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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성공 종회 소개
가. 설립일시 : 1989년 7월 9일(일요일) 10:30분 설립장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대한인쇄문화협회 회관 4층 강당
나. 사무실 및 연락처 1) 회장(在熙) :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186-1 미성아파트5동1003호 (☎ : 02-3216-1616) 2) 총무(洪萬) :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153번지 (☎ : 043-878-8916) (承萬)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951 별빛마을 건영(아) 1013동 1205호 (☎ : 031-978-0167)
다. 문중회 소개 1) 명 칭 : 안동김씨 문온공파 음성공 후손종회 2) 주요묘소 : 음성공(震綱), 하양공(大?) 3) 향 사 일 : 양력 11월 첫째주 일요일 4) 장 소 :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1리 敬桑齋 崇慕祠(경상재 숭모사)
라. 연혁 1) 1989년 7월 9일 : 음성공 후손종회 규약 제정 2) 1989년 : 제각 경상재 숭모사 건립 3) 199 년 : 세거비 건립.(安東金氏世居之地) 4) 1997년11월 2일 : 음성공 후손종회 규약 1차개정 5) 2001년11월 4일 : 음성공 후손종회 규약 2차개정
마. 규약
제 1 장 총 칙 제 1조(명칭) 본회는 안동김씨 문온공(대사성공)파 음성공 후손종회라 칭한다. 제 2조(회원) 본회 회원은 안동김씨 음성공 후손으로 한다. 단, 의결권은 만 20세 이상인 회원으 로 한다. 제 3조(목적) 본회는 종인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고 조상의 빛난 얼을 선양 보존하며 자손의 숭 조이념을 고취함으로써 국가사회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 4조(사업) 전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업을 한다. 1. 종인간에 친목증진에 관한 일. 2. 선조의 묘소, 종토(전답, 임야), 재실 및 부속건물, 비석, 표석 등 시설물의 보 존관리와 제향에 관한 일. 3. 선조의 공훈에 대한 현양사업. 4. 선조의 사적, 학술의 연구발표 및 연수집회에 관한 일. 5. 자손들의 육영 및 장학사업. 6. 자손들의 선행, 효행 및 공로표창에 관한 일. 7. 족보, 회보, 문집 발간 등 문화사업. 8. 종인간의 애경사에 관한 일. 9. 회비 책정 및 종재증식에 관한 일. 10. 상위종회에 참여 및 협조에 관한 일. 11. 기타 본회 목적 달성에 필요한 일.
제 5조(사무소) 본회의 사무소는 서울특별시내에 두며 필요에 따라 향리에 분소를 둘 수 있다.
제 2 장 임 원 제 6조(임원) 본회에 다음과 같이 임원을 둔다. 1. 회장 1인 2. 부회장 5인내외 3. 감사 2인 4. 이사 30인 내외(총무이사 2인, 사업관리이사 1인 포함) 5. 명예회장 1인 6. 고문 약간인(전직 회장 및 75세 이상으로써 회장이 추천하신 분)
제 7조(임원의 기능) 본회의 임원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회장은 본회를 대표하고 회무일체를 통할하며 총회 및 이사회(상임이사 포함) 의 의장이 된다. 2. 부회장은 회장을 보좌하고 회장 유고시는 수석부회장이 그 직무를 대리한다. 단,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시는 연장순으로 대행한다.(회 장 궐위시는 차기총 회에서 보선한다) 3. 감사는 본회의 회계 및 업무를 감사하고 그 결과를 이사회와 총회에 보고한다.(정기감사는 매년 10월중에 행하며 임원회 결의에 따라 수시감사를 할 수 있다) 4. 이사는 이사회를 구성하고 본회의 회무를 의결 집행한다. 5. 총무이사는 사무적인 회무의 집행처리, 회의소집과 연락업무, 회비, 종재의 수입 지출업무, 종재관리, 예금통장 보관관리, 회장이 위임한 인장관리, 종중묘원관 리, 기타 회의 결의사항 추진.(총무와 부총무 업무분장은 회장이 지시한다) 6. 사업관리이사는 제향업무일체, 종토, 종재관리, 조상묘소관리, 종중묘원관리, 기타 사항 추진. 7. 명예회장은 문중 원로 종인중 지식과 덕망이 높은 분 중에서 회장 추천에 의 하여 총회에서 추대하며 종회 자문에 응한다. 8. 고문은 본회 자문에 응한다.
제 8조(임원의 임기) 임원의 임기는 다음과 같다. 1. 임원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선거에 의하여 연임할 수 있다. 2. 보선임원의 임기는 전임자의 잔여임기로 한다.
제 3 장 총 회 제 9조(총회) 본회의 정기총회는 매년 시제일인 11월 첫 일요일에 소집 개최한다. 단, 긴급한 사안이 있을 시는 상임이사회 결의에 의하여 임시총회를 소집할 수 있다. 제10조(회의소집방법) 회의는 서면 또는 연락망을 통한 전화, 전언 등으로 통지한다. 제11조(총회기능) 총회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본회 규약제정 및 개정. 2. 사업계획, 예산집행 및 결산에 관한 승인. 3. 이사회에서 선출된 임원의 승인. 4. 이사회에서 위임한 사항 결의. 5. 기타 이사회의 결의로서 부의된 사항 처리. 제12조(정족수) 총회는 의결권을 가진 시제 참석인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
제 4 장 이 사 회 제13조(구성) 이사회는 회장. 부회장. 이사(총무, 사업 포함)로서 구성한다. 단, 필요에 따라 감사와 고문중에서 지명된 자도 참석시킬 수 있다.
제14조(기능) 이사회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이사회는 전조에 따른 구성원 과반수 참석과 참석인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의 결한다.(사정에 따라 불참자는 위임장 또는 구두 위임도 가함) 2. 사업계획 및 예산안의 작성의결 및 집행. 3. 결산안 작성. 4. 종재의 취득 및 처분. 5. 회비책정 및 찬조금품 모금과 처리. 6. 기타 총회 위임사항의 의결 집행.
제15조(권한의 위임) 이사회는 권한의 일부 또는 전부를 상임이사회에 위임할 수 있다. 제16조(상임이사회 구성) 이사회에서 선출된 상임이사 5인과 회장. 수석부회장, 총무이사 2인, 사업관리이사로 구성한다. 단, 회장이 필요로 할 시는 일반부회장 및 고문중에서 지명 참석시킬 수 있다. 제17조(상임이사회 기능) 상임이사회는 이사회의 위임사항과 경미한 회무를 처리한다.
제 5 장 재 정 제18조(재정) 본회의 재정은 다음과 같다. 1. 일반회비, 특별회비(찬조) 및 성금품. 2. 소유재산에서의 수익금.
제19조(회계년도) 본회 회계년도는 매년 11월 1일에 시작하여 익년 10월 말로 마감한다.
제 6 장 각종 위원회 제20조(위원회 설치) 본회 제4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업에 따라 전문성을 발휘하고 사 업을 철저하게 추진 수행하기 위하여 별도 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할 수 있다. 단, 사업의 종결 또는 존속의 사유가 소멸되었을 때에는 해체하며 사업의 결과를 이사회와 총회에 보고하여야 한다.
제 7 장 비치장부 제21조(비치표부) 본회에는 다음 장부를 비치한다. 본회규약, 회의록, 사업기록부, 연혁지, 종인 주소록, 예금통장, 종재일람표, 임원임명부, 종인동정기록부, 종중공동묘원분양부 및 약도, 시제축문록, 제수진설도.
