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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상락군공(上洛君公-휘 昴)
가)영단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금수단)
나)영단 묘비문
부군의 관은 안동이요, 휘는 昴이니 관은 고려국 숭정대부중대광중서시랑평장사 의정부 찬성사요, 상락군의 치사하였다. 고조는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병부상서 한림학사 휘 孝仁이요, 증조는 선충현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중대광 상낙군 개국공 첨위령 시충렬 휘 方慶이며, 조는 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 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 휘 小宣 이요, 考는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도첨이정정승 영창군 치사 휘 承澤이시다. 부군께서는 서기 1315년 1월 신유에 대과 방안랑에 등제하시니 천품이 박학호문 자혜애민 하고 견방공덕 법도계리 하며 이정지화 유덕안중하고 경신고명 온양호학 하시었으니 공사가 천덕하시고 제자 예우는 공손히 외경존중하여 환대교우하시니 세인들의 많은 존경을 받으시었다. 배는 삼한국부인 여흥 민씨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연관 대제학 시 문온공 호 及菴 휘 思平之女요, 祖는 판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대사헌 여흥군 시 문순공 휘 적이며, 증조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복창군 시 충순공 휘 종유요, 외조는 도첨의정승 시 정렬공 언양김공 윤이다. 친정과 외가가 모두 혁연하여 일국이 두루 숭무하는 명가의 출생하시어 부도를 익히시었으니 그 자녀서들은 자당의 법도를 본받아 환중일지라도 조석문안을 궐하지 않고 부모의 효를 다 하였었다. 급암 선생은 무남 절손 하시었으나 출가지녀 여흥 민씨께서는 생 男三九女하였으니 장자가 吾파조 문온공 휘 구용이요, 차자는 중의대부 중서병부랑 중겸 첨서하남북등처행 추밀사로서 종질인 밀직사사 부사공 휘 정등과 모주신돈하다 사괴로 역살당한 자 중현 휘 제안이니, 그 독자인 휘 부를 시조로 하여 사천 김씨로 분권하였다. 말자는 강원도 관찰사 참지의정부사 한성판율하고 딸이 태종의 명빈으로 입궁한 판돈녕부사 시 안정공 휘 구덕이라. 차계가 안정공파이다.
제 1서는 재신 김사안이나 무후하고, 제 2서는 충혜공 경주인 이제현지 三子 찬성사 장로요, 제 3서는 문정공 전주인 최재之子 찬성사 평도공 유경이요, 제 4서는 한성판윤공 양천인 허 호이며, 제 5서는 양천군 허순之子 선이니 무후라. 제 6서는 석탄 李存五之弟 보문각 교감 경주인 존사요, 제 7서는 문민공 김광철 之孫 예조전서 예문관 제학 광산인 김섬이며, 제 8서는 사윤공 김수천이요, 제 9서는 부정공 화순인 최자하이다. 영가화문의 품성이 유유초연하고, 기백이 호호강의함은 낙강 상낙대에 비롯하니 망망차해를 건너 사사독강의 순국하신 조상의 얼이 스며서인가 경향의 종인들이 힘을 모아 늦게나마 삼위지단을 설하여 세 일제를 봉사하니 개경의 충혼은 이제 영원히 이 곳에 안면하리다.
서기 1990년 3월
상락군 21세손 在承 謹撰. 상락군 21세손 在洪 謹書
다)상락군(휘 묘)의 장인인 민사평의 묘지명 (2005. 3. 9. 발용(군) 제공)
민사평묘지명(閔思平墓誌銘)
묘지명은 이달충(李達衷)의 문집 『제정집(霽亭集)』 권3과 『동문선(東文選)』 권125에 실려 있으며, 1359년(공민왕 8)에 이달충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민사평(閔思平 : 1295~1359)의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菴)이며, 충주 여흥(驪興 : 지금의 경기도 여주) 사람이다. 아버지는 적(?)이다. 어머니 김씨는 흔(?)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해졌다. 할아버지는 종유(宗儒), 증조부는 황(滉)이다. 시호는 문온공(文溫公)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민사평은 1315년(충숙왕 2) 과거에 급제한 이후 충숙왕·충혜왕·충목왕 때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묘지명 찬자는 민사평을 선비 즉 유사(儒士)의 면모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김묘(金昴)에게 시집갔다.
