 아내는 바로 그분의 둘째 따님이다.
아내는 신미년(1571년)에 태어나 나이 열다섯에 우리 집으로 시집오니, 성품이 조심스럽고 성실하며,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길쌈에 전념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말은 더듬듯 조심스러웠고, 시어머니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몸소 문안드리고, 음식은 맛을 보고나서야 드렸으며, 제철 음식을 아주 넉넉하게 했다.
종을 다루기를 엄격하게 했지만, 용서할 것은 용서해 주었고, 욕설로 꾸짖지 않으니, 시어머니께서는 “우리 어진 며느리로다”라고 칭찬하셨다.
내가 나이 어린 때라 아내에게 장난치기를 좋아했지만, 얼굴에 싫은 기색을 띤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함부로 굴면 문득 이렇게 나무랐다.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히 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이나 다방에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던데 더구나 이보다 심한 짓이겠습니까?”
내가 이 말을 듣고 마음으로부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조금이나마 더러 자제하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나에게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권했다.
“장부가 세상에 한 번 태어나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함은 물론 자기 몸도 또한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은 가난한데다 시어머님은 연만하시니 너무 재주만 믿고 느긋하게 세월을 허송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빨리 흐르는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한다고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임진년에 왜적을 피하여 북으로 가던 참에 아내는 마침 임신 중이어서 몹시 지친 몸으로 단천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그 때가 칠월 초이렛날이었다. 이틀이 지나서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순변사 이영은 후퇴하여 마천령을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과 아내를 이끌고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에 이르렀는데, 아내는 기운이 다하여 말도 제대로 못할 형편이었다. 그 때 같은 성씨인 허행이 우리를 맞이해 주어서 해도로 피난을 했으나 거기서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산성원에 사는 백성 박논억의 집에 도착했다.
그 때가 초열흩날 저녁이었는데, 아내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기어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소를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을 했다. 그러나 체온이 오히려 따듯해서 차마 그대로 묻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을 친다는 소문이 들리므로, 도사공이 급히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으니, 그때 나이 겨우 스물두 살, 함께 산 세월을 생각하니 겨우 여덟 해에 불과했다.
슬프다. 그 때 태어난 아들은 젖이 없어 끝내 일찍 죽고 말았다. 처음에 난 딸아이는 자라서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가서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다.
기유년에 내가 당상관으로 진급하여 형조참의로 임명되니 법도에 따라 아내를 숙부인으로 추봉하게 되었다. 아내의 맑은 덕행으로도 오래 살지 못하고, 게다가 뒤를 이을 아들도 없으니, 하늘의 도리조차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가난할 때 아내와 마주앉아 짧은 등잔 심지를 돋우고 반짝거리는 불빛에 밤을 밝히며 책을 읽다가 조금이라도 싫증을 내는 기색을 보이면 아내는 반드시 농담 삼아 “게으름을 피우지 마세요. 저의 부인 첩(벼슬한 사람의 부인에게 내리던 첩지)이 늦어집니다”라고 말했는데, 18년 뒤에야 다만 한 장의 빈 교지를 그녀의 영전에 바치게 되었을 뿐, 그 영화를 누릴 이는 나와 귀밑머리를 마주 푼 짝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으랴. 만약 저승에서나마 이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슬픔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슬프다. 을미년 가을에 길주에서 아내의 뼈를 거두어 임시로 강릉 교외에 묻었다가, 경자년 3월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따라 원주 서면 가시덤불에 길이 묻었다. 그 언덕은 선산 왼쪽에 있으며 묘는 寅坐(인좌) 신향(申向) 寅時(인시) 방향, 즉 4시 방향을 등지고 신시(申時), 즉 16시 방향을 바라보는 자리이다. 삼가 아내의 행적을 쓴다.
원제 - 亡妻淑夫人金氏行狀(망처숙부인김씨행장)
《출처 :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손광성, 임종대, 김경수 옮김/을유문화사/2003》
<김대섭 외손자 이성구 묘지> (2005. 2. 2.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記言別集卷之二十三. 丘墓文. 李相國墓誌銘
公諱聖求。字子異。系出宗室。太宗諸王子敬寧君?之後也。曾祖贈河東君裕。祖兵曹判書贈領議政諱希儉。父吏曹判書贈領議政文簡公諱?光。母安東金氏。義禁府都事諱大涉之女。而上洛公諱方慶之後也。萬曆十二年甲申公生。-----
형태서지
권수제 記言(原集ㆍ別集) 판심제 記言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692年頃刊 권책 凡例, 目錄, 原集 67권, 別集 26권 합 20책 행자의 수 10행 18자 반곽의 크기 22.3×17.9(㎝) 어미 上下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도서번호 癡庵D1-A371 총간집수
저자
성명 허목(許穆) 생년 1595년(선조 28) 몰년 1682년(숙종 8) 자 文父, 和父 호 眉?, 臺嶺老人 본관 陽川 시호 文正
<역문> (2003. 10. 11. 발용(군) 제공)
李相國(聖求)의 묘지명에 나오는 휘 대섭(大涉) 선조님의 따님 기록 내용
출전 : <미수기언>(眉수記言. 조선 중기의 학자 허목(許穆:1595∼1682)의 문집)
제목 : 이 상국(李相國)의 묘지명(墓誌銘)
공의 휘는 성구(聖求), 자는 자이(子異)이다. 계보는 왕의 종실에서 갈려 나왔으니 태종대왕의 여러 왕자 중에 경녕군 비(敬寧君?)의 후손이다. 증조는 하동군(河東君) 유(裕), 할아버지는 병조 판서로 영의정에 추증된 희검(希儉)이고, 아버지는 이조 판서로 영의정에 추증된 문간공(文簡公) 수광(粹光)이다. 어머니 안동 김씨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대섭(大涉)의 딸이고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중략---- 묘소는 양주군치 서쪽 30리 밖 장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