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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복인(金腹仁) 1737년(영조 13) --1793년(정조 17) (2004. 6. 2. 윤만(문) 제공)
자(字)는 덕승(德承), 호(號)는 양산재(兩山齋) 안동인이다. 문온공(文溫公) 척약재(惕若齋) 구용(九容)의 15세손으로 1737년(영조 13) 정사(丁巳) 윤9월19일 생, 1793년(정조 17) 계축(癸丑) 9월20일 57세에 졸(卒)하시다. 1771년(영조 37) 신묘(辛卯)에 진사(進士), 1785년(정조 9) 을사(乙巳)에 정시(庭試) 병과3(丙科3)에 장원급제, 관직은 주서(注書)·전적(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이조정랑(吏曹正郞)·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증조부(曾祖父)는 승지공(承旨公) 시경(始慶)·조부(祖父)는 통덕랑(通德郞) 남일(南一)·부(父)는 통덕랑(通德郞) 희원(喜遠)·외조부(外祖父) 최경기(崔慶基)이다 배(配)는 진사(進士) 무경(懋敬)의 따님이신 숙인(淑人) 사천목씨(泗川睦氏)로 1733년(영조 9) 계축(癸丑)에 나시어 1757년(영조 33) 정축(丁丑) 7월10일 향년 25세에 돌아가시다.
계배(繼配)는 용(鏞)의 따님이신 숙인(淑人) 경주이씨(慶州李氏)로 1738년(영조 14) 무오(戊午) 6월 9일에 나시어 1771년(영조 47 ☞임신보의 42년은 오기이다) 신묘(辛卯) 5월12일 향년 34세에 돌아가시다. 공(公)은 정조 9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니 그 문장의 훌륭함에 왕이 감탄하여 대학(大學)등 사서(四書)와 은배(銀杯)등을 하사(下賜)하여 치하하고 벼슬을 내리니 주서(注書)에서 하루 동안에 전적(典籍)·병조정랑(兵曹正郞)·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세 번 승진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벼슬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르렀을 때 영의정(領議政) 채제공(蔡濟恭)이 지성껏 왕을 보필하여 많은 업적을 이루어 왕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시기한 서인(西人)들이 모함하니 그 기세가 두려워서 채영상(蔡領相)을 변호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공이 개탄(慨歎)하여 홀로 세 번이나 상소(上疏)하니 영남(嶺南) 유생(儒生)들이 이에 용기를 얻어 만인소(萬人疏)를 올리니 정조께서는 매우 기뻐하시어 채영상(蔡領相)을 더욱 신임하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않았다. 공(公)은 또 학식이 높아 당시의 석학(碩學) 정다산(丁茶山)도 사십인(四十人) 거유(巨儒) 중에 으뜸이라고 극찬하였다.
묘(墓)는 골안 산록(山麓) 선영(先塋) 묘역 하의 간좌(艮坐)이며 합분(合墳)이다. 1990년대 사초를 하면서 모든 석물을 새롭게 단장하였는데 봉분은 호석을 둘렀고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상석은 걸방석과 2개의 고석으로 받쳐져 있다. 배계절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한 쌍씩 있다.
《參考文獻 : ·壬申譜/1992·家譜·朝鮮朝放牧》
[송동(宋洞)에서 꽃구경하며 지은 시의 서]
- 갑진년(1784) 봄에 지음 -
갑진년(정조 8, 1784) 봄에 내가(☞주 : 다산 정약용)태학(太學)에서 유학(遊學)하였는데, 그때 주상이 모든 유생(儒生)들을 권장하여 유생들의 사조(詞藻 시문을 짓는 재능)가 날로 진취하고 상사(賞賜)가 풍성하였으니, 김복인(金復仁)ㆍ홍의호(洪義浩) 같은 이가 특히 크게 이름을 떨쳤다. 때로 반궁(泮宮 성균관의 별칭)의 숲 속에서 함께 모여 놀았는데, 한 글자의 포상(褒賞)이라도 입은 사람은 모두 다 와서 서로 추종하니, 모두 30여 인이다. 그 중에 한석민(韓錫敏)ㆍ한석륜(韓錫倫)ㆍ김수신(金秀臣)ㆍ강현영(姜顯永)ㆍ이기경(李基慶)ㆍ홍낙흠(洪樂欽)ㆍ한치응(韓致應) 등이 특히 드러난 사람이고, 나는 나이 가장 적은 자로서 늘 과분하게 제공(諸公)의 추허(推許)를 받았다.