제 8 장 부 칙 제 1조(일반적 적용) 본 규약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사회관례에 따른다. 제 2조(개정시행) 본 규약은 1989년 7월 9일 본회 창립과 함께 제정 시행되었으며 1997년11월 2일 총회 결의에 의하여 종회규약과 종계규약으로 이원화되었던 것을 통합규약 으로 제정하고 일부조문을 개정 보완하여 단일규약으로 정비 운영케 되었음. 서기 2001년 11월 4일 2차 개정(제 6조 6항 개정)
바. 임원명단. 1) 창립 임원명단. 고문 : 相弘, 相安, 相萬, 庚默, 定默, 學默, 在麟, 在基, 在鳳, 永會, 喆會(상임), 光國. 회장 : 在龍 부회장 : 在熙, 在克, 在衡. 감사 : 亨默, 東萬. 이사 : 德萬(총무), 觀默(부총무), 興萬(부총무), 相護(사업), 在福(섭외), 在烈, 在興, 在璜, 圭會, 相大, 元默, 在華, 在冕, 洪萬, 明會, 定萬, 龍萬, 在九, 在元, 光天, 宗萬, 在赫, 在禱. 2) 2대회장 : 喆會, 총무 : 3) 3대회장 : 在徽, 총무 : 承萬 4) 4대 임원명단. 명예회장 : 在龍 고 문 : 喆會, 相護, 在璜, 德萬, 在徽 회 장 : 在熙 부회장 : 在元, 在克, 定萬, 相大, 光麟 총 무 : 洪萬, 承萬 감 사 : 在春, 觀默 이 사 : 佑경, 在觀, 應會, 在九, 在武, 三默, 光天, 明會, 在成, 潤萬, 東萬, 在根, 興萬, 在孝, 在明, 宗萬, 聖會, 光讚, 相福, 亨默, 海默.
사. 주요 선조님 1) 震綱(진강) : 사헌부 감찰 행 음성현감. 2) 大?(대화) : 사헌부 감찰 행 하양현감. 3) ?(구) : 광해군7년(1615년) 식년시 병과. 예조좌랑. 4) 始慶(시경) : 숙종8년(1682년) 증광시 을과. 호조정랑, 종성.밀양도호부사, 춘추관 수찬관, 이조참의, 좌.우승지. 5) 復仁(복인) : 정조9년(1785년) 정시 병과. 사헌부 지평. 6) 亨湜(형식) : 휘릉참봉. 사범학교 교관. 중추원 의관 역임한 유학자. 7) 相範(상범) : 독립협회 대한자강회에서 민권운동. 창성군수. 정주군수. 8) 相泌(상필) : 법부주사로 고종황제의 신임. 9) 相天(상천) : 법학교 교관. 황성신문사장. 10) 相胤(상윤) : 성균관 박사. 11) 光默(광묵) : 상윤공 자로 만석꾼의 칭호를 받은 巨富(거부). 12) 在英(재영) : 경성의학전문학교. 도립병원장. 삼일만세운동 선도. 수양동우회원. 13) 在喆(재철) : 보성전문학교. 도 관재국장. 14) 學默(학묵) : 미네소다대학원. 보사부차관.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뇌성마비협회장. 15) 周默(주묵) : 조도전대학. 3대 민의원(국회의원) 16) 在衡(재형) : 용의눈물, 여인천하 제작 PD 17) 在衍(재연) : KBS 부주간. PD 18) 在熙(재희) : 문성인쇄(주) 회장, 음성공후손종회 회장(현). 19) 在龍(재용) : 장학관, 음성공후손종회 명예회장.(현) 20) 珽萬(정만) : 가톨릭의과대학 정형외과 교수(강남성모병원), 대한정형외과학회장. 21) 기타 교육계, 과학계, 방송계, 의료계, 실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분이 많고, 박사학위 취 득자도 십육칠명을 헤아리나 지면관계상 생략함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2002. 1. 1. 수정 보완)
아. 향조 음성공의 사적 음성공의 諱(휘)는 震綱(진강)이시니 문온공의 六世孫(육세손)이고 경상좌병사공 諱(휘) 胤宗(윤종)의 次子(차자)이시다. 벼슬이 사헌부 감찰을 거쳐 통훈대부 위계에 오르셨고 晩年(만년)에 음성현감으로 봉직하셨으며 묘를 개미실(甘美谷)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모시고 그 墓下(묘하)에서 자손들이 世居(세거)하여 왔으므로 음성공을 우리의 鄕祖(향조)로 모시고 있다.
향조 음성공의 長子(장자)께서 諱(휘)는 大화(대화)이시니 박학하시고 정의로우시고 효성이 지극하셨다 한다. 父公(부공)께서 환후가 위독하시자 혼신의 정성으로 侍湯 (시탕)하시었으나 보람없이 애석하게 별세하시니 개미실(甘美谷)에 禮葬(례장)하고 三年喪中(삼년상중) 侍墓(시묘)살이를 하셨는데 묘막(묘옆에 풀로 가려 지은 장막)에서 三日一粥(삼일일죽)으로 연명하시며 3년간 한시도 자리를 뜨시지않으시고 哀哭(애곡)하시니 그 효성을 京鄕一圓(경향일원)에 널리서 칭송과 존경을 받으셨다 전해 지고 있다.
그후 40여세에 벼슬길에 오르시어 사헌부 감찰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통훈대부 위계에 오르셨으나 光海虐政(광해학정)에 밀려 외직인 하양현감으로 전직되어 지방 수령으로서 선정을 하며 公務(공무)에 충실하셨으나 날로 혹심하여 지는 광해학정에 시달리다 못하여 수차에 亘(긍)한 항변으로 충간하면서 고민하던 중 위로하러 온 有志住民(유지주민)에게 老軀臥病(노구와병)으로 治政(치정)할 수 없어 퇴임하였다고 신임수령에게 이르라 하시고 先考墓下(선고묘하) 개미실(현 상평리)로 귀향 은거하시다가 仁祖改玉(인조개옥) 후에 복권과 아울러 이조참의에 特贈(특증)되셨다.
하양공께서는 묘하에서 자손의 후학을 열심히 훈육하시면서 한편 많은 뽕나무를 심어 蠶業(잠업)을 이룩하여 길쌈(명주비단을 짬)을 권장하는 등 삶에 기반을 마련하시고 鄕村(향촌)의 근본과 자손만대가 영원히 번성토록 하기 위하여 하양공께서 스스로 雅號(아호)를 桑齋(상재)라 하시고 다음과 같이 先考墓下(선고묘하)의 마을을 命名(명명)하여 남기셨다.
稱其村曰桑村(칭기촌왈상촌) 뽕나무 심은 이 마을을 상촌이라 부르고 名其里曰助桑(명기리왈조상) 그 동리 이름을 조상리라 하라.
그래서 현재 상평리의 이름이 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하양공의 선정의 치적과 거룩하신 행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남 河陽(하양)에 鄕賢祠(향현사)를 짓고 祭享(제향)을 받들고 있다.
---안동김씨대사성공파음성공후손종친회 발행 "안동김씨 대사성공파 음성공자손 계보"중에서(1990년 10월)--
* ▣ 감곡 상촌 마을비 소개 ▣ (2003. 8. 30. 윤만(문) 제공)
감곡면> ◈ 상평1리(아랫상촌, 윗상촌, 외딴터) ▶ 연혁 --본래 충주군 감미곡면 지역으로 고종 광무 음성군에 편입되었다. 1912년 작성된 「구한국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음성군 감미면 행정구역 명칭에서 지금의 상평리 지역인 상촌, 덕동, 성평리, 상촌, 공산리, 외주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상촌의 상자와 성평의 평자를 따서 상평이라 하여 음성군 감곡면에 편입되었다. 해방직후 1945px년 11월 2일 법령 제21호에 의거 일제 총독부 지방관제를 그대로 이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비 문안 --우리 마을 상평1리는 약 400년전 처음으로 안동김씨 김진강공의 장남 대화공이 벼슬을 시작하고 이 마을에 정착하고 되면서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식주를 자급자족하게 되면서 마을이름을 상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촌마을은 차령산맥의 지맥인 원통산줄기 가사바위밑에 펼쳐진 작은 분지에 이루어진 촌락으로 마을둘레는 얕은 산으로 둘러 쌓여져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아 매우 아늑하고 포근하며 마을안 울창한 느티나무 숲 아래서 푸른 반석위를 구르는 백옥같은 맑은 물소리는 산새와 매미소리가 서로 조화되며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이곳에 옛 선비들이 모여앉아 바둑과 장기를 즐기던 이른바 선경으로 상촌 마을은 길이 후대에 자랑거리라 이 비를 새겨 전하다.
