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5) 금수단과 가양리 선영 벌초 (2004. 9. 1. 윤식(문) 제공)
지난 일요일(2004년 8월 26일) 문온공파 금수단 및 가양리 선영 벌초가 있었습니다. 문온공파 맏집인 직제학공계 별제공종회 일가분들께서 노고가 크셨습니다. 매년 벌초와 함께 별제공종회 정기총회가 열립니다. 막내집 사인공계 할아버지 묘소는 두 분상이라 별제공종회 일가분들께 송구하기만 합니다. 이 날 군사공파 발용 대부님께서도 참여해 주셨습니다. 감사 말씀 올립니다.
벌초를 마치고 시원한 강바람 솔솔 부는 금수정에 누워 까빡 졸았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금부도사공(휘 대섭) 할아버지 묘소에 참배하였습니다. 두 번째 가 본 곳인데 또 가 보고 싶은 곳입니다. 묘하에 살고 계시는 유만 대부님 댁에서 구경하기 힘든 23도짜리 참이슬과 한여름날 장작불로 만들어 주신 수제비 푸짐하게 먹고 왔습니다. -"쉼터라고 생각하고 근처에 들르실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다른 건 몰라도 수제비와 시원한 음료는 늘 있습니다." 라고 하시던 대모님 정겨운 말씀에 정이 소록소록 솟습니다.
사인공계 영기 종친
문온공파종회 부회장 겸 총무이사 영환 종친
영환 종친과 군사공파 발용 종친
직제학공계 음성공종회 윤만 종친
사인공계 영성 종친 아들
사인공계 영성 종친
사인공(휘 계우) 할아버지 설단과 장사랑공(휘 자숙) 할아버지 묘소
금수단의 안동김씨세천비와 금수정 인근을 벌초 중인 별제공종회 일가분들
별제공종회 정기총회
뒤쪽 비석이 봉래 양사언 선생 시비
별제공종회 도만 회장님과 광열 총무이사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음식 준비하시느라 애쓰시는 안동김씨 며느님들
척약재(휘 구용) 할아버지 시비
금수정 절벽 아래 큰 바위에 새겨진 <무릉>
영평 8경 중 제1경인 금수정 앞 영평천 수중 바위에 새겨진 암각문 <경도> - 이 암각문은 <부도>라는 설도 있습니다.
한 말 술이 들어간다는 <준암> -옛날 말이 무척 컸나 봅니다. 한 말이 아니라 서 말은 들어갈 정도로 웅덩이가 크고 깊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준암>
증금옹시 - 봉래 선생이 초서체로 쓴 글씨가 참 멋집니다. - 영환 종친 말씀으로는 '금옹'이란 분이 누구 호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금수정과 관련이 깊은 분으로 이분을 밝혀내면 금수정과 관련된 여러 가지가 새로이 발굴되는 셈입니다. 우리 문중 자료 보실 때, 눈여겨 봐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영환 대부님 말씀으로는 <금옹(琴翁)>이 어느 분이신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서 무척 궁금해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포천군지(522쪽)에는 <금옹(琴翁) 김윤복(金胤福)>이라 적혀 있습니다. 오늘 다른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내용이라 상세한 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호보(號譜)>에도 <금옹>이란 분은 기록돼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포천군지를 쓴 분은 이 내용을 어디서 찾았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포천군지에서 말하는 <금옹 김윤복>은 문온공파 선조님으로 청도군수공(휘 예생) 할아버지의 셋째 아드님이십니다. 청도군수공은 일전에 윤만 대부님께서 소개한 것처럼 예안현감 시절 충렬공 할아버지 비석을 개수하신 그 할아버지이십니다.
◈문온공(휘 구용) → 2子 부사공(휘 명리) → 1子 직제학공(휘 맹헌) → 2子 참의공(휘 자양) → 1子 청도군수공(휘 예생) → 1子 윤종, 2子 윤선, 3子 윤복
다음은 포천군지에 수록된 관련 내용입니다. <자료 6> 연화암상 암각문(蓮花巖上 巖刻文) - 증금옹(贈琴翁) 시 <자료 6>의 글씨 하나의 크기는 13.5cm×19cm이다. 초서체로 쓰여 있다. 금수정의 주인인 금옹(琴翁) 김윤복(金胤福)에게 준 시작품 원본을 그대로 각자했을 개연성이 있다. 이 자료를 번역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綠綺琴伯牙心 녹기금 백아의 마음 種子是知音 종자기가 바로 지음을 하는구려 一鼓復一音 한 번 타고 다시 한 번 읊노라니 冷冷虛籟起遙岑 허뢰는 선들선들 먼 봉우리서 일어나고 江月연연江水深 강가의 달은 곱디곱고 강물은 깊고깊네 *연 : 女+員
이 자료는 예로부터 여러 문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자료이다. 그만큼 문헌자료도 풍부하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 “금수정의 돌에 새긴 시는 다음과 같다.……나는 이곳에서 노닌 지가 이미 수십여 년이 지났는데, 몽상이 오히려 괴롭다.(金水亭石刻詩云, 余昔遊此地 已閤數十餘年 而夢想猶勞)”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이처럼 옛 문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졌으나, 연화암 윗부분에 각자하였기 때문에 멀리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물에 휩쓸려 심하게 마멸되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접할 수 없는 자료이다
금수정 앞 영평천의 바위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