참고로 조부 종유(宗儒), 아버지 적(?) 및 부인 김씨, 김묘(金昴)의 처인 딸 민씨의 묘지명이 있다.
시대 고려
연대 1359년(공민왕8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이달충(李達衷) / 미상 / 미상
<判讀文>
高麗故輪誠秉義協?功臣重大匡都僉議?成事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贈諡文溫公閔公墓誌銘(幷 序)
余少遊大人先生之門獲侍話言每論士風必??嘆息曰今不如昔余竊以謂固矣何必爾旣閱事多姑信其爲然也前輩風流日以淪謝顧寥寥無所矜式則求舊之懷隨感而興可勝嘆哉余於及菴公深有族姻情好之敦故其卒痛悼滋甚而夫人銘墓之請再至則敢以陋辭焉公諱思平字坦夫號及菴忠州驪興人考諱?匡靖大夫密直司使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諡文順?金氏宣授鎭國上將軍管高麗軍萬戶重大匡上洛君金?之女封永嘉郡夫人祖諱宗儒重大匡都僉議?成事上護軍判摠部事致仕諡忠順曾祖諱滉朝散大夫戶部侍郎蓋其先世種德滂仁培植悠久自九代祖諱稱道奉御公而下代有碩輔其功烈位號磊落相望家有譜國有史?而不書公生於元貞乙未十二月戊辰五歲而喪?長于忠順資超然有器度大宰金貞烈公 號知人妻公以女貞烈喜賓客一時名勝多從之游因有所觀感學日進試補奉先庫判官轉右列爲散員加別將且不樂虎資讀書益力延祐乙卯吾東菴文定公主禮?考閱甚精所取不滿常額選無匪人公中之由是學問優游十年之久時毅陵久於上國至泰定乙丑正位東還愼簡庶僚公拜藝文春秋二脩撰歷左右二正言獻納服賜銀緋金紫視其品庚午永陵卽位頗不喜儒苟非有得於中者惟虎是?爲之媚悅公時以軍簿正郎藝文應敎亦出入王府與議選授其操守不小變至順壬申毅陵復位大明黜陟公拜衛尉少尹知製敎階奉善丙子加奉常以版圖摠郎出爲慶尙道監鐵使民便之召以典校副令右文館直提學復版圖摠郎館職改藝文進成均祭酒遷左司議大夫階以中顯陞中正館改進賢出爲全羅道按廉使惠化敦洽入拜成均大司成充春秋館脩撰官由正順進奉翊至正壬午以判典校掌成均試取金仁琯等九十三人甲申明陵卽政授典理判書轉監察大夫乙酉入密直爲提學帶上護軍歷副使知司事明年封驪興君越己丑聰陵入朝公從之旣踐位以其勞授僉議?理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號輸誠秉義協?功臣進?成事商議會議都監事退而閑居者八年至正己亥年六十五秋七月戊申病卒于私第訃聞上嗟悼賜諡曰文溫公於戱公奕世衣纓事業昌熾未嘗?有矜色性資溫雅處親姻雍容敦睦雖有拂戾不以爲言終必?服善交遊嘗與拙齋崔先生友善尤篤喜其文出力?行其敦信樂善類如此居官處事不爲崖異一循義理而己以詩酒自娛坦蕩蕩君子人也以公觀之未必士風今不如昔公旣歿矣所遇日新則余亦不覺??歎息曰今不如昔此余所以信其大人先生之言爲然也生一女適世家子弘福都監判官金昴孫男二人公愛之敎養有方皆登科曰齊閔德寧府注簿曰齊顔直翰林院孫女四人長適世家子監門衛?軍事金士安餘皆未?齊閔昆季主喪盡禮是庚申葬于大德山感應寺之南麓其銘曰
如公之裕如公之粹人所歆兮靡底于?靡胤厥後天難諶兮有女之懿有甥之美慰我心兮詩有旨味文有高致?余長吟兮中而不倚群而不類一以?兮念言宛爾於乎巳矣嗟歲月之??兮
〔출전:『霽亭集』권3〕
<해석문>
고려 고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증시문온공 민공묘지명 병서(高麗 故 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 都僉議贊成事 商議會議都監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贈諡文溫公 閔公墓誌銘 幷序)
내(묘지명 찬자 : 李達衷)가 젊어서 대인(大人)선생의 문하에서 노닐 때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는다. (선생은) 사풍(士風)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하시기를, “지금 세상이 옛날만 못하다.” 하셨다. 나는 그 때 홀로 말하기를, “너무도 통하지 않는 말씀이다. 어찌 반드시 그러하랴”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세상 일을 많이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함을 믿게 되었다. 전배(前輩)들의 풍류가 날로 줄어들어 다만 고요할 뿐 뒷 사람이 본받을 곳이 없다. 옛 사람을 아쉬워하는 회포가 솟아오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급암공(及菴公)과는 인척사이로 두터운 정의가 있어 그가 돌아가매 슬픈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부인으로부터 묘지명 청탁이 두 번이나 왔으니, 어찌 감히 누추하다고 하여 사양하리오.
