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글:상석,사진:태영,항용) 2006년 7월 장마전선이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틈을 타 여말,선초의 우리 역사에서 일본정벌길에 오르셨던 안김의 중시조이신 충렬공(휘方慶)과 도첨의공(諱 흔),문영공(휘 恂),익원공(휘士衡) 선조님의 동정(東征:일본을 침) 속에 감추어진 애환과 유업을 기리고자 안사연에서 일찍부터 기획하여 추진해 온 대마도(對馬島)를 원정하고 돌아와 다음과 같이 후기를 기록합니다.
물론,대마도는 선조님들의 공격 루트의 길목에 불과하지만 여건이 불가피하여 이키도(壹岐島)와 하카타(博多) 등 당시의 전선을 찾아가는 것은 숙제로 남기고 다만 대마도 현지에서 여행사의 코스를 변경하여 선조님들과 관련한 고려사,원사,일본사를 바탕으로 여몽 연합군의 공격지점,착륙지,주둔지,행적 등을 추적하여 둘러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둡니다.
대마도 원정대--------------------------------------------------------------
봉석(익,재行),상석,주회,태우,태영(원정 총괄기획),항용,행순(자료집을 엮음)--이상 7명. 금요일(14일) 저녁 20:30에 서울역을 출발한 KTX가 굉음을 내며 잠든 도시의 적막을 깨고 11:55에 부산역에 일행을 내려 놓고 사라집니다.
<행순씨가 애써 준비한 탐사 자료집>
<서울역에서 프랫홈으로>
<KTX를 타고>
<KTX내부>
도심을 벗어나 해안가의 찜질방에서 잠시 몸을 누이고 뒤척이다가 일어나 아침을 맞습니다.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항구에 도착하여 일행을 안내할 가이드(진혜인)를 만나 출국수속을 밝고 있는 사이에 대구에서 새벽같이 달려오신 봉석님께서 반가운 얼굴로 나타나십니다.
<부산에서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광안리의 야경>
<이튿날 아침 광안대교를 지나며>
봉석님은 최근 출간한 <붉은바다 열전 김방경>의 작가로 이번 행사에 동행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이노우에 야스시가 쓴<풍도(風濤-후에 검푸른해협으로 번역본이 나옴)> 이후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나온 충렬공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작가입니다.서로 인사를 마치고 준비한 자료와 유니폼을 전합니다.
<부산항 여객터미널>
<부산항에서 일행 모두가>
< 부산항 옆의 영도다리>
<부산항 주변>
승선을 하여 창가에 자리를 잡아 오순도순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눈앞에 대마도가 다가옵니다.
<우리가 탄 배-씨플라우어>
<배의 내부>
<배 안에서>
<대마도에 다가가며>
오늘 입도는 대만 남동부의 이즈하라항(嚴原港)이라서 북동쪽을 우회하느라 세 시간 삼십 분이 지나서야 도착이 이루어졌습니다.작금의 정국에 불안을 느낀 일본측의 까다로운 입국심사로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 땅을 밟아봅니다.
<대마도 항에서의 입국 수속>
<배의 앞부분>
<대마도항 입국수속대 옆의 광고판>
<대마도항 입국사무소>
낚시꾼들과 자전거 캠핑족들로 어수선한 항구를 뒤로하고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짐을 맡기러 이동합니다.안사연 일행은 중요한(?,잠시 후 밝혀집니다) 사안으로 모두가 배낭을 맨 채로 가이드를 따라 나섭니다.
<대기한 차량과 가이드(미스진)>
습한 열기를 머금고 있다가 토해내는 섬공기가 사람을 쪄대는 통에 걸음이 자꾸만 느려집니다.도시는 모두가 잠들어 있는 지 숨죽인 듯 고개숙인 어두운 지붕 아래엔 늙은 고양이가 맥없이 자빠져 졸고 있고 어리친 개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회색도시에 그나마 도심을 가로지르는 냇가로 복어를 비롯한 작은 고기떼만이 이리저리 조류에 휩쓸리며 나뒹구는 색다른 정서를 풍기며 우리 일행을 반겨줍니다.
