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공목계(共穆契) - 대문중 동약계(同約契) - 만취당파 친목회(親睦淮) - 후송재파 부녀회(婦女會) - 대문중 청년회(靑年會) - 대문중 화수회(花樹會) - 대문중
-사촌 도평의공파 공목계(共睦契)시작과 유래
옛부터 의성 사촌은 안동김씨 집성마을로 소재지 300여가구중 과반수이상이 모여사는 대성마을이 있다. 앞산은 비봉산이요 그 밑에 내려오는 큰 줄기산은 전체가 송이를 채취할 수 있는 산이 있고 산 끝 큰 언덕에 영귀정이 있다. 서쪽으로는 마을을 보호하는 가로수는 폭이 30m쯤이며 길이가 800m에 이르는 600년 전에 우리선조님들이 풍수해를 막기위해 심은 고목나무들이 둘려있다. 서북쪽에는 매봉산이있고 그 밑에 한실골은 십리가 넘는 큰 산골이 있다. 그 골 양,음,지 전체가 송이 밭이요 지금은 그 골 바닥에 육군 포 사격장을 하는 훈련장이 있다.
동북으로는 달봉산과 푯대산은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이 골도 길이가 십리골이라 전하고 있고 그 골을 이름하여 큰터골이라 큰터골 약수는 피부에 여름땀띠기에 아주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이 많은 산과 골은 우리의 선조님들이 후손에게 물려준 문중 재산이다. 이 곳에서 600년을 살아온 吉地요 집성이기에 영남에서는 의성사촌김씨로 통한다 옛부터 初喪을 당하면 장례식은 사촌 주위에 사는 他姓과下等 대우를 받은 사람들이 와서 상여를 메고 광중을하고 묘를 만들고 이렇게 50여명 사람들이 모여서 술 먹기 위해 밥 먹기 위해 일을 도왔다. 나라가 일본에 합방됨에 따라 이 사람들이 자기네 권리와 인권을 찾기위해 기세를 높이기 시작하다 이제는 가난한 집에는 초상이 나도 먹을것이 적으니 일을 기피하려는 기세가 달이가고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하여진다. 1944년 갑신년 11월 21일에 가난한 집에 초상이 났다. (대동보 8권 도평의공파 399페이지참조 潘南朴氏, 金在鳳 일명渭龍 子 石秀로 기록되어있음) 石秀어머니 반남박씨는 庚申생 이니 25세꽃다운 나이에 3살 允會 첫돌前 石秀를 두고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세계 제2차 전쟁 막판에 남는것이 무었있으랴 앞뒤산 그 많은 문중산을 두고 그 주위에 下等 사람들이 많지만 가난한 살림에 먹을것이 없으니 일가 친척외에는 문상객도 없다. 일본제국주의강압에 의하여 공동묘지에 장례 치르는것을 피하기 위해 나무널판지 한장을 가지고 사끼자리 한장에 말아서 밤에 두사람이 사다리톨에 맞메고 나갔는데 사람 두사람이 었다. 그때에 渭龍 아제가 화가 나서 사람이 없으니 내가 메겠다고 상주가 나서서 상여를 메니 이때 마을 심부름 하는 신석이(申石伊)란사람이 와서 '서방님 나오시소 내가 메지요' 하고 이렇게 공동묘지 안갈려고 밤에 앞산 토기곡(兎機谷) 첫골 양지에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른 후 위용 아제가 문중회의를 소집한다.
세상인심이 이렇게 변했으니 우리도 변해야 한다. 우리 문중 모두 나와서 우리 문중산에 땔감 나무 하는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다 이렇게 최초의 공목(共睦)의 유래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우리 문중 산에는 길을 막고 아예 못들어가게 하고 비밀리에 해오던 나무는 붙잡아 그자리에 불을 놓아 살아버렸다. 몇일이 못가서 이들이 모여와서 무릎을 꿇어 엎드려 빌면서서방님네 말씀 잘 들을 터이니 우리 나무해서 이 엄동을 지나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해서 그 때에 다시 놓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고나니 이 하등 사람들이 자기네도 반상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외치며 이제 또 말을 안듣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문중회의를 해서 자~ 저네들이 저렇게 해방되었다고 말을 안 들으니 우리끼리 초상이 나면 장례를 치루는 방법밖에 없다하여 그때부터 정식으로 공복계를 명칭을 붙이고 초대계장에 김면호씨 유사에 김길호씨 김재식씨 선출하고 가난한 집에도 초상이 나면장사를 치를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조미란 이름을 붙여 성미쌀을 모아주기로 하고 최소단위로 한가정에 쌀 반되 이상은 의무적으로 모아서 쌀 1가마니 이상은 되니 가난한 집도 장사는 치룰 수 있었다.
처음 시작 할때에는 남자 40세까지만 상여를 메고 해도 삼교대로 넉넉하게 되었다. 6.25 사변이 나서 젊은 사람군인가고 사회 발달로 인해서 도시로 이주하게 되자 인원이 모자라기 시작해서 1973년이 되니 45세로 인상시켰다. 1978년도에 다시 50세로 인상시키고 1983년도 또다시 60세로인상시키고 그 다음에는 70세로 정년을 시켜서 지금도 초상이 나면70세에 상여를 메어야 할 형편이다. 이렇게 사촌공목계의 역사를 기록하노라. 매년 음력 정월 보름과 팔월 보름은 공목계의 정기총회를 그 동안에 있었던 경과 보고로 하고 윷놀이고 하고 모임을 가지고 있다.
1934년 12월 3일생 이 글을 올리는 이 점곡면 서변리 190-3번지 김원회 전화 054-833-5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