▶ 마을비현황 --1996년 9월 10일 마을 입구에 총높이 103cm, 비신 가로 82cm, 비신 세로 52cm 규모로 군비 100만원, 자부담 40만원의 예산이 소요되어 건립되었다. 기단부는 방형이며 비신은 마을 유래·자랑 등이 기록되어 있다. ≪출전 : http://www.usnews.co.kr/intro/bisuck/gamgok/sang1.html≫
자. 음성공파 관련 사진 소개 (2002. 2-11. 윤만씨(문) 자료 제공)
<안동김씨 세거지 비석>(소재-아랫마을) <경상재 숭모사 전경>(소재-아랫마을)
<모정거리> <윗마을 전경>
<안동김씨 세장지 비석>(휘 구, 시경, 복인 묘소 봉안처) <향조 음성공(휘 진강) 묘소>
<하양공(휘 대하) 묘소> <안동김씨 공동묘원 조성지 전경>
<고 김학묵박사 추모비> <하양공(휘 대화) 친필시>
<음성공파 종회 및 종계(2002년도)> <음성 桑村 시향 장면>
<김재옥 여교사 현충탑>(중원군 동락초교 내) <김재옥 교사 기념관 기념 식수>
<동락 초교와 김재옥교사 기념관>
차. 주요 선조님 상세 소개 (2004. 6. 2. 윤만(문) 제공)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개미실에 세거하고 있는 안동김씨(문온공파)는 족보상 문과 급제자를 4분 배출하였습니다. 역사자료로 확인되신 분이 <정(좌)랑공(김구 金?, 음성공(진강 震綱)의 손자)>, <승지공(김시경 金始慶, 음성공의 6세손)>, <지평공(김복인 金復仁, 음성공의 9세손)> 세분이시고, 미확인된 분으로 <참판공(김남구 金南龜, 음성공의 7세손)> 한 분이십니다.
1) 김구(金榘) 1582년(선조15)--1627px년(인조 5) 자는 방숙(方叔), 호는 청창(聽蒼), 본관은 안동, 문온공(文溫公) 척약재(척若齋) 구용(九容)의 9세손으로 1582년(선조15) 임오(壬午) 3월26일 생, 1627px년(인조 5) 정묘(丁卯) 4월28일 향년(享年) 36세에 졸(卒)하시다. 1603년(선조 36) 계묘(癸卯) 생원,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에 진사(進士), 1615년(광해군 7) 을묘(乙卯)에 식년시(式年試) 병과16(丙科16)에 합격, 승문참하(承文參下)를 하시다가 광해정란(光海政亂)으로 고향 충주(☞지금의 음성 감곡 상촌)로 물러나셨고 인조개옥(仁祖改玉) 후 예조정랑<禮曹正郞-문과방목 ☞壬申譜에는 예·형 양조좌랑으로 기록되어있고 구전으로도 좌랑공이라 하고 있다)·군수(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증조부(曾祖父)는 병사공(兵使公) 윤종(胤宗)·조부(祖父)는 음성공(陰城公) 진강(震綱)·부(父)는 상촌(桑村) 입향조(入鄕祖) 하양공(河陽公) 대하(大河)·외조부(外祖父) 이양형(李陽亨)이다.
배(配)는 숙인(淑人) 상산김씨이다. 1586년(선조 19) 병술(丙戌) 7월28일에 나시어 1658년(효종 9, ☞壬申譜의 1958년은 오기이다) 무술(戊戌) 11월27px일 수(壽) 73세(☞임신보의 63세는 오기이다)에 돌아가시다. 부(父)는 참의(參議) 김홍미(金弘微)이시고 처 외조부(妻外祖父)는 경북 안동 하회마을 서애 류성용 선생의 형님이신 겸암 류운용 선생이시다. 후사(後嗣)가 없어 아우 계(棨)의 맏이 영희(永熙)에게 입후(立後)하였다. 유고(遺稿) 2권이 집에 전하고 있다. 묘(墓)는 음성공 묘역 우측(서쪽) 아래로 20m~30m를 내려가면 우측 하양공 묘역 뒤편으로 50m~60m 거리에 있는데 임좌(壬坐)이다. 석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고 봉분에도 호석이 없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배계절에는 망주석 한 쌍이 있다. 《參考文獻 : 壬申譜/1992·家譜·陰城郡誌/1979·디지탈한국학 조선조방목》
<정(좌)랑공 김구 묘소>
<정(좌)랑공 김구 묘소 상석>
[김홍미(金弘微)] 조선 중기의 문신 김홍미<金弘微 ; 1557(명종12)∼1604(선조37)>의 자는 창원(昌遠), 호는 성극당(省克堂),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범(範)이고 처부(妻父)는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이다. 조식(曺植)과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5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발탁되고, 홍문관정자·저작(著作), 예문관검열 등을 거쳐 부수찬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형인 홍민(弘敏)과 함께 사림으로 영예를 누렸다.
1589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 뒤 복관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될 무렵에는 경상좌도도사가 되고, 이어 교리 겸 시강원문학을 거쳐 이듬해 경연관·응교·사간·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원균(元均)을 통제사로 삼게 하는데 가담하였다. 그 뒤 좌부승지·훈련도감제조를 거쳐,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승문원부제조 등을 역임하다가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1604년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재난을 당하였다. 이에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굶주린 자의 진휼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상주(尙州)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고 문집 5권씩이 전해진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谿谷集, 德山師友淵源錄》
[겸암선생문집(謙庵先生文集)] 柳雲龍(朝鮮)著. 6卷 年譜 4冊 木板本 31.3×22cm. 四周雙邊 半郭:20.6×16.6cm. 有界 10行 18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附錄으로 {卷1}에는 年譜, {卷2}에는 行狀(1603年 8月 女壻通政大夫前府使金弘微撰, 墓誌(柳成龍撰), 墓碣銘幷序(禮曹判書 李植撰), 祭文 15편(張顯光 등), 謙岩精舍記(17 57年)가 각각 수록되어 있다. ☞ 겸암(謙庵) 유운용(柳雲龍) 행장(行狀)은 사위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께서 지으셨다.
[挽金? : 김구를 조의함] 師門恩契最知心。(사문은계최지심) 스승의 문하에서 은혜로 맺어 그 마음을 잘 알아 行誼平生夙所欽。(행의평생숙소흠) 행동 규범을 평생 우의로 대하여 일찍이 흠모했네. 泉裏相逢應不遠。(천리상봉응불원) 황천에서 서로 만날 날이 멀지 않은데 挽章何必更悲吟。(만장하필경비음) 조의하는 글에 꼭 슬픈 가사만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출전 : 草廬先生文集卷之十 詩》 ☞ 초려(草廬) : 이유태<李惟泰 1607(선조 40)~1684(숙종 10), 호 초려(草廬)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병자호란 후 일체의 벼슬을 거절하고 학문과 후진의 교육에만 몰두하였다. 효종 즉위 후 잠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곧 귀향하여 "기해봉사(己亥封事)"-당시의 국정 전반에 걸친 정치개혁안-을 작성하여 올림. 김집·송시열·송준길·이유태·권시를 충청 오현(忠淸五賢)이라고 함.
