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평의공파(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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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png 12. <안동김씨 사촌입향 육백년 추원비> (安東金氏 沙村入鄕 六百年 追遠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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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太白)은 동(東)쪽을 휘 감았고

소백(小白)은 서북(西北)으로 둘러섰다

 

황지(潢池)에서 발원(發源)한

낙수(洛水)천리(千里)의 연변(沿邊)에는

옥야(沃野)가 전개(展開)되고

 

홍유석덕(鴻儒碩德)이 연(連)달아 배출(輩出)되니

세인(世人)들은 영남(嶺南)을 가리켜

인재(人才)의 부고(府庫)라 하였다.

 

여기 소주(韶州)의 북촌(北村) 사진리(沙眞里)는

명산(名山)대하(大河)의 지맥(支脈) 지류(支流)가 알맞게 배분(配分)되어

산광수색(山光水色) 명미(明媚)하고

기름진 전토(田土가) 수리(數里)에 連하여

 

백세(百世)전손(傳孫)의

훌륭한 기지(基地)로 알려진 곳 이다

 

차(嗟)홉다.

우리 감목(監牧)선조(先祖) 휘(諱) 자첨(子瞻)께서는

분파조(分派祖)이신

도평의공(都平議公) 휘(諱) 구정(九鼎)의 아들이시며

고려조(高麗朝)의 훈업(勳業)상신(相臣)인

충렬공(忠烈公) 대조(大祖)의 오세손으로

천성(天性)이 호매(豪邁)하고 고지(高志)원식(遠識)의 탁견(卓見)이 있어

안동(安東)회곡에서 세거(世居)하다가

조선조의 개국(開國)됨에

시류(時流)에 알맞는 유신(維新)의 뜻으로

청전(靑氈)세업(世業)을 버리시고

사촌(沙村)에 조기(肇基)하니

곧 이조(李朝)의 개국(開國)년대(年代) 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전조(前朝) 명신(名臣)의

후손(後孫)예우(禮遇)로

감목(監牧)관(官)에 제수(除授) 하였으나

사양(辭讓)하고

 

도광(韜光)양덕(養德)의 처세(處世)와

영세(永世)를 내다보는 경륜(徑綸)으로

서림(西林)을 조성(造成)한 선조(先祖)는

창업(創業)보다

어려운 수성(守成)의 요제(要 言+帝) 전지(傳之)자손(子孫)하여

오늘의 우리를 이 땅에 살게하니

모두가 석과(碩果)불식(不食)의 업보(業報)일 것이다.

 

맏아드님 휘 효온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사직을 역임하였으나

세조의 찬위를 보고 은거불사하고

문과동방인

박팽년 최항과는 심교(心交)가 깊었다.

 

둘째 휘 효항은 사정을 벼슬하였으나

문헌무징으로 상고치 못하고

청송화현으로 개기(開基)정거(定居)하여

청명(淸名)직절(直節)로 수분(守分)하고 현재에 이른다.

 

효온의 아드님 휘 극해는

생원과 문과에 등제하여

북평사와 지례현감을 지냈으며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아드님 휘 광수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공부하던중

사우간에 중망(重望)이 높았으나

연산조의 사화로 시정의 불리함을 보고 낙향하여

영귀정을 짓고 존현양사에 힘쓴 일사(逸士)로서

세칭(世稱) 송은선생이라 하였다

사후(死後)에는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장대서원에 제향되었으며

그 청고한 인격을 독행(篤行)군자(君子)요

소안(韶顔)백발(白髮)의 지상(地上)선인(仙人)이라고

외손(外孫) 서애선생 류성룡은 기록하였다

 

둘째 휘 광복은

충순위를 역임하고 효우로 처신하여

백씨 송은선생과 함께 연방고를 남겼다

그후 아들 연걸과 같이 김해 덕산리에서

전손세거하며 문물이 상승하고 일향의 문족이 되었다

 

송은선생의 아들휘 당은

기자전참봉이시고

 

그아드님 휘 세우는

통례원 인의이시다

 

인의공께서는 세아들을 두셨으니

휘 사원 사형 사정 으로

모두가 일방의 망사가 되었다

 

사원의 호는 만취당으로 퇴도고제이며

도산의 월란암에서 위사의 학문에 전심하여

선생의 심허를 받았으며

임란을 당하여서는 구국의 일념으로

창의하여 정제장이 되고

후덕심인으로 진할유민하니

김씨 의창이라 별칭하였다

사후에는 후산사에 제향하였으며

 

사형은 호를 독수헌이라 했고

문과에 올라 직장을 지냈으며

유일제선생 김언기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동생 사정과 함께

화왕산의 곽망우당 의진에서 활약하엿고

아들 완과 같이 진보로 전거 하였다

 

사정은 호를 후송재라 하였고

사숙계문으로 수학하였으며

곽망우당 의진에서

적신성서의

피 끓는 시를 남겨 세상에 전한다

사후에는 지평에 추증 되었고

도담사에 제향하였다

 

그후에도

사마문무와 문집학설을 남긴 후손이 번다하나

다 기록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거슬러 생각하면 입향후

이십대 십갑자에 이른 오늘날

 

세수인경의 범절을 지키며

대과 십삼원 소과 이십팔원이 배출되고

문한도 빈번하여 유맥이 상승하여

 

교남벌족으로 원근에 알려지니

어찌 비양의 덕을 닦은 현조의 여음이 아니리요

 

바야흐로 세도의 변천은 금석을 달리하여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정신문화는 물질문화로

집성대촌은 이산전거로 옮겨지는 것은 시대의 순리라

 

다만 이시기를 당하여

내세의 후진에게 근원을 찾게하고

숭조의 정신을 함양하여

처심적려의 생각을 기르고자

 

선조의 체취가 서린 유서깊은 서림에

추원비를 세워

 

이곳을 찾는 후손에게

고향의 상념을 심어주고

우리의 내력을 영세에 전하고자

후손 사수(沙秀)씨등의 주선으로

문원의 성력을 모아

비석을 세우면서 삼가 銘하노니

 

매봉산에 나린용(龍)이 서림(西林)에와 머무르고

유심(幽深)하다 기수남상(沂水濫觴) 이강산(江山)에 응(應)했도다

영철(潁哲)할사 선조(先祖)님이 조기길지(肇基吉地) 하셨으며

비양(卑讓)으로 덕(德)을삼고 성경(誠敬)으로 수분(守分)했네

명창정궤(明窓淨机-) 밝은뜻은 지고염사(志高廉士) 길렀으며

청화(淸和)로운 몸가짐은 유방백세(遺芳百世) 이아닌가

함양훈도(涵養薰陶) 깊은훈해(訓海-언변) 시례가성(詩禮家聲) 아름답고

번연(繁衍)할사 운잉(雲仍)이여 천세상전(千世相傳) 하옵고져

 

서기 1992년 임신 梅雨節

後孫 昌會 謹撰

義城後人 金九稷 謹書

 

 

 

이 시대의 스승!!

창회 대부님 지으신

사촌서림 소재

육백년 추원비문 감히 올립니다

(천사 김종덕 선생 直孫)

 

 

 

지은이 : 김창회(의성 사촌거주, 안동김씨대종회 부회장(도평의공파),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글씨쓴 이: 김구직(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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