하루는 제공이 서로 이끌고 송동(宋洞 주1)에 갔는데, 그때 살구꽃이 활짝 피고, 시냇가에는 버들 빛이 짙푸르렀다. 소나무 그늘 밑에 벌여 앉아 담소하며 즐기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선비의 놀이가 사치스러운 것은 마땅치 않으나, 술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들이 나라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상으로 받은 종이와 붓이 많을 것이니, 각기 종이 약간씩을 가져다가 추렴하여 한 차례 마시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소."하니,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술이 이르자 드디어 나이 차례로 마시는데, 내가 술잔을 잡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오늘 이 술은 임금께서 주신 것이니, 각기 시 한 수씩을 지어서 우리 성상께서 우리를 도야(陶冶)하고 성취시켜 주신 은혜를 칭송하지 아니하겠습니까?"하였더니,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시가 이루어지자, 제공이 나에게 서문 짓기를 부탁하였다.
《출전 : 다산시문집 제13권 서 序》
☞주1 : 송동(宋洞)은 명륜동1·2가와 혜화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우암 송시열이 살았던 집 부근의 마을이라 해서 붙여졌다.
[태학에서 시 십운을 지으신 김복인 (金復仁)ㆍ김수신(金秀臣)]
여름날 태학에서 임금의 명에 따라 전을 올리고 종이와 먹을 하사받았다. 제생은 함께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성은을 기리고 아울러 시 십운을 지었다[夏日太學 應敎進箋 蒙賜紙墨 諸生共辦酒饌以昭聖惠 仍述十韻] 이때 김복인(金復仁)ㆍ심봉석(沈鳳錫)ㆍ한석민(韓錫敏)ㆍ한석륜(韓錫倫)ㆍ김수신(金秀臣)ㆍ이기경(李基慶)ㆍ홍의호(洪義浩)ㆍ한치응(韓致應)ㆍ홍낙흠(洪樂欽) 등 제공이 함께 참여하였다.
태학의 선비 배출 성황 이루고 / ?舍賓興盛 우리 임금 은사품 새로웁다네 / ??寵賚新 품평한 글월 모두 어필이라면 / 品題皆御筆 장려하는 유시는 한림의 솜씨 / ?諭必詞臣 찬란한 주사 친필 높이 받들고 / ?璨擎?批 분주하게 유생들 모이었는데 / ??聚?巾 순화 때의 깨끗한 종이 쌓였고 / 紙堆淳化潔 수양매월 검은 먹 포개어 있네 / 煤疊首陽陳 하찮은 문장 기예 부끄러운데 / 薄技羞雕篆 은혜 말씀 선비들 감동시켰네 / 恩言聳搢紳 넓은 은택 골고루 끼치셨기에 / 均沾由澤普 환호 칭송 진심에 우러나오지 / 歡頌出情眞 유학한 자 준수한 선비 많은데 / 游學多?士 게다가 한 재실에 벗들도 있어 / 同齋況故人 술 사오니 홍로주 향그롭고요 / 酒?紅露馥 외 가르니 수정이 진기하여라 / 瓜劈水精珍 해학 속에 무더운 여름을 잊고 / 談謔凌朱夏 우러르는 마음은 대궐 향하네 / 瞻依近紫宸 보살피심 미천한 몸에 미치니 / 生成逮菲質 무얼로 임의 사랑 보답할 건고 / 何以答君仁 《출전 : 다산시문집 제1권, 시 詩》 여주 거주. 부(父) 김희원(金喜遠), 부(祖父) 김남일(金南一), 증조부(曾祖父) 김시경(金始慶) 영조(英祖) 47년 (式年) 진사(進士) 입격. 정조(正祖)9년(1785년),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3(丙科3)으로 합격.