2) 김시경(金始慶) 1659년(효종 10) -1735년(영조 11) 자는 선여(善餘)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659년(효종 10, ☞임신보 효종 11년은 오기이다) 기해(己亥) 11월27px일 나시어 1735년(영조 11) 을묘(乙卯) 11월 7일에 돌아가시니 수(壽) 77세이다. 1682년(숙종 8) 임술(壬戌) 24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사마방목, 임신보 및 음성군지에는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증광시(增廣試) 을과5<乙科5-문과방목, 임신보 및 음성군지에는 식년시 을과>로 급제하여 8개 군현의 재(宰)를 지냈다. 그 후 내직으로 옮겨 우승지 겸 춘추관편수관 지제교(右承旨兼春秋館編修官知製敎)에 이르렀다. 증조부(曾祖父)는 좌랑공(佐郞公) 구(?), 조부(祖父) 영희(永熙), 부(父)는 통덕랑공(通德郞公) 두서(斗瑞) 이고, 외조부(外祖父)는 봉산군 이형신(蓬山君 李炯信)이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1659년(효종 11) 기해(己亥) 정월14일에 나시어 1716년(숙종 42)에 부군(夫君)의 관직을 따라서 숙부인(淑夫人)의 직첩을 받았고 1724년(경종 4) 갑진(甲辰) 11월 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66세이다. 두광(斗光-朝鮮朝榜目 ☞壬申譜의 斗先은 오기이다)의 따님이다. 3남1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통덕랑(通德郞) 남일(南一)이고 다음은 종일(鍾一),다음은 수일(壽一)이며, 딸은 목조검(睦祖儉)에게 출가하였는데 사천인(泗川人)이다. 공(公)은 학덕(學德)을 겸비한 학자요 또 보기 드문 청백리(淸白吏)로서 선량(善良)한 백성을 괴롭히는 지방관원의 비위(非違)를 엄하게 척결하여 기강을 세우고 백성들을 열과 성을 다하여 다스리니 숙종 임금도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보고를 접하고 매우 감탄하여 표창장과 함께 후한 상을 하사(下賜)하여 모든 관원의 귀감(龜鑑)으로 삼았다. 공(公)은 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만은집(晩隱集)」8권<☞임신보·음성군지p873>을 남겼다.
묘(墓)는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송정동(송정뿌리)에 있다. 음성공 묘역 아래이며 안동김씨세장지지 비석 위에 있는 두 묘소 중 위쪽이 승지공의 묘소이다. 예전에는 석물이 없었는데 1990년대 사초를 하면서 새롭게 석물을 세워 단장하였다. 봉분은 호석을 둘렀고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배계절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한 쌍씩 서있다. 상석 전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李 人 配 之 諱 東 製 修 秋 旨 使 鐘 氏 全 淑 墓 始 金 敎 ? ? 兼 右 城 ? 州 夫 坐壬 慶 公 安 知 編 春 承 府 《參考文獻: 國朝榜目·壬申譜/1992·家譜·陰城郡誌/1979,甘谷鄕土誌/2003》
[승지공(시경) 연표(年表)] 1659년(효종11) : 기해(己亥) 11월 27px일 生 1682년(숙종 8) : 임술(壬戌) 24세 진사 및 문과급제 1693년(숙종16) : 32세 보령현감, 평안도 도사, 황해도 도사 1712년(숙종38) : 54세 통정대부 종성도호부사 1716년(숙종12) : 58세 밀양도호부사 1722년(경종 2) : 64세 좌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춘추관·수찬관 1724년(경종 4) : 66세 형조참의·지제교 1727px년(영조 3) : 69세 영월도호부사 1834년(영조10) : 76세 우승지 1735년(영조11) : 77세 11월 7일 卒
[金始慶 簡札]
본 간찰(簡札)은 1697년(丁丑) 4월18일에 쓴 김시경(金始慶)의 편지로 2002년12월20일 발용(勃鏞-군사공파)님이 인터넷 경매싸이트인 아트서울에 올라온 것을 소개하여 방손(傍孫)인 윤만(潤萬)이 45px0,000원에 구입하였다. 크기는 : 42.8cm×30.5cm이다. 역문(譯文)과 번역(飜譯)은 항용(恒鏞-제학공파)님에게 부탁하여 제주에 거주하고 계시는 익수(益洙-제학공파)님께서 맡아주셨다.
頃於水閣便中伏承 (경어수각편중복승) 下門書謹審伊時 (하문서근심이시) 萊侍政體神相萬福仰慰不 (래시정체신상만복앙위불) 任區區姪供劇依遣他無足 (임구구질공극의견타무족) 仰喩者凶歲 (앙유자흉세) 撫摩之政非比常年 (무마지정비비상년) 何以敢其苦耶殊用伏慮慮是 (하이감기고야수용복려려시) ?此酷兩麥盡萎公私之憂尤 (재차혹양맥진위공사지우우) 如何也 (여하야) 下勳魚藿等物來人深以見質不 (하훈어곽등물래인심이견질부) 爲傳約此時人心極巧結未信 (위전약차시인심극교결미신) 其必然而然亦可欺以方奈何奈何京? (기필연이연역가기이방내하내하경추) 別無大段可仰者而蒙放諸人還收 (별무대단가앙자이몽방제인환수) 之啓尙未收敎姜尹蔡三人皆死於 (지계상미수교강윤채삼인개사어) 杖下更無濟人 (장하경무제인) 問之端故獄 (문지단고옥) 事等已了尙 (사등이료상) 矣李令?崗 (의이령린강) 有安東府伯鼎 (유안동부백정) 曉旣已辭那李 (효기이사나이) 泊相令亦有呂 (박상령역유여) 牧已赴任了奴 (목이부임료노) 子意以事下去 (자의이사하거) 于平海也故前 (우평해야고전) 修一相使之傳約而未知然旣?習 (수일상사지전약이미지연기혼습) 之弊耶餘萬謹不備伏惟 (지폐야여만근불비복유) 下察謹拜上兼帖 (하찰근배상겸첩) 丁丑四月十八日 從姪金始慶 頓 (정축 4월 18일 종질김시경 돈)
[번역문] 지난번 수각(水閣)편 가운데 삼가 내려주신 글을 받고 삼가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때 동래부사를 모시고 다스리시느라고 몸과 마음이 만복하시다니 삼가 위로가 됩니다. 소임을 못한 못난 조카는 받들기가 어려워져 다른 데로 파견됨에 따라 타일러 주실 사람도 없습니다. 흉년에 (백성을) 무마하는 정치는 평년과는 견줄 수가 없으니, 어떻게 그 괴로움을 감당해야 할는지요. 남다른 방법을 써보아도 이번의 재해가 이처럼 혹독하여 보리가 죄다 시들어 버렸으니 공사 간에 너무 걱정이 되어 어찌해야 될는지 삼가 너무 염려됩니다.
물고기와 미역을 은혜로이 내려주셨는데 보내온 사람, 원(源)이 잃어버렸으니 전달할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요즈음 인심이 아주 묘해서 결국 믿지 못하여 그리 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렇게 또한 방금 속이려드는 데야 어찌하겠습니까. 어찌하겠습니까. 경추(京? : 중앙에서의 추궁)는 아뢸 것이 별로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방면(放免)을 입었으나, 환수(還收)하라는 계(啓)는 아직 교지(敎旨)를 걷지를 않아 강(姜)·윤(尹)·채(蔡) 세 사람은 모두 매를 맞아 죽었는데, 더 믿어 문초할만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옥사(獄事)등은 이미 끝났다고 해야 옳습니다.
이인음(李??) 영감은 안동부백(安東府伯)으로 있다가 바야흐로 깨달아 이미 사직을 했습니다. 저 이박상(李泊相) 영감은 역시 여(呂)목사가 있음에도 부임을 했습니다. 종놈<奴子>이 마침 일 때문에 평해(平海)에 내려가기 때문에 앞에 글 한줄 썼는데 서로 시키는 약속이 전달될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문지기의 폐단에 익숙었을런지요. 나머지 여러 가지 삼가 갖추지 못합니다. 생각건대, 내려 살펴주시기 바라며 삼가 절을 올리는 겸 메모를 하나이다.