<이즈하라 시내 중앙을 흐르는 냇가>
가정집들은 구릉사이로 난 틈에 기대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고 강가에 의지해 지은 상점과 음식점,주점,여관 건물들은 깨끗한 거리와 어울려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을 안고 키우며 서 있습니다.초입에서 점심으로 짬뽕을 먹었는데 우리의 우동과 비슷한 맛이었습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이즈하라의 팔번궁(八幡宮)신사인데 기록에 의하면 1274년 10월 5일 제1차로 여몽연합군이 들이칠 때 예언을 해 주듯이 이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합니다.신사 입구엔 한반도의 토종개(삽살개로 추정)가 아(수컷,입을 벌리고 있다),웅(암컷,입을 다물고 있다)하고 좌우로 서 있습니다(신사마다 한결같다).
<팔번궁 신사>
<우리의 삽살개를 본 떴다고 하는 신사 입구의 수호신상>
<신사 내부>
<시내 한 집의 무궁화꽃>
<시내 길>
다음으로 에도시대(1600-1868)에 일본을 방문하는 통신사의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 고려문(高麗門)을 찾았습니다.하지만 현재의 것은 1989년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고려문 바로 옆에 <조선통신사의 비>가 서있고 그 뒤로는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이 있습니다.
<고려문 안의 조선통신사비>
<통신사 앞에서>
<민속자료관의 자료집에 있는 통신사 행렬도>
<자료관 자료집 속의 조선 문화재들>
민속자료관을 내려와 우측으로 약간을 올라가니 <이씨왕조 결혼 봉축비>가 나옵니다.여기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의 정략결혼과 함께 이혼,귀국 등 순탄하지 않은 삶의 아픔이 묻어 있습니다.
<안내표와 표석>
<이왕조 기념비 옆에서>
가이드와 대화를 나누다가 계속 누르고 있던 궁금증을 해소하려 물어 본 원통사(園通寺)에 대해 갑자기 생각난 듯 할아버님의 "충렬"字와 연관하여 들어 본 바가 있다고 하여 좌중은 일순간 침묵이 흐른 뒤 갑자기 술렁이고 흥분합니다. 원래 원통사는 코스에 없는데 대마도에 대해 공부하다가 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하다고 가이드가 이야기를 합니다.
안김에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 곳에 충렬공의 영정이 모셔져(악독한 몽골군과 상반되어 충렬공의 인품을 흠모한 현지인이 그렸거나 또는 임란시 들어 온)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내일 일정을 정해진 시간에 소화해 내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보로 짜여진 일정을 동행하는 오선생(해주인,부인은 고령신씨,子수현군)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를 대절(봉석님이 1만엔을 지불)하여 사스우라(佐須浦)로 향합니다. 여기가 곧 지금의 코모다이니 1274년 10월 3일 합포를 출발한 여몽연합군이 이틀 후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상륙한 곳입니다.
코모다 해안을 거슬러 강의 상류로 올라가니 <법청사> 나옵니다.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가 외쳐댄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없애라!"는 명령을 지시 받은 몽고병에게 희생당한 일본 막부에서 보낸 제1대 대마도주인 종조국(宗助國)의 찢긴 사지 중에 몸통을 모신 어동총(御胴塚)과 함께 경내에 두부(머리)를 모셔 놓은 <관음사>가 있었습니다.
온전하게 수습할 수 없었던지 후손들이 지금도 종家의 합장묘로 이장을 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었습니다.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그 때의 참상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동네 아낙이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나와 개울에서 첨벙거리며 웃고 있는 풍경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1274년 몽고군에게 살해당한 대마도주 조종국 무덤>
코모다 해안에 위치한 신사(神社)로 갑니다.여기에는 1,2차에 걸쳐 여몽연합군에게 희생당한 전사자를 모셔 놓았는데 표지판과 비문에 원구(元寇)라는 글자가 많이 보입니다,아마도 이때부터 원에 대한 두려움의 표시로 "모쿠리"(몽골)가 나오고 고쿠리(고려)가 등장하였을 겁니다.