(1)▣ 조선왕조실록 [金復仁(김복인)]내의 기록 ▣ (2004. 2. 7. 윤만(문). 제공) ○ 정조실록 제20권 정조 09년 08월 02일(기묘)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 및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제술(製述)·강경(講經) 시험을 행하였다. 강경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장상오(張相吾)와 제술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김복인(金復仁)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 정조실록 제22권 정조 10년 10월 11일(신해) [김복인이 채제공을 탄핵하는 무리들을 탄핵하다. 김복인 관직을 삭제하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전 정랑 김복인(金復仁)이 대궐로 마구 들어와서 상소 한 장을 바쳤는데 말이 매우 놀랍고 어긋나서 물리칠 수 없기에 받아들였습니다.” 하였다. 그 상소에 말하기를, “이번에 채제공을 서쪽 변방의 절도사에 보임한 것은 사실 성상께서 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통촉하시고 남김없이 밝히는 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설령 중신(重臣)에게 의심쩍은 흔적이 있었을 경우 성상께서 봐줄 것이 뭐가 있기에 비호하시겠습니까? 해와 달 같은 밝으심이 비추지 않은 곳이 없어서 충신과 역적의 한계를 꿰뚫어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금의 의논은 반드시 이를 배치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밝혀졌다고 말씀하시는데 당금의 의논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고, 전하께서는 역적이 아니다고 분부하셨는데 당금의 의논은 흉악한 역적이라.’하고 전하께서는 분석해서 시원스럽게 보여 다시는 남은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뜻을 거슬리며 기어코 이기려고 하니, 그와 같은 징계하여 토벌하는 의리에 대해 신은 사실 이해가 안 갑니다. 관직이 없을 때에는 가만히 놔두고 벼슬을 하자 비로소 역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놔두면 여러 해가 가도록 묵묵히 말 한마디도 없었다가, 전하께서 언급하면 떼지어 일어나 공격하여 마치 흉악한 음모를 이제야 캐낸 것처럼 하고 사변이 코앞에 닦친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그의 죄상에 대해 물어보면 얼굴만 서로 쳐다보며 웃는 빛을 띠고 말하기를 ‘나는 모르는데 당금의 의논이 그렇다고 한다.’고 합니다. 당금의 의논이란 어느 곳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온 세상을 채찍질하고 온 세상을 망라하여 제 몸과 마음을 지키지 못하게 함으로써 가까운 친족에게 화를 전가하여도 일부러 수수 방관(袖手傍觀)만 하고 있으며, 가까운 인척이 혐의를 피하여도 전혀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사헌의 징계하여 토벌하자는 말은 경재(卿宰)들의 상소가 죄를 얽어짠 것보다 더 심하였고 대각 신하들의 국문하자는 요청은 대신의 대질시키자는 차자보다도 더 무거웠습니다만, 어찌 그의 본심에 참으로 그가 역적인 줄을 알겠습니까? 다만 위세(威勢)가 가해지고 명리(名利)가 달려 있기 때문에 성상의 하교를 무시하고 한결같이 당금의 의논을 따른 것이니, 사람의 기백을 빼앗는 당금의 의논이 두렵기만 합니다. 심지어는 응당 시행해야 할 반첩(反貼)도 끝내 받들어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른바 병조 판서가 오늘날 신하라고 한다면 임금의 영을 거역하고 임금의 명을 거슬렸으니, 이것이 참 역적입니다. 흉악한 역적, 사나운 역적이란 이름을 사람에게 억지로 뒤집어씌우려고 하였으나, 자신이 흉악한 역적, 사나운 역적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일개 중신의 사생(死生)으로 경중이 될 것은 없지만 이 중신 때문에 세도가 어긋나고 기강이 무너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형정(刑政)이 잘못된 것을 생각하시어 어긋난 당금의 의논을 엄격히 배척함으로써 확고한 단안을 내려 임금의 기강을 거두어 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곁들어 말한 것은 시상(時象)을 그려내고 진실을 언급하였으니, 어찌 귀만 트이게 하였겠는가? 