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평의공파(구정)

본문

p02.png 15. 사촌 마을 소개

1) <큰마 우물 이야기>

사촌마을 한복판에

임란전부터 내려온 우물 있지요 (웅굴이라캐요)

물이 좋아 오래 산다는 마을

큰인물이 셋이 난다며(신라시대 정승 나천업,조선시대 영의정 류성룡)

아직도 큰인물 한사람 기다리는 마을.

 

도참설에 의하면

(현 전국 대학의 사학,지리과 학생들 순방코스 사촌마을)

지형이 배모양으로 생겨

구멍을 뚫으면 가라앉는다고

우물은 전 동네에 한개 뿐 이랬데요

 

우물 처음 팠을 때

붉은 황토물 먹으면 큰자식 낳는다는 말에

김진사(조선초 시인 송은 김광수)댁

다섯째딸(김씨부인=류성룡 모친 당시 열두어살)은

그 흙물을 몇 바가지나 먹었대

그후 영의정을 낳았다는 전설도 있어요

 

온 문중 사람이 물 길러 먹던곳

물 지는 머슴이 줄을 이었대요

 

병 신란(1896년 의병)에 견딘 만취당

6.25때 누가 그 옆 소깝삐까리에 불질렀을 때

어떤 부인네

이 우물물 길러 동이로 끼얹어 불을 껐기에

지금도 현존 하는 우물 옆 만취당!!

 

 

 

짚 따배 틀어 머리에 얹고

물동이 그위에 얹어

가뭄에 새벽물 따라 먹든곳

물동이 이고 가는

춤추던 엉덩이~~~

어릴적 기억이 선하네요

 

아! 잊을수 없는 고향의 물 맛!!!!

 

이 아침에

고향 우물의 씨원한 샘물 한바가지 씩 퍼 디리니더

다 마시세이

<김정중 씀>

 

*사촌마을=경북의성군점곡면사촌3리, 도평의공파 문중소재지, 안동김氏입향610년마을

*만취당 =송은 김광수의 증손 김사원의 호,임란전 목조건물, 도평의공파 종택 옆 현존, 경북의성군 홈페쥐 참조(沙村선비마을,만취당,만년송)

 

 2)<사촌마을 소개> (2003. 2.3. 정중(도) 제공)

 

 사촌(沙村)3리는 신라시대 나정승(羅正丞)이 이 마을에 살았다는 전설과 자하산(紫霞山) 중턱에 나정승(羅正丞)의 묘라고 전해지는 고총(古塚)으로 보아 마을의 역사가 1.000년이 넘었으리라 짐작되어 그후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후예 김자첨(金子瞻)이 안동(安東) 회곡(檜谷) 에서 이주하여 1392년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따서 지었다 함

 

 

 

▷ 자연 부락...

-사촌(沙村)의 가로숲(西林) : 사촌 서편 매봉산 기슭을 따라 길이 약1040m 폭40m의 방풍 경관림이 길게 가로 누여 있으니 이곳이 사촌 가로숲이다 수종은 상수리 나무 느티나무 팽나무등 10여종 이며 수령은 300-600년 사이의 노거수(老巨樹)가 많고 수고가15-20m로 장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는 도내에서도 가장 큰 숲의 하나인데 약600년전 안동 김씨(安東金氏) 입향 시조인 감목공(監牧公) 김자첨(金子瞻)이 안동(安東)에서 사촌(沙村)으로 옮겨 마을을 이룰 때 서편 긴 평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소도 휴식을 할수 있게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푸른 숲에 100여 마리의 왜가리 떼와 뭇 철새들의 찾아들며 봄에는 새소리 여름에는 녹음 겨울에는 설화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보호림 1등급 9-75호로 경상북도에서 지정한 바 있다

 

-만취당(晩翠堂) : 조선 중종(中宗) 선조(宣朝)때 사람인 김사원(金士元) 호(晩翠堂)이 지은 건물로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과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 건물로 안동 김씨(安東金氏) 종실(宗室)로 사용되어온 조선조(朝鮮朝) 특유의 11칸 대청 건물이며 현판은 한석봉(韓石峰) 친필이라 전해지며 지방 유형 문화재 제169호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후산 서원(後山書院) : 18C 건물로 춘추 정일에 각 유림에서 모여 향사를 모시던 서원으로 대원군때 훼철당하고 지금은 안동김씨 도평의공파 제사로 쓰이고 있다

  

 3) <내고향 사촌(沙村)>  (2003. 2. 4. 억(도) 제공)

세상에는 고향을 잊고 사는 사람이 많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자기가 나서 자란 곳을 까마득히 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옛날 어느 분인가 고향을 그리워 말하기를,

