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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병천 지역 제학공파 및 안렴사공파 姓地巡禮
1. 일시 : 2002. 11. 10. 2. 장소 : 충남 천안시 병천면 일대 3. 참석자 : 영환(문), 영윤(문,부부), 성회(안), 영회(제), 윤만(문), 발용(군), 주회(안, 부부), 태영(군), 항용(제), 윤식(문, 부부, 부친),
4. 행사후기(항용(제) 작성) 엊그제 11. 10일 아침, 예정대로 안사연의 성지순례 행사인 병천지역 순례가 시작된다. 아침 07시 15분 전, 최초 약속장소인 서울 강남구청역 1번 출구 앞으로 나갔다. 아직 약하나마 어둠이 남아 있는 이 시간, 서울의 일요일은 평화와 고요 속에 모든 사물들이 잠들어 있다.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으셨다. 약간의 짐(제학공파 관련 인쇄 책자)을 택시에서 내리고 잠시 기다리자 영환(문) 대부님의 차가 먼저 오고 뒤이어 성회(안), 윤만(문) 대부님이 오셨다. 자신의 차로 우리를 위해 직접 운전까지 해주시는 영환대부님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올렸다. 약 10분 후 태영(군)님께서도 오셨다. 이제 출발이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벌써 많은 차량들이 어디론가로 빠르게 질주한다. 생기가 넘쳐 보였다. 일요일임에도 부지런한 모습들이다. 한때, 우리 민족성 속에 있는 게으름과 안일주의가 민족발전의 정체(停滯)를 가져오게 했으니 부지런해지자고 소리 높여 울려대던 60-70년대의 새마을 노래와 계몽 스피커 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이제는 빨리 빨리가 우리들의 문제점으로 떠올랐으니 많이 변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기흥 휴게소에서 잠시 쉰 다음 이내 달렸다. 태영(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차안에서는 그침 없는 문중의 역사 이야기, 새 자료의 발견과 감탄,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한 추론과 가설, 앞으로의 대책과 할 일 등으로 화제가 만발이다. 특히 태영(군)님께서는 새 자료를 가져오시어 우리를 놀라게 하셨다(이 자료들은 우송해 드릴 예정임)
목천 I.C를 나와 병천으로 향한다. 이때부터 성회(안)님으로부터의 자세한 지역 설명이 시작되었다. 천안에서 병천으로 가는 길목마다 서려 있는 역사 이야기를 듣는다. 과연 천안은 충절과 명인의 고장이다. 병천면사무소를 지나며 왼쪽 골목 안에는 안동김씨 문중회 사무실이 있단다. 병천을 벗어나면서 사거리에서 반 우회전하여 예정대로 09:00시에 유관순 기념관에 도착했다. 곧이어 중부고속도로로 오신 영윤(문)대부님 내외분께서도 오셨다. 1919년 3.1 만세운동의 횃불이 높이 올랐던 기념관 뒤의 매봉산 위로 해가 솟아오른다. 날씨를 걱정했는데 오늘은 쾌청하고 포근할 것 같다. 天佑神助인가 보다. 추모각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성회대부님께서 '전방의 학교가 아우내 중학교로 남응(현 제학공파 부회장) 대부님께서 창설하신 것이며, 그 옆의 골짜기 안에는 <道東書院>이 있는데 이 속에는 백곡공(휘 득신)께서 지으신 상량문이 있단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추모각에 올라가 유관순 열사 영정 앞에서 분향하고 경건히 머리 숙여 배례했다. 이어 다시 차를 타고 1.2Km 가량 매봉산을 안고 돌아가니 매봉산 자락 바로 밑에 남동향으로 잘 가꾸어진 초가집 생가가 나왔다. 안채는 5칸 정도의 ㄱ자 형이고 바깥채는 아주 적은 창고형의 집이며, 대문은 싸리문으로 된 전형적인 농촌의 서민형 초가이다. 이리저리 구경하며 바로 옆에 있는 매봉교회를 다니던 열사,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 열사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집 뒤에는 넉넉한 까치밥이 달려 있는 감나무 한 그루가 정겹다. 이때 청주에 계신 영회(제)대부님으로부터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전화 연락이 왔다. 지난 여름캠프때 함께 동참했던 분이시다. 잠시후 반가운 인사를 하고 온 길을 되돌아 가전리로 향했다. 가는 도중 나만 얼른 차에서 내려 유열사 초혼묘에 다녀왔다. 사진만을 찍기 위해서다. 간단히 생각했는데 매봉산 꼭대기까지 뛰어 다녀오느라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가전리로 가는 길이 병천리 남쪽의 냇물을 따라 잘 포장되어 있었다. 