정축(丁丑. 1697) 4월 18일 종질(從姪) 김시경(金時慶) 돈수(頓首)
[輓章 金始慶 : 김시경을 조의함] 河嶽凝精德?祥。碩儒才合佐皇王。學窮性理淵源邃。位峻賓師望實彰。選部掌銓明似鑑。 하악응정덕협상。석유재합좌황왕。학궁성리연원수。위준빈사망실창。선부장전명사감。 憲臺論事肅持綱。經綸偉業期商鼎。??嘉猷補舜裳。桑海變遷身歷險。風霜?薄髮勝常。 헌대론사숙지강。경륜위업기상정。보불가유보순상。상해변천신력험。풍상감박발승상。 波淸洛水龍閒臥。日暮雲?鳳忽藏。用舍卽關時否泰。死生俱係道存亡。山頹士抱人萎痛。 파청락수룡한와。일모운소봉홀장。용사즉관시부태。사생구계도존망。산퇴사포인위통。 木稼民含國?傷。今代達尊推大老。異辰餘慶屬諸郞。哀榮不到重泉?。英爽猶看列宿光。 목가민함국췌상。금대달존추대로。이진여경속제랑。애영불도중천비。영상유간렬숙광。 公議簡編終考信。高名宇宙永流芳。庸姿幸遂登門願。和氣曾薰滿室香。?闊向來違奉面。 공의간편종고신。고명우주영류방。용자행수등문원。화기증훈만실향。규활향래위봉면。 幽明此別劇?腸。南阡恨負茅鷄奠。千里緘辭淚滿行。 유명차별극최장。남천한부모계전。천리함사루만행。
물과 산처럼 굳은 정기에 덕은 상서로웠고 큰 선비로 재능에 맞게 임금을 보필했네. 성리(性理)를 깊이 공부하여 근원이 깊고 아득하니 높은 자리에 빈사(賓師 1)로서 실로 우러러 드러내었네. 전랑(銓郞)에 뽑혀서는 거울처럼 맑게 처리하고 사헌부에서 일을 논할 때에는 엄숙하고 강직했네. 경륜과 훌륭한 업적은 상(商 2)나라에 알맞고 아름답게 수놓은(3) 훌륭한 계책은 순(舜)임금보다 나았네. 상전벽해의 변천을 험난하게 몸소 겪고 바람서리에 모질게 흔들려도 머리털 하나 끄떡 않더니 한강 물 물결 맑아 와룡(臥龍 4)이 한가하고 구름 낀 하늘에 해지는데 봉황이 홀연히 숨었네. 쓰고 버림이 곧 닫히면서 시대가 태평치 않아 생사에 모두 걸려 존망(存亡)을 말하는데 산이 무너지고 선비는 내팽겨져 사람들이 애통해하고 나뭇가지가 얼어붙고(木稼 5) 백성은 원한을 품어 나라는 초췌하게 시들어갔네. 이제 와선 모든 사람이 존귀하게 여기고 큰 어른으로 추대하니 훗날 여경(餘慶 6)이 전랑에게 돌아가건만 슬픔과 영광은 깊은 저승에도 도달하지 않으니 뛰어난 용모와 깨끗함은 벌려선 성좌의 별빛처럼 보이네. 여론이 되었던 편지와 글들 마침내 고증하여 믿으리니 높은 명성 세상에 영원히 전하여 향기 뿜으며 떳떳한 자태 행여 궁궐 문에 오르는 소원 이루어지면 화기(和氣)가 일찍 훈훈하게 방안에 가득 향기뿜으리. 눈 부릅뜨고 멀리서 오실 적에 얼굴보기에 어긋나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이제 헤어지자니 창자를 에이는데 남쪽 두둑 길에 한을 지고가 모사 술잔을 올리리(茅鷄 7). 천리 밖 함사(緘辭 8)에 가는 길마다 눈물이 가득하네.
1) 賓師(빈사) : 높은 관직에 있으며 임금의 존중을 받는 사람. 2) 商鼎(상정) : 상(商)나라의 조정을 말하며 김시경을 伊尹(이윤)에 비기고 있음. 3) ??(보불) : 옷에 아름답게 수를 놓음. 4) 臥龍(와룡) : 은거하거나 재능을 나타나지 않은 인재에 비유. 5) 木稼(목가) : 나뭇가지에 내린 비나 눈이 얼어붙은 것. 6) 餘慶(여경) : 선조의 덕을 베풂이 자손에게 경사가 오는 것. 7) 茅鷄(모계) : 茅砂(모사)와 계이(鷄伊)로 모사는 혼백, 계이는 술잔을 뜻하며 모두 제사에 쓰이는 도구이다. 8) 緘辭(함사) : 관원의 잘못됨을 묻는 글에 답함. 여기서는 변명하는 말이나 弔辭(조사)의 뜻. 《출전 : 葛庵先生文集附錄卷之五 [輓章]》
☞ 갈암(葛庵) : 이현일<李玄逸, 1627px(인조 5)~1704숙종 30)>.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숙종 때 공조참의, 예조참판,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올랐다. 고위직에 있었음에도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조선조 유일의 ‘여성君子’로 불리우는 貞夫人 안동 張씨가 그의 어머니시다.
[輓詞 侍敎生金始慶] 神仙秀格士林魁。玉鏡氷壺絶點埃。閒趣一生山水癖。眞源千古洛濂來。?瓢樂裕身常逸。 신선수격사림괴。옥경빙호절점애。한취일생산수벽。진원천고락렴래。안표악유신상일。 湯幣誠勤志不回。八十全歸公豈憾。可憐吾道落泉臺。 탕폐성근지불회。팔십전귀공기감。가련오도락천대。 ??樂道臥丘園。宿望儒林世所尊。八?崇資仁者壽。一生純孝行之源。云亡士抱?樑痛。 효효악도와구원。숙망유림세소존。팔질숭자인자수。일생순효행지원。운망사포최량통。 得正人欽易?言。蟾嶽揷靑江月白。?應千載典型存。 득정인흠역책언。섬악삽청강월백。지응천재전형존。
신선처럼 빼어난 품격 사림(士林)의 우두머리 옥거울 수정항아리처럼 티끌 한점 없어라. 한가한 취향과 일평생 산과 물을 즐긴 성벽 참 근본은 옛날의 낙렴(洛濂 1)에서 유래되었네. 안회(顔回)의 표주박 물로도 즐긴 여유 몸은 항상 한가하고 탕(湯) 임금의 폐백으로 2) 성실히 힘쓰고 뜻을 굽히지 않다가 80에 돌아가시니 누가 공(公)보고 한이 있다 하겠소만 우리의 도(道)가 저승에 떨어진게 가련할 뿐이라오. 차득하며 도(道)를 즐기며 언덕에 누우니 유림(儒林)에 오래 쌓아온 명망 3) 세상에서 귀히 여겨 80 나이 높은 품계 어진이로 장수함은 평생의 깨끗한 효성 행동의 근원으로 삼았음이네. 죽은 선비를 생각하며 말하자니 기둥 부여잡고 마음아파 죽음이 임박했을 때 4)의 말 진실로 남의 흠모를 받았네. 섬악(蟾嶽 5)이 꽂히고 푸른 강에 달빛 밝듯 다만 천년을 전형(典型)으로 응당 남으리.