 「胡馬叱北風   越鳥巢南枝 (호마질북풍  월조소남지) 」

몽고(蒙古)의 말은 북풍에 울부짖고, 월(越)나라의 새는 남쪽가지에 둥우리를 튼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향을 사랑하며 또한 자랑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고, 오늘날 산업사회의 급격한 변천과 더불어 차츰 삭막해지는 인간 심성(心性)에 더욱 절실히 자리잡기 시작하는 회향심(懷鄕心), 또는 향수의 도도한 물결이기도 하다. 이 물결은 명절이나 피서철에, 산과 바다와 고향으로 아우성치듯 밀려 오고가는 대이동으로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꿈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헤매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하소연과 향수에 젖어 울부짖듯 늘어 놓은 사연들에서 우리는 고향을 그리는 한결 절실한 정서와 감정을 읽을 수 있고, 또 어느 누구나 공감해 마지 않는다.

 

실향(失鄕)한 북한 출신의 문인, 시인 등 모두가 고향을 소개할 때는 그 산하가 빼어나고 인정과 풍물이 아름답다고 극찬하지않는 이가 없다. 나는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서 살아본 일이 없어서 그들처럼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고향에 사뭇 살고 있기 때문에 고향을 오히려 감각하지 못하는 덤덤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이 기회에 점곡(點谷)의 산수와 풍물을 소개하면서 한번쯤 고향을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 마침 다행한 일이라고나 할까?

 