기쁘게도 눈도 뜨게 하였다. 강경하고 분명한 말이 그대 같은 소원한 처지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으므로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래 한 구절은 아주 살피지 못한 점이 있었다. 사람을 억지로 몰아세운다고 논하면서 그대가 반대로 사람을 억지로 몰아세우고 있었으니, 애석하게도 이를 제기하면서 관대하게 봐주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에서 중신을 위해 애써 구원한 것이 사적으로 좋아한 것이 되어 버렸으므로 전편의 글이 쟁쟁하였는다는 이유로 봐줄 수 없다. 그대는 잘 알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전 정랑 김복인의 상소 가운데 당금의 폐단을 언급하였기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만, 근일에 중신 채제공의 일로 정신을 많이 소비하고 누차 분부를 내린 것이 어찌 중신 한 사람의 처지를 위해서이겠는가? 첫째는 조정의 신하들을 위한 것이고 둘째도 조정의 신하들을 위한 것이다. 만약 세도가 이제부터 안정된다면 사람마다 뜻하지 않은 재앙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아리송한 죄에 연좌(連坐)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진실로 조정 신하들의 복이다. 조정에서도 어찌 함께 그 이익을 누리지 않겠는가? 김복인의 상소 가운데 ‘역적이 아닌 사람을 역적이라고 한 것은 무함이다.’고 한 것은 정말 확고한 의논이었으나, 다만 병조 판서에게 반첩(反貼)을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반대로 억지로 말하였다. 이에 대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을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면 중신 하나가 모호한 지경에서 벗어나자마자 중신 하나가 또 뜻하지 않은 재앙에 걸려들 것이니, 이는 세도가 분열되는 조짐이 될 뿐만이 아니라, 나의 괴로워하였던 마음과 지극한 뜻을 뒷 세상에 보일 수 없을 것이다. 전 정랑 김복인의 관직을 삭제하라.” 하였다.
○ 정조실록 제22권 정조 10년 10월 14일(갑인) 형조 판서 이명식(李命植)에게 사은 숙배하라고 신칙하였다. 하교하기를,
“나의 본 뜻과 괴로운 마음을 전후의 유시에 모두 말하였으므로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 중 분수에 밝은 자는 거의 다 이해하였을 것이다. 조정에서 한 명의 중신을 사사로이 좋아하지 않았는데 또 어떻게 한 명의 중신을 사사로이 미워하겠는가? 그러나 우매하여 사리를 모르는 자는 필시 ‘옳고 그른 것은 병행될 수 없고 충신과 역적은 혼동될 수 없으므로 두 중신 중에 한쪽이 옳으면 한쪽이 그를 것이다. 그러므로 역적이냐 역적으로 무함한 것이냐 간에 결코 한 세상에서 같이 벼슬을 할 수가 없다.’고 할 것이다만, 이는 진실로 겉만 보고 논한 것이다. 대체로 이 일은 조정의 하나의 큰 변고이다. 만약 지난 달 12일에 몸소 여러 신하들을 대면하여 긴요한 부분을 따져 보지 않았다면 그날 이전에 토벌한다고 말을 끄집어낸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으니, 비록 평안도 관찰사로 하여금 처지를 바꾸어 당하게 하더라도 전 병조 판서처럼 하였을 것이다. 지금 평안도 관찰사의 일이 진정된 뒤에 또 전 병조 판서의 일을 모호하게 놔둘 경우 이는 내가 한 명의 중신을 살리려다가 반대로 조정의 신하들에게 화를 전가하는 것이다. 내 비록 덕이 없지만 이처럼 요량없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며칠 전 김복인(金復仁)의 상소 가운데 한 구절의 말도 역시 위에서 이른바 모호한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비록 그 중신이 처신하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오늘날의 분부를 듣고도 만에 하나 출사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하의 분수를 모른 것이다. 형조 판서 이명식을 패초하여 입시하게 한 일이 중신의 처지를 위한 것이 아니고 보면 이는 자신이 출사하기를 어려워하는 것으로 인해 조정에 하나의 풍파를 더 일으키는 것이니, 결단코 노성인(老成人)이 감히 할 바가 아니다. 이것도 잘 알라.” 하였다.