1) 洛濂(낙렴) : 정호(程顥, 1032~1085)·정이(程, 1033~1107)형제의 낙학(洛學)과 주돈이(周敦, 1017~1073)의 염계학(濂溪學) 2) 湯幣(탕폐) : 탕(湯) 임금이 이윤(伊尹)을 초빙할 때 폐백을 준 고사로서 맹자에 나온다. 이윤(伊尹)은 은나라 탕왕을 도운 명재상으로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고 살면서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여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니면 천하를 녹으로 준다하더라도 돌아다보지 않았고,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니면 한 오라기의 풀도 남에게 주지 않고 한 오라기의 풀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탕왕이 사람을 시켜 폐백을 보내 그를 초빙하니 태연하게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탕왕의 초빙하는 폐백을 받겠는가? 내가 어찌 밭 가운데 살면서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는 것과 같겠는가?"하였다. 탕이 세 번이나 사람을 시켜 초빙하니 그때야 태도를 바꾸고서 말하기를 "내가 밭 가운데 살면서 이렇게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는 것이 어찌 이 임금을 요순의 임금으로 만들게 하는 것과 같겠으며 이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들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내가 어찌 몸소 직접 보는 것과 같겠는가?····· 내가 그들을 일깨워 주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출사하였다. 3) 宿望(숙망) : 오래 쌓은 명성. 4) 易?(역적) : 죽음이 임박함. 5) 蟾嶽(섬악) : 섬자가 붙은 산이름. 《출전 : 愚潭先生文集卷之十二 附錄》 ☞ 우담(愚潭) : 정시한<丁時翰, 1625(인조 3)~1707(숙종 33)> 본관 나주(羅州). 자 군익(君翊). 호 우담(愚潭). 독학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원주(原州)에 은거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의(執義) ·사업(司業)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뒤에 진선(進善)에 올라 1691년(숙종 17) 앞서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킨 일을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가 삭직,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96년 희빈(禧賓) 장(張)씨의 강호(降號)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당파를 초월하여 자기 소신을 밝혔다. 1704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정약용(丁若鏞) ·이익(李瀷)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주의 광암사(廣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술에 《우담집》을 비롯하여 《산중일기》·《임오록(壬午錄)》·《관규록(管窺錄)》·《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送關西亞使金始慶 : 관서부사 김시경을 보내며] 秋風馹馬度關山。幕佐今年亦好官。州妓慣飢腰轉細。校生停講務尤閑。珍羞美酒供雖?。 추풍일마도관산。막좌금년역호관。주기관기요전세。교생정강무우한。진수미주공수겸。 快閣名樓過自看。倦?愁呻皆可韻。錦囊詩律不須?。 쾌각명루과자간。권위수신개가운。금낭시률불수산。
가을 바람에 역마는 관산(關山 1)을 지나는데 금년의 막료(幕僚) 또한 훌륭한 관원 고을의 기생은 의례히 굶주려 허리가 더 가늘어지고 교생(校生)들은 글 읽기를 쉬니 더욱 한가하리. 진수성찬에 향기로운 술을 탐하지 않으며 장쾌하고 이름난 누각 지나가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고달픈 한 숨 수심 찬 신음 모두가 시가 되어 금낭(錦囊 2)의 시율(詩律)이 한 권 책이 되지 않으랴. 1) 關山(관산) : 요새에 있는 산 2) 錦囊(금낭) : 비단주머니. 훌륭한 시의 뜻. 당의 시인 이하(李賀)가 좋은 시를 지을 때마다 비단주머니에 넣었다. 《출전 : 游齋先生集卷之十一 閑居錄丁丑還京以後作》 ☞ 유재(游齋) : 이현석<李玄錫, 1647(인조 25)∼1703(숙종39)> 자는 하서(夏瑞), 호는 유재(遊齋), 시호는 문목(文穆), 증조부는 수광(●光), 조부는 성구(聖求), 상규(尙揆)의 아들. 1667년(현종 8) 진사(進士)가 되고 1675년(숙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에 보직된 뒤, 3사(3司)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682년 우승지(右承旨), 1688년 동래부사(東萊府使),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 169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1693년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등을 거쳐 1697년 우참찬(右參贊), 1700년(숙종26)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글씨에 뛰어났다. 안풍군 백곡 김득신의 묘비를 서(書)하였다.
[신장(?章 ; ☞전별하는 글) 승지 김시경 선여(金始慶善餘)] 殊方專對仗才猷 / 전권사신은 재주와 꾀를 갖춰야 하는 것 妙選湖堂第一流 / 묘하게도 호당주(주1)의 첫째 인물 뽑았네 使節曉辭天北極 / 사절이 새벽에 임금께 하직하니 文星夜照日東? / 문창성이 밤에 일본 땅에 비치네 ?頭帝女支機石 / 뱃머리는 상제 딸의 베틀 괴던 돌을 향하고 帆外童男採藥洲 / 돛대 밖은 진 나라 동자들의 약 캐던 섬일세 領略海山千萬景 / 산과 바다 천만 경치를 다 거둬 와서 歸來爲我說奇遊 / 나를 위해 그 이야기 들려 주게나 王事驅馳夕飮氷 / 왕사에 분주하여 저녁에 얼음을 마시는데(주2) 異鄕離恨浩難勝 / 타향에 이별의 한 이루 다 견디기 어려우리 當朝望重詩三百 / 온 조정의 덕망이 무거우니 시가 삼백 편이고 許國身輕海萬層 / 나라에 바친 몸이 가벼우니 바다가 만층일세 波送一帆經對馬 / 물결은 돛대를 보내 대마도를 지나는데 風?六月?騫鵬 / 바람은 유월을 장식해 건붕에 대이도다 奇遊最是平生冠 / 이번의 그 행차는 평생에 으뜸이라 快覩扶桑曉日昇 / 쾌히 부상에 뜨는 새벽 해를 보리 承旨金始慶善餘。 주1) 호당 : 독서당(讀書堂)의 별칭. 본서의 저자인 임수간(任守幹)이 일찍이 여기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사람이므로 한 말. 주2) 얼음을 마시는데 : 음빙(飮氷)은 ① 얼음을 먹음. 마음이 불안 초조함의 비유. ② 관리가 나라를 위하여 애태움. ③ 곤궁하면서도 깨끗한 절조를 지킴. 《출전 : 동사일기 곤(東?日記坤), 둔와부군(遯窩府君)이 일본에 사신갈 때의 신장(?章) 신묘년(1711, 숙종 37) 》
☞ 둔와(遯窩) : 임수간<任守幹 1665(현종 6)∼1721(경종 1)> 본관 풍천(佯川). 자 용예(用譽). 호 둔와(遯窩). 1690년(숙종 16) 생원, 16
[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 ○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79호 ○ 명 칭 :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 ○ 분 류 : 석비 ○ 수 량 : 1기 ○ 지정일 : 1978.11.10 ○ 소재지 : 경기 안성시 낙원동 609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안성시
조선 후기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오명항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오명항(1673∼1728) 선생은 숙종 31년(1705)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평안도 관찰사·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판의금부사로서 죽산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난을 토벌하였다. 그 공로로 분무공신 1등으로 해은부원군에 봉하여졌고 우찬성·우의정에 승진되었다. 비는 네모진 받침 위에 위가 둥글게 처리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비몸에는 앞 ·뒤 ·옆면 모두에 글씨를 새겼다. 앞면 비문은 조형명이 짓고 박문수가 썼으며 뒷면은 토벌에 참가했던 장수·군졸 등의 인적사항을 김시경의 글씨로 새겼다. 오른쪽 옆면은 군수민제장을 비롯하여 공을 세운 안성관원의 명단이 적혀 있다. 영조 20년(1744) 안성의 군관민들이 세운 것으로, 원래 안성읍 동본동에 있던 것을 1969년 지금의 안성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출처 :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홈페이지》
3) 김계(金棨) 1585(선조18)-1630(숙종8). (2007. 9. 2. 윤만(문) 제공) 進士公 金棨(진사공 김계) 자는 신보(信甫)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 을유<宣祖乙酉 : 1585년(선조 18) ☞壬申譜의 1558년은 오기이다>에 나시어 1630년(숙종 8) 경오(庚午) 12월 초1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46px세(☞壬申譜의 壽 73세는 생년 1558년의 오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또한 오기이다)이다. 1613년(광해군 5) 계축(癸丑)에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등제(登第)하여 진사(進士-음성군지 생원·진사록)가 되었고 광해조에서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증조부(曾祖父)는 병사공(兵使公) 윤종(胤宗)·조부(祖父)는 음성공(陰城公) 진강(震綱)·부(父)는 상촌(桑村) 입향조(入鄕祖) 하양공(河陽公) 대화(大澕)·외조부(外祖父)는 전주인 이양형(李陽亨)이다.
