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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4. 11. 김행순 제공) 1. 일시 : 2005. 4. 9-4. 10(1박 2일) 2. 장소 : 경남 합천군 합천면 합천리 함벽루 일대 및 가야산 해인사 일대 3. 참석자(9명) : 상석(제), 윤만(문), 태우(군), 태영(군), 항용(제), 발용(군), 환묵(부), 행순, 명희 4. 제공자 : 글-행순, 사진-발용, 항용
하~얀 목련꽃을 시기하며 봄비가 서럽게 내리는 4월 9일 토요일 주말 저녁 6시 안사연 회원님들이 모였습니다.
함벽루 700여 년 동안의 비밀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비오는 서울을 뒤로 하고 상석 대장님께서 수레 고삐를 잡으시고 윤만, 태우, 태영, 항용, 발용, 행순, 명희 이상 여덟 명은 환하게 비를 가르며 출발했습니다.
지각대장 행순이는 또 지각했습니다. 안사연이 움직이면 조상님께서 하늘을 열어주신다고 했나요.
함벽루가 가까워질수록 빗줄기가 작아집니다. 서울을 벗어나 윤만님의 고향 감곡 이정표를 지나쳐서, 항용님의 고향 괴산 이정표도 뒤로 하고, 추풍령고개를 너머, 구마고속도로를 접어들어 논공에서 쉬었다가 합천으로 달립니다.
합천가는 동안 수레 안에서는 내내 항용님께서 준비하신 우럭과 아나고가 수레 앞뒤로 춤을 춤니다. 출발할 때의 들뜬 맘이 가라앉기도 전에 합천 이정표가 보입니다. 자정쯤 해인사 발아래 야로 마을의 벗꽃 핀 국일텔에 도착. 10일 아침 8시를 기다리며 가야산 계곡 물줄기가 빗소리인지 헷갈리며 잠이 듭니다.
10일, 맛있는 아침을 근사하게 먹고, 합천호를 돌고돌아서 9시 10분 함벽루에 도착했습니다.
함벽루에 먼저 도착하신 대구에서 오신 부사공파 환묵 종친님의 환한 미소가 먼저 반깁니다. 그 뒤로 합천신문사의 박환태 사장, 향토사학자 변용규님, 합천문화원 부원장이신 이호석님도 반갑게 맞이해줍니다.
함벽루에 오를 때는 "신을 벗으시오"라는 문구도 오늘만은 예외입니다. 700여 년 만의 재회는 신을 벗을 틈도 주지 않습니다.
▲ 부사공파 환묵(譜名) 종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건립자 김某 선조님의 某자가 영자, 돈자라는 사실을 한림대출판부에서 나온 "고려묘지명집성"이라는 책으로부터 확인되었습니다. 몰랐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는 날이었습니다.
바쁜 일정 때문에 합천신문사의 박사장님 일행은 안사연에서 준비한 함벽루의 정정자료와 기념 타올을 가지고 먼저 함벽루를 떠났습니다. 오전 10시 24분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던 비가 멈췄습니다.
처음 뵙는 환묵 종친님을 모시고 술 한 잔씩 들고 팔작지붕 아래 걸려 있는 현판의 시들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이황(李滉), 조식(曺植), 조준(趙俊), 권시경(權時經), 김시영(金始英), 조진익(趙鎭翼), 조두순(趙斗淳), 민치순(閔致純), 이범직(李範稷), 허사렴(許士廉), 이중하(李重夏), 상집(尙集), 김영헌(金永憲), 이대형(李大馨), 문경종(文璟種), 최익현(崔益鉉), 송병선(宋秉璿) , 정이오(鄭以吾), 표근석(表根碩),
특히 퇴계 이황 선생 시와 남명 조식 선생의 시는 두 개의 큰 대들보에 마주보고 있습니다. 들보에 걸려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함벽루> 오언절구를 옮겨 봅니다.
喪非南郭子 잃은 것을 남곽자같이 하지는 못해도 江水渺無知 강물은 아득하여 앎이 없다네. 欲學浮雲事 뜬구름 같은 일을 배우고자 하여도 高風猶破之 높은 풍취가 오히려 깨어버리네. (영산대 정우락 교수가 답사기에 올린 글 중에서 )
함벽루의 누각은 4개의 큰 기둥 위에, 우물정자 마루로, 정면 3칸, 측면 2칸, 2층으로 된 누각으로
5량 구조의 팔작지붕의 목조기와로 되어 있습니다. 난간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만들어 황강에 더욱 가까이 닿도록 하였습니다.