공의 이름은 사평(思平),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菴)이며, 충주 여흥(驪興 : 지금의 경기도 여주)인이다. 아버지 적(?)은 광정대부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密直司使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으로 시호가 문순(文順)이다. 어머니 김씨는 선수진국상장군 관고려군만호 중대광 상락군(宣授鎭國上將軍 管高麗軍萬戶 重大匡 上洛君)인 김흔(金?)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종유(宗儒)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장군 판총부사(重大匡 都僉議贊成事 上將軍 判摠部事)로 은퇴하였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증조(曾祖) 황(滉)은 조산대부 호부시랑(朝散大夫 戶部侍郞)이다. 대개 선대에 덕을 심고 인을 베풀어 심고 가꾼 지가 오래되었다. 9대조인 이름이 칭도(稱道)인 봉어공(奉御公)부터 대대로 큰 신하가 있어 그 공로와 이름이 매우 많아 서로 바라보기에 이르렀으나, 집안에 족보가 있고 나라에 사서(史書)가 있으므로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공은 원정(元貞) 을미년(충렬왕 21, 1295) 12월 무진일에 태어났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 충순공(忠順公 : 閔宗儒) 집에서 자랐다. 자질이 뛰어나고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재상(大宰)인 김정렬공(金貞烈公 : 金倫)이 평소에 사람을 알아본다는 이름이 있어, 자기 딸을 공의 처로 삼았다. 정렬공은 빈객을 좋아하여 일시의 명사들이 그를 따라 놀았으므로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배움이 날로 진보되었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에 임명되었다가 무반으로 바꾸어 산원이 되고 별장에 올랐다. 그러나 무반직을 좋아하지 않고 책 읽기를 더욱 힘써 하였다. 연우(延祐) 을묘년(충숙왕 2, 1315)에 우리 동암 문정공(東菴 文定公 : 李?)이 예부시를 주관하면서 과거 심사가 매우 엄하여 선발한 인원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뽑힌 사람은 적절치 못한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여기에 합격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에 힘써 10년의 오랜 세월을 보냈다. 이 때 의릉(毅陵 : 충숙왕)이 오래 원나라에 있다가 태정(泰定) 을축년(충숙왕 12, 1325) 왕위를 회복하였다. 귀국하여 신하들을 신중히 뽑았는데, 공은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의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좌우정언(左右正言)과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은비(銀緋)와 금자(金紫) 색의 관복을 하사받았다.