○ 정조실록 제22권 정조 10년 11월 03일(계유) 좌참찬 이명식(李命植)이 상소를 올려 사직하기를, “신이 늙었는데도 죽지 않아 아직도 조정에 붙어 있다가 갑자기 비할 데 없이 망측하고 매우 흉악하며 패리(悖理)한 말을 들었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김복인(金復仁)의 말을 가리킨 것이다. 비답하기를, “앞서의 상소에 대해 내린 간곡한 유시를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 정조실록 제37권 정조 17년 05월 25일(병진) 이명식(李命植)을 수원부 유수로 삼고, 이어서 명하여 죽은 중신 조관빈(趙觀彬)이 보국 대부(輔國大夫)에 지중추로 강화 유수에 제배된 뒤에도 지중추의 직함을 그대로 지녔던 전례에 따라 지중추의 직함을 겸대하게 하였는데, 이는 병조의 계청을 따른 것이다. 명식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김복인(金復仁)의 상소로부터 탄핵을 받았는데, 그 말이 지극히 패려궂고 참혹하였으니 신하된 자로서 이런 말을 한 마디라도 듣고서야 어떻게 하루인들 세상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가 한 말들이 자못 도리가 없어 실상 족히 변명할 것도 없었던 까닭에 이같은 원통함을 간직한 채 7, 8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듣게 된 것은 오로지 징계하고 토죄하는 일을 유독 엄격하게 했던 까닭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연전에 하유가 반포된 뒤로 신이 처음부터 고집하였던 그 의리가 문득 사람을 무함하는 것으로 낙착되어버렸습니다. 대저 징계하고 토죄하는 일이 그 얼마나 관계가 중대한 것입니까마는 일이 이미 실상이 없게 되었으니, 비록 말을 생판 조작한 것이 아닌 때문에 반좌(反坐)되는 것은 면할 수 있었으나, 신이 스스로 처신하는 데 있어서야 어떻게 버젓이 반열의 사이에 당돌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신에게 내려진 벼슬과 품계가 높고 현달한 경우이겠습니까. 그때부터 신은 마침내 버려져 죽은 사람으로 자처하고 비록 가까운 친척 사이일지라도 왕래하는 일이 없어 사람 사는 도리가 거의 모두 끊어졌고 관직의 거취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한번도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새로 내린 벼슬은 주구(珠丘)를 가까이서 모시고 행궁을 보호해야 하니 사체와 도리에 있어 어찌 혹시라도 머뭇거리며 사피하려는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구구한 신의 의리로서는 옛날에 가졌던 생각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부(府)의 이 직임을 나는 마치 고굉(股肱)이나 주액(켪腋)처럼 여기고 있다. 경은 다섯 도(道)의 관찰사를 지냈고 세 번 관방(關防)을 맡아서 공적이 함께 벼슬하는 사람들 중에 성대히 드러났었다. 내가 경에게 이 부의 직임을 임명한 데에는 또한 깊이 생각한 것이 있었다. 설사 경에게 머뭇거릴 의리는 있다 할 지라도 가서 일하는 것만은 사양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이곳 화성에 유수를 둔 데에서는 모름지기 그 제정하여 둔 뜻을 보아야 할 것이니, 그것은 바로 선침을 수호하기 위해서이고 행궁을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경도 초봄의 행행 때에 내린 윤음(綸音)을 보았을 것이다. 이 부의 이 직임이 어찌 혹시라도 나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릴 수 있는 자리이겠는가. 경은 바로 일어나 사은 숙배하라.” 하였다.
(2) <다산 시문집>에서 (2004. 3. 20. 윤만(문) 제공) 여름날 태학에서 임금의 명에 따라 전을 올리고 종이와 먹을 하사받았다. 제생은 함께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성은을 기리고 아울러 시 십운을 지었다[夏日太學 應敎進箋 蒙賜紙墨 諸生共辦酒饌以昭聖惠 仍述十韻] 이때 김복인(金復仁)ㆍ심봉석(沈鳳錫)ㆍ한석민(韓錫敏)ㆍ한석륜(韓錫倫)ㆍ김수신(金秀臣)ㆍ이기경(李基慶)ㆍ홍의호(洪義浩)ㆍ한치응(韓致應)ㆍ홍낙흠(洪樂欽) 등 제공이 함께 참여하였다.