여러 물줄기가 아우러져 만나는 물이라 하여 아우내(竝川)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전리의 마을 모습이 정겹다. 이곳이 450여 년의 안동김씨 제학공파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백전(잣밭) 마을이다. 100여 호에 500여 명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80여 호에 200여 명이 살고 있다 한다. 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산이 갈마음수형이라 한다. 마을 중앙을 지나 약간의 고개를 넘어가니 도로 우측으로 구암바위가 나타난다. 거북이가 서 있는 형상이다. 이로 하여 휘 충갑 선조님의 호가 구암(龜巖)이 됐다. 바위 양 옆에는 <安東金氏世居>, <栢田洞天>이라 음각된 글이 있었다. 그 옆에는 김시민 장군 전설과 관련하여 사사처(射蛇處)란 글이 새겨 있는 표석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약 350년이란 수령의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다. 충무공께서 어렸을 때 뱀을 화살로 쏜 전설과 주변의 역사 유적을 간단히 설명드리고 도정사로 향했다. 약간은 구부정하여 위험하기도 한 시멘트 다리를 차로 건넜다. 약간의 오르막 산을 오르며 옆에 있는 교관공 비석, 창평이씨 사적비, 창평이씨비석, 구암공 사적비 등을 지나 영모재 앞에 차를 세웠다. 벌써 많은 일가분들이 와 계셨다. 낯익은 일가 어른들께 인사 올리기 바빴다. 또 우리 안사연 여러분들도 소개 해 올렸다. 아버님께 안사연 여러분을 소개하기도 했다. 분방기를 작성하시는 원로 어른들께서 계신 고직사로 들어가 인사 올리고 안사연 중 한 분의 헌관을 부탁드리자 종헌관으로 영환대부님이 정해졌다.
11시 30분쯤 제학공파의 시제 봉행이 시작되었다. 집의(執儀)로 정해진 운기(雲起-容자 항렬)씨의 엄숙하고도 고풍 넘치는 낭랑한 목소리의 독홀기가 시작되고, 약 40분간의 모든 의식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약 100여 명의 종친들이 도정사 앞 너른 곳에 모여 올리는 제례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이곳 제학공 시제에는 나도 처음 참석한다. 사신례가 끝나고 음복례가 이어지면서 모든 의식이 종료 되었다. 이어서 제학공파 정기총회가 열렸다. 총회가 있기 전에 부회장님이신 南應대부님께서 안사연을 소개해 주셨고 안사연 여러분은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해 올렸다. 그 자리에서 우리 안사연의 형성 과정과 활동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고, 이번에 인쇄해 간 두 권의 책을 소개했다. 제학공파의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연혁을 정리한 책과 그동안 발견된 제학공파내 선조님들의 친필 서찰과 시들을 번역하여 편집한 <墨香>이었다. 그 뒤에는 천안시교육장을 역임한 바 있는 교관공 후손 泰炫님께서 올바른 절하는 법과 제수 진설법을 실제의 예를 보여가며 설명해 주셨다. 많은 것을 새로 배웠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노은정으로 향했다. 병천리를 벗어나며 유관순 기념관 입구 사거리에 있는 김재홍(제학공파) 송덕비를 촬영하고, 진천방향으로 약 2Km를 향하다가 병천 중고등학교 직전에서 좌회전하여 도원리로 향했다. 이곳에는 도원8경이라 하여 명승이 있다고 한다. 너른 들판이 전개되었다. 이 일대는 안렴사공파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광터골(廣基마을)이라고 한다. 약 1Km 쯤 달리니 우측으로 좁은 다리가 나온다. 작은 냇가를 따라 100m를 가니 주차된 차들로 길이 막혔다. 길옆 집에서 한 사람이 나온다. 그러자 성회대부님은 창문을 열고 악수하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 지역 거의 모두가 우리 일가들이란다. 소로길 끝에 노은정이 있었다.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정자 내부 재목들에서 족히 40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읽었다.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른다. 