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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안사연 여름캠프 해설자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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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47 조회1,0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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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8. 19 ~ 8. 20

연천·파주지역 일원




제5회 안사연 여름캠프

▣ 연천 : 숭의전·경순왕릉·대안군 단소

▣ 파주 : (군)칠정문중·자운서원·반구정


안동김씨 사이버학술연구회

(이 자료는 안동김씨홈페이지 안사연 회원 연구자료를 기초로 엮었음)



- 목      차 -


Ⅰ. 제5회 안사연 여름캠프계획


Ⅱ. 숭의전


Ⅲ. 경순왕릉

    1. 경순왕

    2. 경순왕릉

    3. 경순왕 영정

    4. 경순왕 유적

    5. 경순왕 전설

    6. 경순왕 배위

    7. 경순왕 자녀


Ⅳ. 대안군(휘 은열) 단소


Ⅴ. 자운서원

    1. 자운서원

    2. 자운서원묘정비

    3. 사임당 신씨 묘

    4. 율곡 이이선생 묘


Ⅵ. 파주 군사공파(칠정문중) 유적지

    1. 선유리<영모재>

    2. 막적동<입향조 토산공(휘 삼노)>

    3. 장산리

    4. 연풍리

    5. 방축리<직제학공(휘 진)>

    6. 광탄<통제사공(휘 영수)>


Ⅶ. 반구정

    1. 황희선생유적지

    2. 반구정

    3. 방촌 황희선생 묘

Ⅰ. 제5회 안사연 여름캠프계획


<1일차> 8월19일(토)

- 08:00 잠실종합운동장역 7번 출구 집결, 인원점검, 명찰부착(상석)

- 08:30 출발, 버스 내에서 참가자 소개(항용), 일정안내(태영), 해설집 배부(윤만)

- 10:20 숭의전 도착, 해설(윤만), 제수진설(태우), 집례(영환), 독축(항용)

- 11:20 경순왕릉 도착, 해설(윤만), 제수진설,(태우), 집례(영환), 독축(항용)

- 12:00 대안군 영단 도착, 해설(윤만), 제수진설(태우), 집례(영환), 독축(항용)

- 12:30 중식(콩 한식 뷔페 : 031-959-3360 적성면 두지리)

- 14:30 식당출발, 숙소(유일레저)로 이동.

- 15:20 유일레저 도착 방 배정하고 여장을 품.

- 16:00 자유시간.

- 17:00 퀴즈대회 및 백일장(참가자전원)시상은 다음날.

- 19:00 석식 후 자유시간(예절교육 및 뿌리교육)

- 22:30 취침.


<2일차> 8월20일(일)

- 07:00 기상, 세면.

- 08:00 아침식사.

- 08:30 산책.

- 09:30 자운서원으로 이동, 해설(윤만)

- 10:30 문산 칠정문중으로 이동.

- 11:00 입향조 토산공(휘 삼노) 및 자산공(휘 윤정) 묘소 참배, 집례(영환)

- 11:30 칠정문중 장학행사 참석.(안사연 및 홈페이지소개 : 항용)

- 11:50 군사공파 칠정문중 기부금 수혜(영환)

- 12:30 중식(작은성) 뷔페식.

- 13:00 이벤트행사(가수초청).

- 16:00 반구정(황희 정승 묘)답사, 해설(윤만)

- 17:00 귀경.

- 18:30 잠실종합운동장 도착(석식 겸 평가회)

- 20:00 해산.


Ⅱ. 숭의전(崇義殿)


○ 지 정 별 : 사적 제223호(1971.12.31)

○ 소 재 지 :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10

○ 관리단체 : 개성 왕씨 종친회

○ 건    물 : 正殿(50평), 移安廳(8.7평), 陪臣廳(13.98평), 典祀廳(8.17평), 仰巖齋(13.98평)

             庫直舍(15.64평), 內神門(3칸), 外神門(1칸) 雲鳥門(1동), 夾門(3동 3칸)


  아미산 자락의 품안에 아늑히 자리잡아 검푸른 임진강을 바라보며 창건이래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숭의전은 고려 태조를 비롯한 3왕조(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조 충신 16공신(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단군과 고구려시조 동명성왕)과 숭인전(崇仁殿 기자), 경주의 숭덕전(崇德殿 신라 시조) 충남 직산의 숭렬전(崇烈殿 백제 온조왕)등과 같이 조선시대에 역대 왕조의 시조(始祖)를 봉향하던 곳이다. 문종 때에 중건되었고, 문종 때 고려조의 개국공신 복지겸 외 15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고 숭의전이라 하였다.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향을 지내고 있으며, 현재 관리인이 직접 거주한다.


  볼거리로는 숭의전 내에 수령이 300-500년 정도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20m 둘레가 4.7m이고 조선 문종 2년(1451년) 고려 왕씨 후손이 심었다고 전해오는데,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까마귀가 모여 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숭의전 동쪽에 잠두봉(蠶頭峰)이 있는데 임진강에 수직으로 솟은 바위 봉우리로 그 형태가 누에의 머리와 닮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잠두봉 절벽에는 조선후기 마전군수를 역임했던 한문홍(韓文洪 1787-1790)의 칠언율시가 석각되어 있다.


  숭의전 입구에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과 철원을 왕래하면서 그 중간 지점이었던 이곳 앙암사(仰巖寺)에서 쉬면서 마셨던 우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숭의전 서쪽에 도동박이라는 개울이 있는데 조선 초 숭의전에서 각종 제기와 귀중품을 훔쳐 달아나던 도둑이 온몸에 땀이 젖도록 밤새 도망했으나, 날이 밝고 보니 멀리 못가고 이곳에서 맴돌고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고 장물을 모두 되찾은 곳이라 한다.