태학의 선비 배출 성황 이루고 / 黌舍賓興盛 우리 임금 은사품 새로웁다네 / 彤墀寵賚新 품평한 글월 모두 어필이라면 / 品題皆御筆 장려하는 유시는 한림의 솜씨 / 獎諭必詞臣 찬란한 주사 친필 높이 받들고 / 璀璨擎硃批 분주하게 유생들 모이었는데 / 蹌踉聚皁巾 순화 때의 깨끗한 종이 쌓였고 / 紙堆淳化潔 수양매월 검은 먹 포개어 있네 / 煤疊首陽陳 하찮은 문장 기예 부끄러운데 / 薄技羞雕篆 은혜 말씀 선비들 감동시켰네 / 恩言聳搢紳 넓은 은택 골고루 끼치셨기에 / 均沾由澤普 환호 칭송 진심에 우러나오지 / 歡頌出情眞 유학한 자 준수한 선비 많은데 / 游學多髦士 게다가 한 재실에 벗들도 있어 / 同齋況故人 술 사오니 홍로주 향그롭고요 / 酒賖紅露馥 외 가르니 수정이 진기하여라 / 瓜劈水精珍 해학 속에 무더운 여름을 잊고 / 談謔凌朱夏 우러르는 마음은 대궐 향하네 / 瞻依近紫宸 보살피심 미천한 몸에 미치니 / 生成逮菲質 무얼로 임의 사랑 보답할 건고 / 何以答君仁
《출전 : 다산시문집 제1권, 시 詩》
▣ 송동(宋洞)에서 꽃구경하며 지은 시의 서 ▣ (2004. 6. 8. 윤만(문) 제공)
- 갑진년(1784) 봄에 지음 - 갑진년(정조 8, 1784) 봄에 내가(☞주 : 다산 정약용) 태학(太學)에서 유학(遊學)하였는데, 그때 주상이 모든 유생(儒生)들을 권장하여 유생들의 사조(詞藻 시문을 짓는 재능)가 날로 진취하고 상사(賞賜)가 풍성하였으니, 김복인(金復仁)ㆍ홍의호(洪義浩) 같은 이가 특히 크게 이름을 떨쳤다. 때로 반궁(泮宮 성균관의 별칭)의 숲 속에서 함께 모여 놀았는데, 한 글자의 포상(褒賞)이라도 입은 사람은 모두 다 와서 서로 추종하니, 모두 30여 인이다. 그 중에 한석민(韓錫敏)ㆍ한석륜(韓錫倫)ㆍ김수신(金秀臣)ㆍ강현영(姜顯永)ㆍ이기경(李基慶)ㆍ홍낙흠(洪樂欽)ㆍ한치응(韓致應) 등이 특히 드러난 사람이고, 나는 나이 가장 적은 자로서 늘 과분하게 제공(諸公)의 추허(推許)를 받았다.
하루는 제공이 서로 이끌고 송동(宋洞 주1)에 갔는데, 그때 살구꽃이 활짝 피고, 시냇가에는 버들 빛이 짙푸르렀다. 소나무 그늘 밑에 벌여 앉아 담소하며 즐기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선비의 놀이가 사치스러운 것은 마땅치 않으나, 술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들이 나라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상으로 받은 종이와 붓이 많을 것이니, 각기 종이 약간씩을 가져다가 추렴하여 한 차례 마시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소."하니,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술이 이르자 드디어 나이 차례로 마시는데, 내가 술잔을 잡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오늘 이 술은 임금께서 주신 것이니, 각기 시 한 수씩을 지어서 우리 성상께서 우리를 도야(陶冶)하고 성취시켜 주신 은혜를 칭송하지 아니하겠습니까?"하였더니,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시가 이루어지자, 제공이 나에게 서문 짓기를 부탁하였다. 《출전 : 다산시문집 제13권 서 序》
☞주1 : 송동(宋洞)은 명륜동1·2가와 혜화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우암 송시열이 살았던 집 부근의 마을이라 해서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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