경오년(충숙왕 17, 1330) 영릉(永陵 : 충혜왕)이 즉위하였다. (왕은)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아, 마음 속에 얻은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로지 무반들이 하는 것을 본받아 아첨하였다. 공은 그 때 군부정랑 예문응교(軍簿正郞 藝文應敎)의 벼슬로 왕부(王府)에 출입하며 인사를 함께 의논하였으면서 그 분수를 지킴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지순(至順) 임신년(충혜왕 2, 1332) 의릉(毅陵 : 충숙왕)이 복위하여 관리의 출척(黜陟 : 승진과 퇴출)을 밝게 할 때, 공은 위위소윤 지제교(衛尉少尹 知製敎)에 임명되었고, 관계(官階)는 봉선대부(奉善大夫)였다.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봉상대부(奉常大夫)를 더하고 판도총랑(版圖摠郞)의 관직으로 으로써 경상도염철사(慶尙道鹽鐵使)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전교부령 우문관직제학(典校副令 右文館直提學)으로 소환되어 다시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고 관직(館職)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다. 다시 성균제주(成均祭酒)로 승진하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겼다. 관계(官階)는 중현대부(中顯大夫)에서 중정대부(中正大夫)로, 관직(館職)은 진현관(進賢館)으로 바뀌었다. 전라도안렴사가 되어 은혜를 베풀어 교화하여 다스렸고, 들어와 성균관대사성 충춘추관수찬((成均大司成 充春秋館修撰官)에 임명되었다. 정순대부(正順大夫)를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지정(至正) 임오년(충혜왕 복위3, 1342)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성균시를 관장하여 김인관(金仁琯) 등 93인을 뽑았다.
갑신년(충혜왕 복위5, 1344) 명릉(明陵 : 충목왕)이 즉위하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임명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옮겼다. 을유년(충목왕 1, 1345) 밀직사(密直司)의 밀직제학이 되고 상호군을 겸직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이듬해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해를 넘겨 기축년(충정왕 1, 1349) 총릉(聰陵 : 충정왕)이 원나라에 갔을때 공이 시종하였다. 즉위한 뒤에는 그 공으로 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僉議參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에 임명되고,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에 책봉되었다. 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 商議會議都監事)로 승진하고 물러나, 한가하게 지낸지 8년이었다. 지정(至正) 기해년(공민왕 8, 1359) 65세로, 7월 무신일에 집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께서 애도하고 시호를 문온공(文溫公)이라 하였다.
아! 공은 대대로 내려온 관리 집안에서 태어나 사업이 번성했으나, 일찍이 자랑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성품과 자질이 온아하였으며, 친인척을 대함에도 온화하고 화목하였다. 비록 어그러지는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부끄러워 하고 심복하였다. 교유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졸재 최선생(拙齋 崔先生 : 崔瀣)과 친분이 돈독하였고 그의 문장을 좋아하여 힘을 내어 간행하였다. 믿음을 두터이 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함에 변덕스럽거나 기이하게 하지 않고 한결같이 의리를 쫓을 뿐이었으며, 소탈하게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겨하는 마음이 넓은 군자였다.
공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늘의 사풍(士風)이 반드시 옛만 못하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이미 죽었고 만나는 것은 날로 새로운 것들이니, 나 역시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지금이 옛만 못하다”고 한다. 이것은 내가 대인선생(大人先生)의 말이 옳다고 믿는 까닭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세가(世家) 자제인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 김묘(金昴)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2인이다. 공이 사랑하여 도에 맞도록 가르쳤다.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제민(齊閔)은 덕령부주부(德寧府注簿)이고, 제안(齊顔)은 직한림원(直翰林院)이다. 손녀가 4명이다. 맏이는 세가자제(世家子弟)인 감문위참군사(監門衛參軍事) 김사안(金士安)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제민 형제가 상례를 주관하며 례를 극진히 하여, 이 달 경신일에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남록(南麓)에 장사지냈다.
명(銘)하기를,
공같이 부유하고 공같이 순수함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인데,
어찌 명이 길지 못하였고 어찌 뒤를 이를 아들이 없었던가, 하늘도 믿기 어렵구나.