배(配)는 공인(恭人) 밀양변씨(密陽卞氏)이며 1589년(선조 22) 기축(己丑) 정월에 나시어 1619년(광해군 11) 기미(己未-근거:家譜) 6월1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31세이다.<☞壬申譜에 ‘효종 6년(1655) 을미(乙未) 6월17일 卒 墓附 壽 67歲’이란 기록이 있는데 아드님 영희(1622)·영후(1627px)의 생년을 고려해 볼 때 家譜기록이 오기인 듯하다> 증 참판(贈參判) 건원(乾元)의 따님이요, 주부(主簿) 증승지(贈承旨) 희전(希銓)의 손(孫)이며, 군수(郡守) 응몽(應夢)의 증손(曾孫)이요, 만호(萬戶) 순천(順天) 김침(金琛)의 외손(外孫)이다. 2남4녀를 길렀는데 맏이 영희(永熙)는 백형(伯兄) 구(榘)의 아들이 되었고 다음은 영후(永煦)이며, 딸은 정수(鄭脩)(☞家譜 원본에는 修가아닌 脩로 壬申譜 및 藥泉集第二十六 家乘을 근거로 脩가 바름, 壬申譜의 李脩는 鄭脩의 오기이다)에게 출가하였는데 동래인(東萊人)이요, 문과(文科)하여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다음은 조형(趙鎣)에게 출가하였는데 한양인(漢陽人)이며, 다음은 권협(權鋏)에게 출가하였는데 안동인(安東人)이며, 다음은 김호(金灝)에게 출가하였는데 경주인(慶州人)이요 진사(進士)이다. 측실(側室)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영훈(永薰)이다.
묘(墓)는 助桑里壬坐(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송정뿌리 우측 산록)에 있었다. 이 산록(山麓)에는 계(棨) 할아버지 묘역을 기준으로 좌(동)측으로 손자이신 익서(翼瑞)공의 묘역, 아래에는 차자(次子)이신 영후(永煦)공의 묘역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정인(鼎仁)공의 묘역이 있다. 1998년 3월21일 사초를 하면서 새롭게 석물을 세워 단장하였었는데 봉분은 호석을 둘렀고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었다. 사초할 당시 옛 상석은 새로운 상석 받침대로 썼다. 상석 전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는데 유학(幼學)이 아닌 진사(進士)가 바른 표기가 아닌가 한다.
▣ 변삼근(卞三近) ▣ 변삼근[선조 12년(1579)~ ]. 자는 성지(誠之) 본관은 밀양이다. 부는 건원(乾元), 조부 희전(希銓) 증조 응몽(應夢) 외조 김침(金琛) 처부 윤희(尹禧)·윤붕(尹鵬)·이온(李蘊)이다. 1606년 병오에 생원이 되고, 광해군 3년(신해 1611)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참판에 이르렀다.《출처 : 조선조방목》 따라서 진사공 계(棨)의 배위 밀양변씨는 참판 변삼근(卞三近)의 여동생이다.
▣ 정수(鄭脩) ▣ 정수(鄭脩)는 광해군 1년(1609) 생으로 자는 공신(公愼), 동래인(東萊人)이다. 부는 정세미(鄭世美), 조부 정협(鄭協), 증조 정언신(鄭彦信), 외조 이상의(李尙毅), 처부는 이무림·김계(李茂林·金棨)이다. 2녀2남을 두었는데 장녀는 의령인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에게, 차녀는 함평인 정랑 이정만(李庭萬)에게, 아들은 승지 정래상(鄭來祥), 현감 정지상(鄭至祥)이고, 형은 승지 정유(鄭攸)이다. 효종 1년(경인, 1650) 증광시 을과2(乙科2)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하였다.
▣ 정언신(鄭彦信) ▣ 철원부사공 김확[金矱, 선조 5년(1572)~인조 11년(1633)]의 배위가 정언신의 따님이고, 정언신의 증손 정수(鄭脩)의 배위가 김확의 6촌 동생 김계[金棨, 선조 18년(1585)~인조 8년(1630)]의 따님으로 정수의 배위 안동김씨는 재당숙모인 동래정씨의 중매로 혼인을 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결국 친정의 재당숙모가 시가로는 대고모가 되는 것이다.
정언신(鄭彦信)은 중종 22년(1527px)∼선조 24년(159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이다. 슬하에 4남5녀를 두었는데 이조판서 정혐(鄭協), 정율(鄭慄), 전주인 이효삼(李孝參), 의령인 남이준(南以俊), 안동인 김확(金矱), 이경인(李敬仁), 청해인 이중로(李重老), 정관(鄭慣), 정박(鄭박)을 두었다.
명종 21년(156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선조 4년(1571)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전라도도사·장령·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선조 16년(1582)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선조 22년(1589)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하였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 뒤 역가문서(逆家文書)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23년(1599)에 복관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 정협(鄭協)▣ 명종 16년(1561)∼광해군 3년(161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화백(和伯), 호는 한천(寒泉). 우의정 언신(彦信)의 아들이다. 선조 21년(1588) 식년문과에 급제, 검열·정자를 지냈다. 선조 22년(1589) 아버지가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은 뒤로는 미관말직으로 전전하다가 선조 32년(1599) 아버지가 신원(伸寃)되자, 검상에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보덕·수찬·헌납·장령·사인·판교·사간·부응교·응교·사예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38년(1605)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동지중추부사·대사간 등을 지내고, 광해군 즉위년(1608)에 이조참판·좌부빈객·대사헌·대사간·부제학·예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이듬해 동지춘추관사·예조참판·이조판서가 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앞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역대실록을 중간할 때에는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시주를 즐기고, 노소현우를 가리지 않고 교유하였다고 한다.
▣ 정세미(鄭世美) ▣ 선조 16년(1583)∼인조 2년(1624).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와(東窩). 참판 협(協)의 아들이다. 선조 39년(1606) 진사가 되고, 2년 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도사가 되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을 당시 호남의 유생 고경리(高敬履)가 성혼(成渾)이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의 4현(賢)의 도를 이어 받아 정주학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신원을 청할 때, 이언적(李彦迪)을 논외로 함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깎아내리는 처사라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광해군 3년(1611) 수찬을 거쳐 정언·도호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 이상의(李尙毅) ▣ 명종 15년(1560)∼인조 2년(1624).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소릉(少陵), 사재감첨정 우인(友仁)의 아들이다. 선조 18년(1585)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선조 32년(1602) 이조참판, 이듬해 성천부사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리고 학교를 크게 일으켜서 지금까지 그 고을에서 한명도 내지 못했던 소과 합격자를 냄으로써 학구열을 불러일으켰다. 1606년 중앙으로 다시 올라와 성균관대사성·도승지·형조판서를 거쳐 광해군 1년(1609)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록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져 공조판서가 되었고, 1616년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다. 광해군 10년(1618) 좌찬성에 올라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위성공신이 혁파되어 훈봉이 삭탈되고 1품계가 강등되는 동시에 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소릉집 少陵集》이 있다. 뒤에 선조조의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 남구만(南九萬) ▣ 남구만(南九萬)은 정수(鄭脩)의 큰 사위로 김계(金棨)의 외손녀 사위가 되는데 이무림의 외손녀 사위일 수도 있기 때문에 좀더 고찰이 필요하다. 인조 7년(1629)∼숙종 37년(1711).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령 일성(一星)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 효종 2년(1651) 진사시에 합격하고, 효종 7년(165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전적·사서·문학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효종 10년(1659) 홍문록에 오르고 바로 교리에 임명되었다. 현종 1년(1660) 이조정랑, 이어 집의·응교·사인·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1668년 안변부사·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62년에는 영남에 어사로 나가 진휼사업을 벌였다.