<소무전빈 신사입구>
<신사 입구에서>
<원군 침공요도 안내판>
<안내판>
<려원군의 일본 격을 설명하시는 봉석종친님>
<신사>
<원구칠백년평화의 비>
<신사>
<신사 내부의 액자들-모두 려원군과의 전투모습들임>
<방명록에 기록하는 상석 종친>
<신사 뜰의 비석, 시를 새긴 듯>
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갑니다.아까 내려오는 길에 보아둔 널찍한 자리를 찾아 진혼제(고유제)를 지내려는 것입니다.김전(金田)소학교 앞의 개천 가장자리를 택하여 배낭을 열어 각자 준비해 간 프랜카드와 제수를 꺼내어 진설을 하고 제를 올립니다.
<려원 연합군 1차 상륙시 진격해 가던 강 줄기>
<고유제 준비 모습>
<현수막, 위패, 제수는 태영 종친이, 소설은 봉석종친이 준비함>
<현수막>
고유제 순서
참신-강신례-헌관헌작(獻官獻爵)-정시저(正匙箸)-독축(讀祝)-헌관재배(獻官再拜)-낙시저,퇴잔(落匙箸,退盞)-사신(辭神)-고예성-철상
초헌관:상석, 아헌관:봉석, 종헌관:태영, 좌집사:주회, 우집사:태우, 축관:항용, 첨작:海州人吳氏
-------------------------------------------------------------------------------------------
축문(祝文)
維檀君紀元 四三三九年 歲次 七月 十五日에 안동김씨의 중시조이신 충렬공 할아버님이시여!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거친 풍랑을 헤치고 만백성의 안녕을 도모하시고자 한달음에 달려오신 이 땅 대마도에 안사연 일동이 비로소 찾아와 존령께서 남겨주신 유업을 기리고자 삼가 엎드려 고하나이다.
할아버님이시여 바라옵건대 앞으로 저희 후손들의 영원한 안녕과 번영을 굽어 살펴 주시옵고, 할아버님의 휘하 장졸로서 가련하게 이곳 일본에서 폭풍우에 순절하신 영령들을 위로하시어 영혼이라도 고국으로 돌아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시옵기를 간절히 기원하옵니다.
아울러 이곳에 산재되어 있는 할아버님의 유적을 찾아내어 700년 전의 역사를 오늘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현양하고자 하는 우리 안사연의 이번 대마도 탐사활동이 부디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이에 맑은 술과 포과를 올리오니 歆饗하시옵소서.
忠烈公 二十三代孫 相錫 謹撰, 謹書, 二十六代孫 恒鏞 奉讀.
----------------------------------------------------------------
<초헌관-상석>
<독축-축관 항용>
<아헌관-봉석>
<종헌관-태영>
<고유제를 마치고>
제를 마치고 김전(金田)소학교 교문 앞에서 이곳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충렬공께서 주둔시에 최고사령부를 설치하신 장소가 아닐까 하는 의문(마치 강화의 온수리가 충렬공의 직함에서 나온 "원수"의 와전에서 유래한 것과 같은)을 품은 채 차를 몰아 최익현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슈젠지(修善寺)로 향합니다.
<금전(金田) 소학교-'金田'의 어원연구가 필요함>
수선사를 빠져나오자 고온다습한 도심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주점을 알리는 등을 내걸고 있는 골목은 비교적 한가하고 정겹기만 하였습니다.저녁을 일식 뷔페로 하고 언덕을 올라 태평양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호텔 정원에서 오늘 일정과 자체평가의 시간을 갖고 편안히 누워 잠을 청합니다.
<최익현 선생의 유적지-수선사에서>
<이즈하라 시내로 돌아와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름다운 침실 문앞으로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묵은 대아호텔 앞을 산책합니다.
<호텔 앞 정경>
<환상적인 대아호텔>
<호텔 앞 전망대 아래의 장관>
<전망대에서 일동 촬영>
<태우종친>
<가이드(중앙)과 함께>
<산책로를 따라>
<호텔 아래 마을의 한 슈펴 진열된 과일들>
서둘러 만제키바시(萬關橋)로 갑니다.1905년 5월 아라사(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침하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 곳으로 군사상 인공으로 협곡을 갈라 대마도를 상,하로 만들며 운하를 건설한 것은 지금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위함이 아니라 전술의 방편이었다는 것에 동아시아의 아픔이 시작 된 문제의 장소입니다.