아슬아슬 난간에 기대어 사진 찍는 발용님을 윤만님께서 꼭 잡고 계십니다. 처마밑 떨어지는 빗물은 황강을 출렁이고 있습니다. 함벽루는 이 비가 그치면 바로 날개짓하여 하늘로 치솟을 것만 같았습니다.
비오는 날 함벽루에 올라보라는 문구가 생각났습니다. 한 가지 너무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함벽루까지 오는데 이정표가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합천 시내에서 합천 경찰서를 지나서 합천초등학교 쪽으로 오다가 육교가 보이면 바로 30m쯤 전에 우측골목으로 빠져서 직진하다가 합천 상회를 지나 우회전 합니다. 육교 지나자 마자 주변에 합천 한국전력과 합천 시외버스터미널이 바로 있었습니다.
이제는 팔만대장경을 보기 위하여 해인사로 출발합니다. 비오는 함벽루에 앉아 태영님께서 준비하신 시 4수를 듣고, 옷깃 깃마다 문숙공 선조님의 큰 뜻을 간직하고, 팔만대장경이 있는 가야산 자락 중턱의 해인사로 출발했습니다.
함벽루 찾아오던 수레바퀴는 급히 돌더니, 함벽루를 떠나는 수레바퀴는 뒤로 헛바퀴만 도는 듯합니다. 팔만대장경이 정말로 팔만장인지를 서로 확인해보자며 대구에서 오신 환묵 종친님의 안내에 따라 작은수레에는 환묵, 태영님이 타시고, 뒤따르는 큰 수레에는 태우, 윤만, 항용, 발용님과 행순 그리고 대장님(상석), 효령대군의 종손인 명희님이 타고 출발했습니다. 지나가는 곳곳마다 잘 정돈된 묘소와 종가집처럼 보이기도 하고 서원처럼 보이는 집들이 많습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산채비빔밥 한 숟가락씩을 번갈아 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나서 서울로 올라갈 시간을 계산하여 해인사만 구경하기로 만장일치했습니다.
물속에 비친다는 뜻의 海印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라고 합니다. 일주문[伽倻山海印寺]에 다다르기 전에 무소유의 청빈한 삶, 장좌불와의 올곧은 수행정신으로 성철큰스님의 부도탑을 둘러보며 항용 선생님의 인생무상(?)에 관한 강의를 부도탑 순례자들과 함께 들었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니 일주문이 나오기도 전에 해인사 사적비 20여 개가 보입니다.
▲ 성철스님 부도탑
귀부가 특이한 비석 2개가 보입니다. 형상이 거북이 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합니다. 또다시 걸음을 재촉하니 일주문 입구에 고사목이 여러 개가 신라시대로 일행을 데려갑니다.
일주문을 지나 鳳凰門, 解脫門, 구광루(九光樓)를 거쳐서 부처를 모신 대적광전(大寂廣殿)을 잠깐 보고 장경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장경각에 들어서는 순간 서늘한 전율을 느끼며 고려인이 됩니다. 81,258판의 대장경은 4개의 서가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습니다. 킁킁 냄새 맡으며, 눈도 비벼봅니다.
내려오는 길에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환묵님과의 만남을 기약하며 막걸리 잔을 부딪쳐봅니다. 벚꽃이 활짝 핀 가야산 입구를 내려오면서 잠시 차를 세우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앞서 멀어지는 환묵님의 차를 보며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만나자고 약속합니다. 오후 4시 30분 1084번 국도를 시작으로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잠시 칠곡휴게소에서 쉬었다갑니다. 수레 뒤에서는 또다시 주거니 받거니 고로쇠약수와 함께 벚꽃을 띄운 잔이 흔들거립니다. 이어서 종친님의 노래는 목포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부산으로 오르락내리락 흥이 한껏일 때 정중 종친님께서 멀리서 노래소리 들으시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밤 9시 40분 분당에 도착해서 감자탕으로 저녁을 먹고 뜨거웠던 1박 2일의 역사를 마감합니다. 상석 대장님 감사합니다. 혼자서 수레를 끄시느라 힘드셨죠.(*^_^*)
<글 김행순 사진 김발용>
* 涵碧樓에서 (2005. 4 . 14. 태영(군) 제공)