아름다운 딸을 두고 아름다운 사위를 맞았으니, 나의 마음을 위안하네.
시는 맛이 있고 문장은 높이 이르름이 있어 나로 하여금 오래 음미하게 하네.
바로 서서 기대지 아니하고 뭇 사람과 어울리되 같이 되지 않았으며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였나니, 생각하면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은데,
아! 끝났구나. 슬프다, 쏜살같이 달리는 세월이여.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라)배위 여흥군부인 민씨 묘비명(驪興郡 夫人 閔氏 墓誌銘)(2005. 발용(군) 제공)
(출전 : 문온공파 파보 122page.목은집,동문선)
묘지명은 이색(李穡)의 문집인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9와 『동문선(東文選)』 권128에 실려 있으며, 1379년(우왕 5)에 이색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민씨(閔氏 : 1324~1379)는 김묘(金昴)의 처이다.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에 봉해졌다. 증조부는 종유(宗儒), 조부는 적(頔), 아버지는 사평(思平)이다. 외조(外祖)는 김윤(金倫)이다.
아들이 3명으로, 장남은 구용(九容), 차남은 제안(齊顔), 구덕(九德)이다. 딸은 9명이다. 각각 김사안(金士安), 이창로(李彰路), 최유경(崔有慶), 허호(許灝), 허의(許誼), 이존사(李存斯), 김첨(金瞻)에게 출가했다. 나머지 둘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참고로 민씨의 증조부 종유(宗儒), 조부 적(頔), 아버지 사평(思平) 및 처 김씨의 묘지명이 있다.
시대 고려
연대 1379년(우왕5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이색(李穡) / 미상 / 미상
<判讀文>
驪興郡夫人閔氏墓誌銘
吾友金九容氏以今年閏五月甲辰葬其母驪興郡夫人閔氏于祖母金氏之塋直其西十數步旣而走其子叅軍事明善求銘予義不辭按其狀輪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諡文溫及菴先生諱思平其考也匡靖大夫密直司使諡文順諱迪其大父也僉議贊成事諡忠順諱宗儒其曾大父也都僉議政丞諡貞烈竹軒金公諱倫其外祖也內外赫然一國所慕而夫人生於其問習熟見聞凡所當爲壹是皆以母則爲本事父母甚孝朝昏定省不以疾病廢宗族稱之辛丑冬避賊南遷奉母以行母安焉如在室中其後居驪興十有餘年事之益勤母旣歿矣夫人之子壻每請還京夫人涕泣曰吾母葬於斯吾去矣拜掃闕矣吾何忍焉吾何忍焉五月癸巳以病歿年五十六九容氏又曰吾父淸德畏人之知喜於晦養母今亡焉嗚呼奈何穡曰賢哉金母也文溫公雖無子有是女以生九容氏宅相成遷史傳可不謂賢哉男三人長九容前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脩官次齊顔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奉善大夫典校副令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次九德前左右衛保勝散員女九人適密直副使金士安前開城尹李彰路前宗簿令崔有慶前郞將許顥前副令許誼兼博士李存斯門下注書金瞻次未適其銘曰物歸其根其生不窮驪興閔氏葬于其中江之沄沄曷其有終與之俱長永嘉之風
〔출전:『牧隱文藁』권19〕
<해독문>
여흥군부인 민씨(驪興郡夫人 閔氏) 묘지명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우왕 5, 1379) 윤5월 갑진(甲辰)일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의 묘역에 장사하였다. 거리가 서로 십 수보였다. 그리고 아들 참군사(參軍事) 명선(明善)을 보내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을 살펴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都僉議贊成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시호가 문온(文溫))인 급암(及菴)선생 사평(思平)이 부인의 아버지이다.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 密直司使)로 시호가 문순(文順)인 적(頔)이 부인의 할아버지이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호가 충순(忠順)인 종유(宗儒)는 부인의 증조부이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시호가 정렬(貞烈)인 죽헌(竹軒) 김윤(金倫)은 부인의 외조(外祖)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부인은 그러한 집안에서 태어나보고 듣는 것이 익숙하였다. 마땅히 할 일에는 한결같이 어머니의 규범을 근본으로 삼았다.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겼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는 일을 병이 들었어도 놓치지 않았다. 친척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길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기가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여흥(驪興 : 경기도 여주)에 살면서 10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못할 것인데, 내 어찌 차마 떠날고.”하였다.