<만관교 아래의 운하>
<만관교의 어제(좌)와 오늘(우)>(자료집에서)
<운하를 배경으로>
<항용 종친>
<주회 종친>
<만관교 옆의 불상들>
이어서 에보시다케(烏帽子)전망대로 올라가니 동서남북이 확 트인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실로 절경입니다. 가는 곳마다 한글로 표기된 해설판을 보며 이들의 한국 관광객 유치 열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전망대를 내려와 아래쪽에 위치한 와타즈미(和多都美)신사로 갑니다.
먼 옛날의 전설에 의하면 신라에서 낚시를 하던 총각이 바늘을 따라와 여자를 만나 아이를 잉태하였고 달이 차서 그 여자는 출산을 할 때 지켜보면 안 된다고 했으나(?,한결같은 신화) 결국은 지켜보았고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한 여인이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알고보니 그 여자는 용의 딸로 밝혀졌다.
용녀가 출산을 한 후 남겨진 사내아이는 이곳의 영주가 되었다고도 하고 본토로 들어가 국왕이되었다고도 하며 용녀가 잠수한 자리엔 용비늘을 한 돌이 남아 있으며 신사 안의 소나무 뿌리는 기이하게도 용의 등줄기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라 땅이었던 북쪽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다섯 개의 도리(일주문과 생김새가 유사하고,어원은 솟대를 상징하는-이승과 저승의 연결고리인-"돌리다","돌다"를 의미)를 뒤로하고 충렬공의 영정과 관련한 구전 속의 <원통사>로 달려갑니다.
<와타즈미(和多都美)신사>
<신사 안의 배-신라인이 타고 온 배인 듯)
<신사 내부>
<신사에서 바다 북쪽으로 향한 도리들>
<신사 옆의 반송에서 상석 종친>
<도리 앞에서>
<이날 점심에 먹은 특식: 一休쇼바(메밀)>
<놀이공원에서>
지금껏 보아온 일본의 민간신앙이나 토테미즘, 조상숭배 성격의 신사형식이 아닌, 불상을 모신 사찰인 <원통사(圓通寺)>에 이르니 선초에 여섯 번에 걸쳐 일본 통신사로 다녀간 이 예(李 藝)를 기념하는 비(碑)가 후손들(학성이씨)에 의해 세워져 사찰 앞에 모셔져 있습니다.
<원통사 전경>
<이예의 공적비와 유래비>
<불허훈주입산문>(매운 음식과 술의 반입을 금하는 비>
<원통사 표석>
<원통사>
<원통사의 범종과 문양>
<내부 전제 모습>
<내부의 불상>
<원통사 옆의 큰 은행나무>
<일동이 원통사 앞에서>
충렬공과 관련하여 기록을 물었으나 주지승은 출타 중이라 알 수 없었고 다만,연락처를 물어 현지에 도착해서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출국할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끝으로 한국전망대에 올라 저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부산을 바라보며 서둘러 내려옵니다.내려오는 길에 스무 평 남짓한 밭을 일구어 고구마를 심어놓은 밭고랑을 보며 척박한 대마도의 자연환경과 함께 이땅을 밟고간 여러 선인들을 생각해 봅니다.
<전망대에 있는 조선 역관 순란비>
<순란 사적 해설비>
<조선역관 순란비 옆의 바위에 새겨진 순란도>
<전망대> (밝은 날은 부산이 보인다고 한다)
<전망대에서본 부산의 야경>(전망대 사진)
하타카쯔(比田勝)에서 부산으로 되돌아 가는 배에 몸을 싣고,여말선초에 수염을 휘날리시며 전함을 몰고 호령하시던 선조님들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일본 대마도항에서>
<부산역에서 해산하며>
<참가자의 사인을 한 행사 현수막-대종회 서고에 보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