우리가 함벽루를 찾아가던날은 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합천읍에서 함벽루까지 찾아 들어가는 길에는 안내표지판이 없어 어려움을 격는다. 입구에서 정중씨를 통하여 알게된 부사공파의 성환(보명:桓默)님께서 반겨 주었다. 계단을 타고 강가로 내려가니 빼어난 자태의 누(樓)가 나타났다. 미리 약속을 한터여서 이 고장의 신문사 사장님. 문화재위원님등이 먼저 나와 누상(樓上)에서 가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반갑게 맞으며 간단한 자기 소개와 인사를 나눈뒤 윤만님이 함벽루에 대한 새로운 역사발견 자료를 발표 함벽루 창건자 김모는 문숙공 김영돈임을 명백히 확인 하였고 이어서 합천신문사 박환태사장님의 함벽루와 연호사. 대야성에 관한 해설을 들었다. 함벽루는 합천 팔경중 제5경으로 합천읍 황강변에 자리해 있으며 고려 충숙왕8년(1321년)에 건립하여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의 모습이라고 한다 설명을 마친 박환태사장님 일행은 또 다른 지역의 행사 때문에 부득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하여 함께 기념촬영을 마친후 작별을 하였다. 우리는 그 분들을 보내고 누(樓)에 둘러 앉아 잠시 맥주와 소주로 흥을 돋구며 높이 달린 이름난 선비들의 현판을 바라 보느라 목운동 하기에 바쁘다. 조선시대 대학자인 퇴계이황 남명조식. 우암송시열의 글이 현판으로 걸려있고 뒷편 암벽에는 우암선생의 친필 涵碧樓가 크게 새겨져있다.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듯 하고 단청이 현란하여 봉(鳳)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고 쓴 안진의 글은 몇 백년이 흐른 오늘에도 유효하다. 누에 올라 난간에 앉으면 난간 아래로 강물이 흐른다. 한컷도 안 놓치려는 발용님의 카메라가 난간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춤을 춘다. 그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수 없다. 소중한 마음으로 꼭 잡는다. 안진의 기문에 ‘흰 구름이 나는데 산이 푸르르네. 밝은 달 돋는데 물이 출렁출렁. 노 위에서 사시로 보아도 부족하고, 아득할손 나의 회포 하늘 저쪽이네.’ 하였다.
함벽루의 뒤 절벽위로는 그리 높지는 않으나 삼국시대 신라의 변방으로 군사 요충지 대야성이 자리했던 비봉산이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오른편 바로 옆엔 신라고찰 연호사(삼국시대 백제와의 전투에서 순국한 신라 군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창건했다고 박환태 합천신문사 사장은 설명한다.)가 樓의 풍치를 더 해준다. 막걸리 일순배가 돌자 항용선생님의 삼행시 제창을 제안 하였으나 시간 관계상 훗날로 미루고 필자가 준비해간 함벽루에 대한 시를 낭독하는것으로 대신한다
민사평의 시에 ‘한벽(寒碧)이 서로 엉켜 협구(峽口)가 밝은데 樓에 오르는 가느다란 길 구름속에 비꼈네. 올라 구경할줄 아는 것은 누구의 안력인가 모름지기 푸른 벼랑을 쓸고 성명 적으리’하였고
남명의 시에 ‘喪非南郭子 / 남곽자 같은 무아지경에 이르지는 못해도 江水渺無知 / 흐르는 강물은 아득하여 앎이 없다네. 欲學浮雲事 / 뜬 구름같은 일을 배우고자 하나 高風猶破之 / 높은 풍취가 오히려 깨어 버리네.’ 하였다.
천하의 시인 묵객을 불러 모아 第一江山을 노래한 수많은 현판들, 얕으막한 비봉산아래 연호사 풍경소리에 황강의 맑은 물은 너울너울 춤을 춘다. 푸르름에 잠긴 함벽루를 비추면서……
누가 나를 불러 이곳에 앉혀놓고 함벽루의 운자를 띄워 삼행시를 지으라 했나. 함涵: 함벽루는 문숙공의 혼이 서려있는 유서 깊은곳 벽碧: 벽에는 절경임을 노래하는 시판이 가득하고 루樓: 樓아래 맑은 물은 또 하나의 함벽을 비추네.
어찌 700여년의 세월을 넘나들은 함벽루의 절경을 단 몇글자로 표현할수 있을까! 어찌 이 짧은 시간에 선현들의 필체를 다 헤아릴수 있을까! 누각을 내려와 남명이 합천 군수 이증영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썼다는 ‘이영공유애비’가 있는 입구쪽으로 갔다.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백성에 대한 남명의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옆에 서있는 각종 공적비. 순절비. 선정비등을 살펴보면서 아쉬움을 뒤로 한채 가야산 해인사로 출발하며 간단히 소감을 적는다.