5월 계사(癸巳)일 병으로 별세하셨다. 나이 56세였다. 구용(九容)이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시며 어두운데서 기르시기를 좋아하시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 할꼬.”하였다. 색(穡 : 묘지명 찬자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구용)의 어머니여, 문온공(민사평)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외조카(宅相)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완성했으니, 가히 어질다 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아들이 3인이다. 장남 구용(九容)은 전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前中正大夫 三司左尹 進賢館直提學 知製敎 充春秋館編修官)이다. 다음 제안(齊顔)은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겸 첨서 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 中書兵部郎中 兼 僉署 河南江北等處 行樞密院事 奉善大夫 典校副令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이다. 그 다음은 구덕(九德)으로 전좌우위 보승산원(前左右衛 保勝散員)이다. 딸이 9인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개성윤(前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종부령(前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낭장(前郎將) 허호(許顥), 전부령(前副令) 허의(許誼),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각각 출가했다. 나머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물건이 뿌리로 돌아갔으니 그 삶은 무궁하도다.
여흥민씨를 그 가운데 장사하니, 강물은 흘러흘러 어찌 쉴 때가 있으리요.
그와 함께 길지어다. 영가(永嘉)의 풍(風)이요
<해독문>
여흥군부인 민씨(驪興郡夫人 閔氏) 묘지명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우왕 5, 1379) 윤5월 갑진(甲辰)일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의 묘역에 장사하였다. 거리가 서로 십 수보였다. 그리고 아들 참군사(參軍事) 명선(明善)을 보내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을 살펴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都僉議贊成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시호가 문온(文溫))인 급암(及菴)선생 사평(思平)이 부인의 아버지이다.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 密直司使)로 시호가 문순(文順)인 적(頔)이 부인의 할아버지이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호가 충순(忠順)인 종유(宗儒)는 부인의 증조부이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시호가 정렬(貞烈)인 죽헌(竹軒) 김윤(金倫)은 부인의 외조(外祖)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부인은 그러한 집안에서 태어나보고 듣는 것이 익숙하였다. 마땅히 할 일에는 한결같이 어머니의 규범을 근본으로 삼았다.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겼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는 일을 병이 들었어도 놓치지 않았다. 친척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길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기가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여흥(驪興 : 경기도 여주)에 살면서 10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못할 것인데, 내 어찌 차마 떠날고.”하였다.
5월 계사(癸巳)일 병으로 별세하셨다. 나이 56세였다. 구용(九容)이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시며 어두운데서 기르시기를 좋아하시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 할꼬.”하였다. 색(穡 : 묘지명 찬자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구용)의 어머니여, 문온공(민사평)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외조카(宅相)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완성했으니, 가히 어질다 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아들이 3인이다. 장남 구용(九容)은 전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前中正大夫 三司左尹 進賢館直提學 知製敎 充春秋館編修官)이다. 다음 제안(齊顔)은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겸 첨서 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 中書兵部郎中 兼 僉署 河南江北等處 行樞密院事 奉善大夫 典校副令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이다. 그 다음은 구덕(九德)으로 전좌우위 보승산원(前左右衛 保勝散員)이다. 딸이 9인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개성윤(前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종부령(前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낭장(前郎將) 허호(許顥), 전부령(前副令) 허의(許誼),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각각 출가했다. 나머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물건이 뿌리로 돌아갔으니 그 삶은 무궁하도다.
여흥민씨를 그 가운데 장사하니, 강물은 흘러흘러 어찌 쉴 때가 있으리요.
그와 함께 길지어다. 영가(永嘉)의 풍(風)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