노은공(휘 상기)께서 부채 부치며 한시 짓고, 가야금 타며 노니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노은정 아래 바위에는 노은공의 친필인 노은정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 카메라 담당이신 영윤 대부님 사모님께서 몇 장의 기념 사진을 잘 찍어 주셨다. 노은정 옆을 돌아 밭 사이로 난 농로를 따라 200m 쯤 넘어가니 도원2리 298번지의 안렴사공파 종택이 나온다. 인사를 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의 겉은 현대식으로 보수하였으나 내부 목재들은 옛날 그대로다. 종부께서 음료수를 내놓으신다. 아무런 준비를 못해 간 우리가 부끄러웠다. 출타중이신 종손 영식님과 통화하신 성회님은 마루에 올라가 서재를 열고 족보 속에 들어 있는 옛날 호패 2개를 꺼낸다. 대추나무에 길이 약 8Cm, 폭 약 3Cm 되는 기름빛이 반지르르하는 나무였다. 거기엔 이렇게 기록 돼 있었다. 1:전면-金翰國 幼學 甲申 丙午. 후면-近東面 柯亭里 第一統 第二家, 2:전면-金命淵 英廟 甲寅 十一月 十一日 幼學. 木川 甲申. 후면-近東面 柯亭里 第一統 第二家
집 뒤를 돌아가니 사당이 있다. 개인 집 사당은 처음 본다. 목재 빛에는 古色이 역사를 말해준다. 문을 열고 들어가 위패의 독을 열었다. 전통 그대로의 방법으로 위패를 제작하여 모시고 있었다. 배례를 올렸다. 시렁 아래를 보니 두 개의 궤짝에 서적이 들어있다. 관심 많으신 태영(군)님께서 몇 개를 열어 본다. 400여 년의 세월만큼이나 책도 나이를 먹었다. 경서 몇 권이 보였다. 잘못 만지면 책이 다칠 것 같아 다시 정리해 두고 나왔다. 인사를 마치고 차가 있는 노은정으로 나오는데 주회(안)님께서 가까이 와 있다는 전화가 온다. 잠시 기다리니 도착한다. 충북 영동에서 직계 선조님의 시제를 모시고 바로 출발하여 사모님과 두 자녀와 함께 오신 것이다. 그 지극한 정성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반갑게 인사하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노은정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 길목에 현 삼부해운 회장님의 부친(휘 珽會) 묘소도 살펴보았다.
차를 되돌려 병천의 명물인 순대 음식을 맛보려 병천리로 향했다.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아우내 순대>집으로 들어갔다. 사람들로 가득찼다. 겨우 자리 하나를 마련하여 돌아앉아 전통의 맛이 넘치는 순대를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그런 중 진천에서 시제를 올리신 태영(문)님께서 아버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이곳으로 오셨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아버님에 대한 님의 효심에 가슴이 뭉클한다. 또 좀 있자니 발용(군)님께서도 도착하셨다. 이로써 계획되었던 우리 안사연 식구 모두가 다 모인 셈이다. 맛있는 간식을 소주와 함께 들었다. 시계를 보니 4시 20분이다. 서둘러야 했다. 우리 일행은 암행어사 박문수 생가로 향한다. 목천 I.C로 가는 길로 약 5분을 달리니 우측으로 박문수 생가를 알리는 푯말이 나온다. 현지에 도착하니 생가는 고풍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박어사 8대 종손이신 朴鏞會님께 인사 올리고 안으로 들어가 박어사 영정을 보고 배례를 했다. 박어사의 증조부이신 박구당에 의해 백곡 선조님의 문집이 발간된 과정을 말씀드리니 종손께 더욱 기뻐하신다. 시간은 오후 5시이다. 여기서 이제 헤어져야 했다. 아쉬운 작별의 인사는 그치지 않는다. 억지로 손들을 놓고 주회님은 청주로, 일반 승용차인 태영님(문)은 중부고속도로로, 발용님과 영환님은 경부고속도로로 향했다. 고속도로는 예상대로 정체다. 다행히 버스전용차선은 다소 나았다. 죽전 휴게소에서 일행은 발용님의 차에 옮겨 탔다.
분당에 도착하니 저녁 7시 30분이다. 이름 있는 감자탕집에서의 맛있는 저녁식사와 뒷풀이는 심신을 모두 풀어내 준다. 태영(군)님과 분당에서 작별하고 다시 발용님차로 서울로 올라와 일원동에서 윤만님과 성회님을 지하철역에서 작별하고 우리집 개포동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넘었다. 발용님은 하남시로 가셔야 한다. 오늘 운행을 책임지시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봉사해 주신 두 분(영환님, 발용님)께 큰 감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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