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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안사연 여름캠프 해설자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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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48 조회1,0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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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3>

(3) 황남묘와 옥새바위

① 황남묘(皇南廟)

1627년(丁卯. 조선 인조5년) 皇南廟.

慶尙道 觀察使 荷潭 金時讓(1581-1643)이 重建하기를 啓請(임금께 올리는 글)하였고, 儒生 金聲遠 등과 琴鶴山 東泉村 아래 祠堂을 重建하고 해마다 祭享을 지내며 精誠을 表하는 香火(祭祀)가 끊이지 않았으나 畵像을 模寫할 길이 없어 位牌를 모셨음.

禮曹에서 差出한 參奉 一人으로 祭享을 받들게 함. 祭奠은 官에서 擔當하고, 변(대죽+邊-제기) ,豆 各 七器로 限定함.

② 옥새바위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 단지골에 가면 옥새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큰 바위위에 넓적한 바위가 올라앉아 있는데 서기 935년 경순대왕이 신라를 고려에 양국하자 태자(鎰:마의태자)가 이곳에서 맹장군 등과 더불어 신라광복운동을 하였으며, 가져온 신라국새를 이곳에다 묻었다고 한다. 신라 끝 왕인 경순대왕이 고려에 양국할 때 옥새를 바치지 않았으며, 그 옥새를 마의태자가 간직했었다고 한다.

이 옥새바위의 생김새는 두 바위가 포개져 있는데 이곳에는 가끔 뱀이 여러 빛깔로 둔갑하여 이 바위를 맴돌고 있는데 이것은 옥새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비록 이 옥새바위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이라고 하지만 김부리의 역사나 김부리의 정체를 추적하는데 큰 구실을 한다. 즉 옥새는 왕권과 관련되므로 김부대왕의 실체를 뒷받침하고 있다.

(4) 형산사의 김부대왕과 김충태자의 전설(포항 1 대학 배용일교수 자료제공)

형제산(兄弟山)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영일군(현 포항)과 월성군(현 경주)의 지경에(경계)에 위치하여 있다. 형산강 어구의 남쪽 북형산성(北兄山城)이 있고 김부대왕(金傅大王, 敬順王)의 사당이 있는 산을 형산(兄山)이라 하고, 그 북쪽의 맞은 편의 산을 제산(弟山)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산을 가리켜 형제산이라고 하고, 이 양 산 사이를 흘러 영일만에 들어가는 강을 형산강(兄山江)이라한다 본시 경주의 북쪽으로 연하여 남천 북천 기계천 등으로부터 흘러, 형제산이 단맥(산이 잘려짐)되기 전에는 그물이 지금의 안강에 모여 호수를 형성하였고 범람하면 지금의 청하방면으로 흘렀다고도 하고 신광을 거쳐 흥해방면으로도 흘렀다고도 한다. 안강호수가 범람하면 신라수도 경주가 홍수의 피해를 입으므로 안강호수의 치수(治水) 문제는 신라 건국 이래 암적인 어려운 문제였다고 한다. 옛부터 부로상전(父老相傳)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말엽 경순왕(김부) 이 임금이 되기 이전부터 철원(鐵原)에 도적떼가 일어나 태봉국이라는 나라를 세워 자칭(自稱) 임금이라 하고 남쪽에는 부여에 도적떼가 일어나 후백제왕이라고 자칭(自稱)하는 등 사방에 도적떼가 일어나 치안을 극도로 문란케 하니, 신라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었다고 한다. 경순왕 김부가 임금이 된 후 나라 안에는 물론 나라 밖에도 물정이 소란하니 사관으로 하여금 신라수도 주변의 지리와 산천을 보아 신라의 장래를 점을 쳐 보게 하였다. 수일 후, 임금을 배알한 사관은 장차 신라를 정복하고 왕위를 찬탈할 역적은 북쪽의 궁예도 아니고 남쪽 의 후백제왕도 아니고 동쪽 임정현(臨汀縣)으로부터 역적이 일어나 신라수도인 경주를 침범할 것이라고 사뢰었다. 임금은 그러한 환난을 미연에 방지할 방법은 없는가 하고 물으니 사관은 형제산(지금의 형산강 어구)의 형산포의 산을 끊어 안강호수를 지금의 영일군땅 어룡사(魚龍沙) 영일만으로 결류시키면 임정현 땅의 지정왕기(地精王氣)가 제압되어 감히 신라 수도를 침범할 불의의 야심을 품은 역적이 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상주하였다. 당시, 신라의 서울 경주는 안강이 범람하면 수해(水害)의 환란이 다대하여 각별한 치수의 방책이 없이는 신라 왕도의 안녕과 질서를 보존하기 매우 곤란하였으므로 경순왕은 태자(太子) 김충(金忠)과 상약(相約)하여 금후 백일간에 형제산 산맥을 단절하고 안강호수의 물을 동해바다로 흐르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경순왕은 하늘에 올라가 목침(木枕)으로 삼층계의 집을 건축하여 하늘에 옥황상제와 천지신명과 신라 왕실의 조종(祖宗)들에게 신라 국운의 안녕과 연장을 기원할 것을 임금과 태자사이에 생명을 걸고 서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일편단심(一片丹心) 신라의 안전을 염려한 태자 김충은 용으로 화신(化身)하여 형제산맥을 처서 이를 단절하고자 천지신명에게 기도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는 제일보로 큰 뱀(大蛇)으로 화하여 사람으로부터 용왕이란 존칭이 없이는 용으로 화할 수 없으므로 안강 가두의 길가에 뱀이 되어 누워 지나가는 사람으로부터 용왕(龍王)이라는 존칭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이라도 용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없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큰 뱀 한 마리가 누워 있다고 두려워하여 달아나기만 하였다. 경순왕과 태자의 서로 약속한 기일이 백일인데, 기한은 용서없이 지나가서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상금(尙今) 용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다. 용으로 화신하지 못하여 태자는 마음 속으로 초조하게 느끼면서, 용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일각천추(一刻天秋)의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한 노파가 어린 손자를 업고 그 길가를 지나가다가 태자(큰 뱀)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저런 큰 뱀도 이 세상에 있는가" 하고 지나가려고 할 때, 그 노파에게 업혀있던 5∼6세 되어보이는 손자가 그 할머니를 나무라면서 "할머니는 왜 경솔한 말을 하나요. 저것은 뱀이 아니고 용왕입니다."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홀연히 맑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뒤덮고 일진광풍(一陳狂風)이 일어나더니 태자인 큰 뱀은 용으로 화하여 하늘에 올라가 바람과 비를 부르고 자유자재의 조화로 형제산맥의 단맥을 처서 안강호수를 영일땅으로 결류시키고 오늘의 영일만에 흐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라왕도 경주를 안강호수의 수해로부터 구출하여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고 한다. 이 때, 그 부친인 김부 대왕은 차일피일 결단성없이 우유부단하다가 하늘에 올라가서 삼층계의 집을 짓지 못하여 부자간의 약속대로 아들 태자에게 목숨을 맡기게 되었다. 태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친 경순왕에게 칼을 뽑아 차마 아비를 죽일 수 없어 형식적으로 베어버리는 양 그 얼굴에 조그마한 상처를 입히고 부왕이 약속을 위반한 죄를 용서하였다고 한다. 안강 가두에 뱀으로 화신하여 누워있던 태자를 용이라고 존칭하여준 어린 아이의 덕을 흠모하여 안강호수가 결류된 후에 드러나는 하상(河床)과 그 일대의 풍요한 들(野)을 이 소년에게 하사하였는데 지금에도 그 들을 유금(有琴) 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아이의 이름이 유금이었기 때문이다. 형산 산정에 형산사라는 조그만한 암자가 하나 있어 김부 대왕과 김충 태자의 목상(木像)을 세워 제항을 지내고 그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김부대왕의 얼굴에 조그마한 상처가 있는 유적은 부자약속을 위반한 형벌의 행적이라고 전한다.