점곡은 지형상 경북도 내에서도 가장 중앙이 되는 의성읍에서 북동 1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출입하는 주요 통로는, 의성에서 주왕산(周王山)국립공원이 있는 청송으로 뻗은 지방도를 따라 두 개의 고개를 넘어서 들어오는 길과 구안(大邱, 安東) 도로가 지나는 단촌에서 동으로 훤히 트인 골을 따라 8km 가량의 포장된 군도가 이곳으로 뚫렸고, 안동군 길안에서 좁은 골, 높은 재를 넘어 남서로 14km 되는 곳이 이 고장이다. 이 세 길 가운데 어느 길을 통해 오든지 처음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방이 준험한 산악 속의 벽지로 우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막상 이 고장에 들어와 보면, 남북 3km, 동서 10여km가 거침없이 터진 별유천지(別有天地)가 전개되어, 시원하면서도 한편 안온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곳이 일찍이 지사(地士)들이 말한 바 영남(嶺南) 8명기(名基)의 하나라고 하는 의성 사촌(沙村)이다. 사방으로 통하는 차편은 편도 27회로 그리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이며,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편인데, 보현산(普賢山) 솟재<鼎嶺>와 황학산(黃鶴山)에서 발원한 물의 흐름이 급하여 넓은 하천부지를 형성하고, 토질은 사질양토로 배수가 잘 되어 과수 재배의 적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해발 160m로, 생산과 생활에 가장 적당한 지대이며, 낮과 밤의 일교차가 비교적 심하여, 여름에는 모기가 없어 무덥고 짧은 밤을 쾌적하게 숙면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명기설을 뒷받침하는 일례가 아닐까 한다. 그외에도 이곳의 식수(食水) 또한 도내에서 으뜸이다. 매월 실시하는 식수 검사 때는, 마을 어느 곳의 샘물을 가져가도 가장 양질의 식수로 감정을 받는다. 몇해 전에 식수가 좋아 장수촌이란 제목으로 한국일보 사회면에 발표된 일이 있다. 이런 연유(緣由)로 여름철이 되면 도시의 공해와 효진(段塵)을 피해 이곳 출신 사람들 또는 이 지방과 연고있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아 들기도 한다. 이곳의 촌락(村落) 구성을 살펴보면, 소재지 사촌은 4백여호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전형적인 대촌인데, 이렇게 큰 자연부락은 도내에서도 흔하지 않다. 여기에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입향한 고려 중흥 공신 충렬공(忠烈公) 김 방경(金方慶)의 5세손 감목공(監牧公) 김 자첨(金子瞻)의 후예인 안동 김씨와 단종조 절의신 행정(杏亭) 권 식(權軾)의 예손인 안동 권씨를 비롯하여 조선후기에는 조선중기의 명유(名儒) 겸암(謙菴) 유 운용(柳雲龍)의 후손인 풍산 유씨가 입향하여 상호 융화된 씨족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면 소재지에서 동남쪽 2km인 윤이실(尹谷)에는 학행과 절의로 이름난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의 후손 영양 남씨가, 동쪽 1km 지점 단애(丹厓)실에는 퇴계 문하의 고제 송고(松皐) 박윤함(朴允牽)의 후예 반남 박씨, 서쪽 중리(中里)에는 1문 5종반의 충절로 임진왜란때 창의(倡義)의 공훈이 길이 빛나는 이름 높은 김치중(金致中) 의사 일가의 자손인 의성 김씨가 각각 수려한 터를 잡아 세거(世居)하면서 문맥(文脈)과 통혼으로 빈번히 인연을 맺고 내왕 상교하고 있다. 평상시에나 길흉사에 모여들면 선의(先誼)를 밝히고 우정을 나누며 명조(名祖)의 훈화를 받들고 순박한 미풍양속을 재물보다 귀하게 여기니 이는 모두 면면한 전통의 유풍이 서려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 고장은 또한 문향(文鄕)으로서도 이름이 높다.  옛날부터 학문으로써 향리를 빛낸 어른들이 많지만 위에 든 행정 권식과 연산조때의 은사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의 유풍(遺風) 탓인지, 환로와 훈업으로 나간 사람이 적고 학문과 수신을 미덕으로 삼은 인사가 많았다. 그러나 이른바 문치를 표방하고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유학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조 사회에서 일단 각자의 지적 수준과 능력을 가름해 보고자 했음인지 자격을 인정받는데는 뒤지지 않았다. 그 실례를 들면 이 고장에서 대소과(生員과 進士 및 文科, 武科)에 53명이 급제되었음이 그러한 일면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고장은 자연경관이나 유적 유물 등도 적지 않다. 면 소재지 북서 4km 거리에 위치한 대한 조계종 16교구 본산 고운사(孤雲寺)는 전국에서 유수한 대찰로 일찌기 신라시대의 거유 최치원(崔致遠)이 머물다 갔다하여 그 호를 취하여 고운사(高雲寺)를 고운사(孤雲寺)로 고쳐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입구의 계곡과 임학이 유수하여 각처의 소풍객이 끊이지 않는다. 남서방 4km 지점의 건마산성은 임진란때 김치중 의사의 전적지로도 유명하다. 성 아래 있는 깊은 소(沼)와 십리 장벽은 철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하는 보기 드문 명소로, 옛 글에  A山靑石白間間花(산은 푸르고 돌은 흰데 사이사이 꽃이로구나) B고 한 시는 이곳을 두고 말한 듯하다. 면 소재지의 방풍림 가로숲은 경상북도 지정보호 1등급 9~75호이고(지금은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 임진란때의 치란 공신이며 송은 김광수의 외손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출생지라는 전설이 있다. 10km의 무제(無堤) 평원을 남북으로 가로 질러 수령 5백년을 넘는 태고연한 노거수 사이에 대곡천(大谷川)이 관류(貫流)하여 낙동강의 지류인 기수(沂水)에 합류한다. 내의 바닥은 씻은 듯이 깨끗하여 옥돌같은 자갈이 총총히 깔려 농부들이 낮잠을 즐길 수 있고, 지나가는 길손 또한 발걸음을 멈춰 쉬어 가기도 한다. 봄에는 북쪽 산밑과 노목사이에 기화요초가 다투어 피고, 여름에는 갖가지 나무가 무성하여 녹음을 이루며, 가을에 화사한 단풍으로 채색되고, 겨울에 눈이 오면 송이송이 설화가 매달린 듯 사철 경관을 이루는 이 숲에 다람쥐와 산토끼 등 들짐승들이 밤낮 찾아들고, 철따라 새들이 지저귄다. 또한 마을 앞을 완만하게 굽이치며 유유히 흐르는 기수는 맑고 차가웁기로 알려졌고, 강반(江畔)에 우뚝 솟은 송은 김광수의 강학처였던 영귀정(詠歸亭)과 더불어 절경을 이룬다. 인근 고장 인사들이 효진을 피하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일이 왕왕 있다. 그 외에도 면내 각처에 누대정각이 많고 경관과 유적지가 적지 않지만 생략하고, 지방 문화재 169호인 만취당(晩翠堂)은 1582년에 퇴계(退溪)의 고제 만취당김사원(金士元)이 지은 집으로 규모가 웅혼하고 건축양식이 특이하다. 4백년이 넘도록 원형대로 보존된 건축물은 영남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다. 이 고장의 특산물로는, 광활한 하천부지에 펼쳐진 과수원의 사과다. 그 식부 면적이 군내에서 손꼽히고, 빛깔이 고우며, 향기로운 그 맛은 서울까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십여년 전까지 재래식 농사에 의한 담배, 고추, 채소재배로 가계를 꾸려 왔으나, 지금은 사과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주민의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고, 교통의 발달로 외지와의 교류 접촉이 빠르며, 현재 점곡, 단촌간의 도로 포장이 완료되고 교통이 원활하면서,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더욱 윤택하고 한결 활기있는 새로운 고장으로 탈바꿈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 여기에 실린 기사는 1986년 1월, 전국단위의 월간지에 게재된 기사를 그대로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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