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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김상종(金象鍾. 1848~1908) (2009. 2. 11. 정중(도) 제공)
수익의 아들이고 호는 운산(云山)이다.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서산 김흥락에게 배웠다. 문장이 웅휘(雄輝)하고 행금이 독실했다. 1896년 고종 병 신에는 의성의 의병대장에 추대(推戴)되어 구성산(九成山)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황산(凰山)전투에서 참패하고 파병(破兵) 조칙(詔勅)에 의해 전진(戰陣)을 해산했다. 연방집(聯芳集)이 있으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창의 기적비 소개>
위치:경상북도 義城郡 點谷面 沙村里. 만취당 남편 진입로에 건립(건립일-2008년 12월)
<비문 소개>
*비문 전면은 의병대장 김상종 격문(국역)이며 이 내용은 2007년2월호 월간`순국` 지에 실린 글임.
이적(夷狄)의 중화(中華)가 변화됨은 고금에 듣지 못한 바이고
적국에 나라를 판 행위는 천지간에 능히 용납할 수 없다.
실로 태어난 본성이 있다면 누구인들 적개심을 품지 않으랴!
오호라! 십흉(十凶)이 권병을 농락하니 국가의 재앙이 비로소 성해지고
사교(四郊)에 진(陳)이 많게 되니 생민의 도탄이 이미 지극하게 되었다.
성상께서 머리를 깍는 일로 누차 흉도에게 핍박을 당하니 생각한즉 목이 막히고
국모가 해를 입어 마침내 허위(虛位)로 돌아감이 말하자니 통곡스럽다.
사나운 위세를 협박함이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과 같고
예의를 무시하여 버티니 무도한 견양(犬羊)이로다.
의관이 모두 변하니 한관(漢官)의 위의를 보지 못하겠고
달력은 새로 반포하니 춘왕(春王)의 월령이 어긋났도다.
수 천 년 강상이 다시 떨치지 못하게 되고, 3백 고을 풍속이 거의 다 변하게 되었다.
적과는 하늘을 같이 할 수가 없으니, 무(武)를 쓰기에 어찌 땅이 없으랴!
제(齊)나라가 9대의 원수를 갚으니 <춘추>에서 의롭게 여기고
주(周)나라가 6월의 군대를 일으키니 북쪽의 오랑캐가 징계되었다.
돌아보건데 우리 영남지방을 본디 추로(鄒魯)의 고을이라 일컬어졌다.
역대 우리 왕조에서 배양한 영향이 혈기가 있는 무리에게 모두 스며들고
여러 선배들이 이어받은 유풍이 예악을 일삼는 마을에 얕지 않도다.
사람은 적을 막을 재능이 있고 세상에는 특이한 자취가 많았다.
임진란에 능히 물리쳤던 날은 실로 소모(召募)의 힘 덕분이고
무신란에 유린하던 때에 오히려 규합하는 의리를 거행했도다.
더구나 지금 섬 오랑캐가 중외에 창궐하니
사람이 누가 부모께서 끼친 신체를 보존 하겠는가?
간특한 무리가 조야에 퍼졌으니 국가가 장차의 조종의 서여(緖餘)를 실추하게 되었다.
괴수를 섬멸하고 적을 잡을 날 어찌 없으랴!
뿌리를 제거하고 박힌 못을 빼는 것.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인의(人義)의 방패가 팔도의 선비에 부족하지 않고
충신(忠臣)의 갑옷이 반드시 작은 읍에 많으리라.
의대(衣帶)의 교서가 내림에 보는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상하지 않겠는가?
초토(招討)의 조칙이 선포됨예 듣는 이들이 주먹을 쥐고 손바닥을 쳤다.
의기가 격한 바에 얻지 않음이 없었도다.
이에 우리 읍에서 공의(公儀)를 크게 발하여 의병을 창도하여 일으켰다.
활 쏘고 말 모는 것이 서로 어긋나지 않아 비록 드높은 공은 없으나
방어하고 보위하기를 도모하니 오히려 극진한 충성이 있다.
엎드려 바라건데 이 격문이 전달 되는 날. 기한을 정하여 군대를 떨치고
소리를 일제히 하여 힘을 합하자.
이로서 종사의 위태함을 부지하고. 이로서 선왕의 은혜에 보답하자.
따르고 어기는 사이에 충력(忠力)이 절로 드러나리라. 각기 힘쓰도록 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