경순대왕의 후손으로써 경순대왕과 태자의 전설로 믿고  싶었으나 왕룡사원의 주인의 이야기로 전하여지는 것은 무렬왕과 김유신의 전설로 둔갑하여 버렸다. 안타까운 전설이다.

○ 경모전(敬慕殿)

경순왕(敬順王) 당시 백관(當時 百官)은 지리멸열하고 대세(大勢)는 불리(不利)하여 통탄(痛嘆)하고 일시(一時) 성주산(聖住山)에 은거하였던 관계(關係)로 옥마산봉(玉馬山奉)에 신산묘지(神山廟址)하니 왈(曰) 경순왕(敬順王)이였다. 그리고 그 최하단(最下端)인 왕대산(王臺山)에 순유(巡遊)한 사적(事蹟)이 있어 왈(曰) 왕대산(王臺山)이라 칭(稱)했다 한다. 고(故)로 북민(北民)들이 시뢰(是賴)하기를 이를 숭앙(崇仰)하면 不可泯滅이라 하고 내건 사어자(乃建 祠於玆)하고 경순묘(敬順廟)라 했다는 것이다.

이에 전설(傳說)에 의(依)하면 국조정화(國朝鼎華)하고 연구세심(年久歲深)에 우호무인(宇護無人)이라 옥마산(玉馬山)에 있던 사우(祠宇)는 실형(失形)하고 고허(古墟)는 단존초석(但存礎石) 파와이기(破瓦而己)러라 중고(中古) 불지하년대(不知何年代)에 거삼현동 금성(居三賢洞 金姓)에게 현몽(顯夢)하기를 조상(祖上)을 찾으라 하여 즉시(卽時) 심색중(深索中) 또 다시 현몽(顯夢)하기를 종상유이하(從上流以下)라 하여 심험중(深驗中) 하허물(何許物)를 발견(發見) 인양(引揚)하니 청황기이폭(靑黃旗二幅)의 비단으로 싼 것을 펴보니 『경순대왕 금전신주(敬順大王 金傳神主)』라 팔자(八字)가 완연히 써 있어 그때부터 이 위패(位牌)를 옥마산(玉馬山)에 다시 모실것이 아니라 동중(洞中)에서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시는 것이 가(可)타하여 인향산재(隣鄕散在)한 자손(子孫)들과 동민(洞民)들이 삼현리(三賢里)에 신괄묘패건사우(新适廟牌建祠宇)하였으나 적시 수호(赤是 守護)가 불충분(不充分)하여 자손(子孫)들이 거족적(擧族的)으로 규합(叫合)하여 옥마산(玉馬山) 기슭기인 남포면 창동리에 갱신사우(更新祠宇)하여 현금(現今)에 지(至)함.

호일(號日) 경모전(敬慕殿)이라 칭(稱)하고 연중사월초사일(年中四月初四日)에 행헌생폐지예(行獻牲幣之禮)한다.

후손대표(後孫代表)로 청라 김세열씨(靑蘿 金世烈氏)와 종친회장(宗親會長) 김동준씨(金東俊氏)가 관리수호(管理守護)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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