2005년4월 10일 오전에 함벽루에서 金泰榮
<함벽루 방문 기념 시조 두 수> (2005. 4. 29. 항용(제) 제공)
함벽루 초혼가(涵碧樓 招魂歌)
(二00五. 四. 十. 安思硏 訪涵碧樓時 作時調二首) 金恒鏞
Ⅰ. 함벽루(涵碧樓)(*주1) 초석(礎石) 남은 영혼(靈魂), 벚꽃으로 피어난 봄
황강(黃江) 물 칠백(七百) 굽이 흘러온 누각(樓閣) 낙(落)… 수(水)…
이제사 창주김영돈(創主金永暾) (*주2) 불밝히는 안.사.연아 (*주3)--
Ⅱ. 해인사(海印寺) 대장경(大藏經)을 호국합장(護國合掌) 독경(讀經)하는가
대야성(大耶城) (*주4) 푸른 강물 풍류(風流) 적셔 누각(樓閣) 짓는가
댕-그-렁--- 연호사(烟湖寺) (*주5) 풍경(風磬)에 되살아 오는 님[文肅公]이시여--
2005. 4. 10. 처음 짓고. 2005. 4. 29. 완성하다.
주1)함벽루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누각. 경남문화재자료 제59호(1983년 7월 20일 지정). 이 누각은 고려시대인 1321년(충숙왕 8) 합주 지주사 김영돈(金永暾)이 창건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 건물은 이층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5량(樑) 구조의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다. 처마의 물이 황강에 바로 떨어지는 배치로 더욱 유명하며 내부에 이황(李滉), 조식(曺植), 송시열(宋時烈)의 글이 씌어진 현판이 있다. 누각 뒤 암벽에는 ‘함벽루(涵碧樓)’라고 각자(刻字)한 글씨가 있는데, 이것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주2)창주(創主) 김영돈(金永暾) : 1285년(충열왕11)---1348년(충목왕4) 충숙왕 8년(1321년)에 지합주사(知陜州事)로서 함벽루를 창건한 분이다. 자(字)는 휘곡(輝谷). 호(號)는 균헌(筠軒) 또는 구봉(龜峰)이다. 장경공(章敬公) 정해(鄭土皆)로 부터 사사(師事)하였다. 1305년(충열21) 문과에 제 3등으로 급제하여 강릉부 녹사(江陵府 錄事)가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1)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을 시취하였다. 1342년(충혜왕 3) 공은 조적(曺由頁)의 난을 평정할 때 아우인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와 함께 이에 대비하는 상소를 올렸고, 성병의상찬일등공신(誠秉義翊贊一等功臣)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 교서의 글에 이르기를 "적신 조적이 난을 꾸미고 난 후에 과인이 수도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간신 여당이 거짓말로 날조하여 사람을 모아서 국가의 난을 모의하였지만 시종하는 신하들은 시종 절의를 지켜 과인을 보좌하고 협조하였는 바 그 공은 너무도 막대하고 커서 잊을 수가 없도다. 그것으로써 그대 등을 일등공신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의 재상인 국노(國老)에게 붙잡히매 공은 왕의 죄를 사면해 달라는 상서를 올리려 하자 많은 사람들의 논의는 같지 않았다. 공은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함을 청함은 마땅하고 급한 일이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사와 여지승람에 보인다. 충혜왕때 삼중대광첨의사사(三重大匡僉議司事)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1346년(충목왕2)에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과 옷, 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충목왕 때(1347년)에 좌정승 판정치도감사(左政丞 判整治都監事-정치도감의 長 . 整治都監-1347년 충목왕 3년에 지방 토호족들이 과도하게 소유한 田土를 개량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으로 이듬해 없어짐)를 지냈다. 이때 지방 토호들의 과도한 토지 소유를 없애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반발 세력들과 기황후(奇皇后-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의 4촌 아우(奇三萬-기황후의 배경을 믿고 횡포가 심하자 고려에서 옥에 가두어 죽임)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결국 공은 의도한 목표가 좌절되자 홧병을 앓다가 충목왕 4년 7월 13일 64세로 몰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묘는 풍덕(豊德) 앙동산(仰洞山)이나 실전하여 충남 천안시 병천면 백전(栢田)에 설단(設壇)했다.
주3)안.사.연 : ‘안동김씨 사이버 학술연구회’의 약칭이다.
주4)대야성(大耶城)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 있는 고대신라 때의 고을(성) 이름이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변한(弁韓)에 속하여 다라국(多羅國). 초팔혜국(草八兮國). 산반계국(散半溪國) 등의 부족국가들이 있었으나 1세기 말~2세기 초 대가야국에 병합되었다. 신라 초기 대가야국에 속하였을 때 국내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으므로 대야성이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와 백제, 신라와 후백제, 왕건과 후백제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남쪽 절벽 아래에 함벽루, 연호사가 있다.
주5)연호사(烟湖寺)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203에 있는 절로서 함벽루 바로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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