  숭의전 앞 임진강에 있는 깊은 소인 종못(鐘淵)이 있는데 명주실 한 꾸러미가 들어가는 깊이라 하는데 이 못은 삼국시대부터 지금의 숭의전 자리에 있었던 앙암사의 범종이 이곳에 빠졌다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자세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상징 이였던 종묘사직을 없애기 위해 송도의 종묘에 봉안되어 있던 고려왕들의 위패를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배는 물 흐름과 반대로 임진강 상류 방향으로 역류하며 스스로 삭녕 지역까지 올라가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동이리 썩은소에서 하루를 정박한 후에 3km 아래에 있는 앙암사 석벽(잠두봉) 아래로 떠 내려와 머무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 있던 앙암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철원과 개성의 중간지점이며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이곳에 자주 머물며 기도하던 왕건의 원찰(願刹)로 고려왕들의 위패를 실은 배가 앙암사 아래 머무르게 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닌 신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 밤 심한 폭우와 함께 천둥 번개가 앙암사를 때려 절은 형체를 알 수 없게 파괴되어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 버렸다 한다. 당시 마전군수는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 이듬해인 조선 태조6년(1399) 앙암사가 있던 그 자리에 배에 실려 있던 고려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다.

  또한 앙암사가 벼락에 파괴될 당시 경내에 있던 큰 범종이 임진강으로 굴러 물 속에 잠겼는데 그 후 이 못에서 국난(國難)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져 미리 예견했다고 하여 이 못을 종못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 문헌에 의하면 수면이 잔잔한 날 잠두봉 정상에서 임진강을 내려다보면 그때 강속으로 잠긴 범종을 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 발행/1997/자료참조》


【숭의전을 마전에 세우게 된 이유】

  예전의 마전 고을은 한가롭고 궁벽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숭의전이 이곳에 있게 되었으므로 마전군으로 승격되었지만, 이름만 군이나 현이었을 뿐 관사도 초가집이었고 사람도 별로 살지 않았던 시골이었다. 오죽하면 이곳을 지나는 선비들이 관사로서는 보기 드물게 초라한 초가집에다 인적도 드문 광경이 특이하였으면 시로 읊었을까. 연산군의 폭정에 조강(祖江)에 몸을 던진 당대의 뛰어난 시인 정희량(鄭希良, 1469~1502)·김주(金澍, 1512~1563)가 마전(麻田)을 지나면서 객관에 궁벽한 시골 마을의 정경을 시로 남겼다.

  이태조가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를 헐고 이렇듯 궁벽한 시골에 고려왕들의 위패를 그것도 극히 일부로서 왕태조와 7명의 위패만을 외진 앙암사에 옮기게 한 것은 분명 여러 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고 행한 포석이라 생각된다. 고려의 유민들이 전 왕조에 대하여 미련을 갖지 못하도록 개경에서 멀리 떨어지고 외진 곳, 더구나 그곳은 고려태조 왕건과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절이기에, 전조를 예우한다는 명분을 세우고 고려 유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실리가 있기에 전조의 사당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최근까지도 숭의전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지금 현재 마전 삼거리에서 똑바로 길이 나기 전까지는 화우고개 정상에서 다시 골짜기 길을 따라 오솔길을 내려오던지 아니면 고개를 넘어가 백학저수지 가기 전 아미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다시 되짚어 와야 했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일부러 찾아보기 전에는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숭의전 부사 왕순례】

  허균(許筠)의 형인 허봉(許篈)이 조선 시대 야사(野史)를 묶어 편찬한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의하면 왕순례는 제우지(齊牛知)라고 변성명을 하여 공주에 숨어 살았는데 어느 날 밭을 갈다가 이웃 사람과 밭 경계를 가지고 다툼이 벌어지더니 이웃 사람이 관가에 왕씨라고 일러바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이 충청도 관찰사에게 알려지고 충청도 관찰사는 문종 2년(1452) 3월에 역마(驛馬)를 보내주고 나라에서는 의복ㆍ갓(笠)ㆍ신ㆍ안장 얹은 말(鞍馬)과 쌀ㆍ콩을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왕씨의 후예인 왕우지를 공주에서 찾아내자 조정에서도 바로 왕씨의 후사가 봉사하는 조건을 본격적으로 논의하여 문종 임금에게 올렸다. 문종은 의정부에서 일목요연하게 작성해서 올린 절목(節目)을 보며 흡족해 하며 예조에 그대로 하도록 명을 내려 숭의전을 짓고 봉사자를 정하게 하였다.


【잠두봉 마애시】

 重作 崇義殿     (숭의전을 중수하고)

麗祖祀宮四百秋 / 숭의전을 지은 지 4백년이 되었는데

誰敎木石更新修 / 누가 목석을 가르쳐 다시 짓게 하는 고

江山豈識興亡恨 /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오!

依舊蠶頭出碧流 / 예전처럼 잠두봉은 푸른 강물을 보내고 있구나!

往歲傷心滿月秋 / 지나간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如今爲郡廟宮修 / 지금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중수 하였네.

聖朝更乞麗牲石 / 본조에서 다시 고려조에 사당을 지어 주었으니

留與澄波萬古流 / 숭의전은 징파강과 함께 머물며 만고의 흐름을 이어가리라. 

                 今上 十三 季 己酉 仲秋 郡守 韓文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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