현종 15년(1674) 함경도관찰사로서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하였다. 숙종 초 대사성·형조판서를 거쳐 숙종 5년(1679) 좌윤이 되었으며, 같은 해 윤휴(尹鑴)·허견(許堅)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1680년과 1683년 두 차례 대제학에 올랐다. 병조판서가 되어 폐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무창(茂昌)·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軍政)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하였다. 숙종 10년(1684)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숙종 13년(1687) 영의정에 올랐다. 이즈음 송시열(宋時烈)의 훈척비호를 공격하는 소장파를 주도하여 소론(少論)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숙종 20년(1694)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숙종 27px년(1701)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에 대하여 중형을 주장하는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의 사사를 결정하자 사직, 낙향하였다. 그 뒤 부처(付處)·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서용되었으나, 숙종 33년(1707)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당시 정치운영의 중심인물로서 정치·경제·형정·군정·인재등용·의례(儀禮) 등 국정전반에 걸쳐 경륜을 폈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 뛰어나 책문(冊文)·반교문(頒敎文)·묘지명 등을 많이 썼다. 또한,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남기고 있다.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숙종 묘정(廟庭)에 배향,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鐘山書院), 무산(茂山)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천집》·《주역참동계주 周易參同契註》가 전한다. 글씨로는 좌상남지비(左相南智碑), 찬성장현광비(贊成張顯光碑), 개심사(開心寺)·양화루(兩花樓)·영송루(迎送樓)의 액자를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 김복인(金腹仁) 1737년(영조 13) --1793년(정조 17) 자(字)는 덕승(德承), 호(號)는 양산재(兩山齋) 안동인이다. 문온공(文溫公) 척약재(?若齋) 구용(九容)의 15세손으로 1737년(영조 13) 정사(丁巳) 윤9월19일 생, 1793년(정조 17) 계축(癸丑) 9월20일 57세에 졸(卒)하시다. 1771년(영조 37) 신묘(辛卯)에 진사(進士), 1785년(정조 9) 을사(乙巳)에 정시(庭試) 병과3(丙科3)에 장원급제, 관직은 주서(注書)·전적(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이조정랑(吏曹正郞)·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증조부(曾祖父)는 승지공(承旨公) 시경(始慶)·조부(祖父)는 통덕랑(通德郞) 남일(南一)·부(父)는 통덕랑(通德郞) 희원(喜遠)·외조부(外祖父) 최경기(崔慶基)이다
배(配)는 진사(進士) 무경(懋敬)의 따님이신 숙인(淑人) 사천목씨(泗川睦氏)로 1733년(영조 9) 계축(癸丑)에 나시어 1757년(영조 33) 정축(丁丑) 7월10일 향년 25세에 돌아가시다. 계배(繼配)는 용(鏞)의 따님이신 숙인(淑人) 경주이씨(慶州李氏)로 1738년(영조 14) 무오(戊午) 6월 9일에 나시어 1771년(영조 47 ☞임신보의 42년은 오기이다) 신묘(辛卯) 5월12일 향년 34세에 돌아가시다.
공(公)은 정조 9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니 그 문장의 훌륭함에 왕이 감탄하여 대학(大學)등 사서(四書)와 은배(銀杯)등을 하사(下賜)하여 치하하고 벼슬을 내리니 주서(注書)에서 하루 동안에 전적(典籍)·병조정랑(兵曹正郞)·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세 번 승진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벼슬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르렀을 때 영의정(領議政) 채제공(蔡濟恭)이 지성껏 왕을 보필하여 많은 업적을 이루어 왕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시기한 서인(西人)들이 모함하니 그 기세가 두려워서 채영상(蔡領相)을 변호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공이 개탄(慨歎)하여 홀로 세 번이나 상소(上疏)하니 영남(嶺南) 유생(儒生)들이 이에 용기를 얻어 만인소(萬人疏)를 올리니 정조께서는 매우 기뻐하시어 채영상(蔡領相)을 더욱 신임하게 되어 세상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않았다. 공(公)은 또 학식이 높아 당시의 석학(碩學) 정다산(丁茶山)도 사십인(四十人) 거유(巨儒) 중에 으뜸이라고 극찬하였다.
묘(墓)는 골안 산록(山麓) 선영(先塋) 묘역 하의 간좌(艮坐)이며 합분(合墳)이다. 1990년대 사초를 하면서 모든 석물을 새롭게 단장하였는데 봉분은 호석을 둘렀고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상석은 걸방석과 2개의 고석으로 받쳐져 있다. 배계절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한 쌍씩 있다.
《參考文獻 : ·壬申譜/1992·家譜·朝鮮朝放牧》
[송동(宋洞)에서 꽃구경하며 지은 시의 서]
- 갑진년(1784) 봄에 지음 - 갑진년(정조 8, 1784) 봄에 내가(☞주 : 다산 정약용)태학(太學)에서 유학(遊學)하였는데, 그때 주상이 모든 유생(儒生)들을 권장하여 유생들의 사조(詞藻 시문을 짓는 재능)가 날로 진는데, 한 글자의 포상(褒賞)이라도 입은사람은 모두 다 와서 서로 추종하니, 모두 30여 인이다. 그 중에 한석민(韓錫敏)ㆍ한석륜(韓錫倫)ㆍ김수신(金秀臣)ㆍ강현영(姜취하고 상사(賞賜)가 풍성하였으니, 김복인(金復仁)ㆍ홍의호(洪義浩) 같은 이가 특히 크게 이름을 떨쳤다. 때로 반궁(泮宮 성균관의 별칭)의 숲 속에서 함께 모여 놀았顯永)ㆍ이기경(李基慶)ㆍ홍낙흠(洪樂欽)ㆍ한치응(韓致應) 등이 특히 드러난 사람이고, 나는 나이 가장 적은 자로서 늘 과분하게 제공(諸公)의 추허(推許)를 받았다.
하루는 제공이 서로 이끌고 송동(宋洞 주1)에 갔는데, 그때 살구꽃이 활짝 피고, 시냇가에는 버들 빛이 짙푸르렀다. 소나무 그늘 밑에 벌여 앉아 담소하며 즐기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선비의 놀이가 사치스러운 것은 마땅치 않으나, 술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들이 나라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상으로 받은 종이와 붓이 많을 것이니, 각기 종이 약간씩을 가져다가 추렴하여 한 차례 마시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소."하니,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술이 이르자 드디어 나이 차례로 마시는데, 내가 술잔을 잡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오늘 이 술은 임금께서 주신 것이니, 각기 시 한 수씩을 지어서 우리 성상께서 우리를 도야(陶冶)하고 성취시켜 주신 은혜를 칭송하지 아니하겠습니까?"하였더니,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였다. 시가 이루어지자, 제공이 나에게 서문 짓기를 부탁하였다. 《출전 : 다산시문집 제13권 서 序》
☞주1 : 송동(宋洞)은 명륜동1·2가와 혜화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우암 송시열이 살았던 집 부근의 마을이라 해서 붙여졌다.
[태학에서 시 십운을 지으신 김복인 (金復仁)ㆍ김수신(金秀臣)] 여름날 태학에서 임금의 명에 따라 전을 올리고 종이와 먹을 하사받았다. 제생은 함께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성은을 기리고 아울러 시 십운을 지었다[夏日太學 應敎進箋 蒙賜紙墨 諸生共辦酒饌以昭聖惠 仍述十韻] 이때 김복인(金復仁)ㆍ심봉석(沈鳳錫)ㆍ한석민(韓錫敏)ㆍ한석륜(韓錫倫)ㆍ김수신(金秀臣)ㆍ이기경(李基慶)ㆍ홍의호(洪義浩)ㆍ한치응(韓致應)ㆍ홍낙흠(洪樂欽) 등 제공이 함께 참여하였다.
태학의 선비 배출 성황 이루고 / ?舍賓興盛 우리 임금 은사품 새로웁다네 / ??寵賚新 품평한 글월 모두 어필이라면 / 品題皆御筆 장려하는 유시는 한림의 솜씨 / ?諭必詞臣 찬란한 주사 친필 높이 받들고 / ?璨擎?批 분주하게 유생들 모이었는데 / ??聚?巾 순화 때의 깨끗한 종이 쌓였고 / 紙堆淳化潔 수양매월 검은 먹 포개어 있네 / 煤疊首陽陳 하찮은 문장 기예 부끄러운데 / 薄技羞雕篆 은혜 말씀 선비들 감동시켰네 / 恩言聳搢紳 넓은 은택 골고루 끼치셨기에 / 均沾由澤普 환호 칭송 진심에 우러나오지 / 歡頌出情眞 유학한 자 준수한 선비 많은데 / 游學多?士 게다가 한 재실에 벗들도 있어 / 同齋況故人 술 사오니 홍로주 향그롭고요 / 酒?紅露馥 외 가르니 수정이 진기하여라 / 瓜劈水精珍 해학 속에 무더운 여름을 잊고 / 談謔凌朱夏 우러르는 마음은 대궐 향하네 / 瞻依近紫宸 보살피심 미천한 몸에 미치니 / 生成逮菲質 무얼로 임의 사랑 보답할 건고 / 何以答君仁 《출전 : 다산시문집 제1권, 시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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