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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유허지 4-간척사업(2001. 7. 28. 김주회(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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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46 조회9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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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유허지 ⑥ (간척사업)


⊙ 간척사업 및 농지개간과 관련한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충렬공 김방경 할아버지께서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어 몽고의 침공을 받자 위도(葦島)에 입보(入保)하였다.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라는 내용도 있고,

밀양의 수산제와 제천의 의림지를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인터넷 상에서 언뜻 보이기도 합니다.


⊙ 또한 본 홈페이지의 [안동김씨소개] - [시조소개] 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듯이 충렬공께서 강화천도 시절에 살았던 곳인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와 해령당이 있고, 강화도 여러 곳에 간척사업을 시행하신 바 있습니다.

이때 축조한 제방과 뚝은 제포(悌浦), 와포(瓦浦) (강화도 송해면 승천포 부근), 이포(裡浦) (1256년 선원면에 축조), 초포(草浦) 뚝 등인데, 이곳에 둔전(屯田:주둔병사의 군량미를 자급자족 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던 밭)을 설치하기도 하였고, 그리고 이어서 광성(廣城), 굴곶(屈串), 만월(滿月), 오두(鰲頭), 가리(加里) 뚝 등도 모두 이때에 축성 하였다고 합니다.


강화도 간척사업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은 얼마전 (2001.6.30)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홈페이지(http://www.kbs.co.kr/history/) "120개의 대제방, 강화 평야는 바다였다.' 를 보시면 동영상을 보거나 대본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안북부(지금의 평안남도 安州, 청천강 하구)의 갈대섬(葦島)과 관련된 인터넷 상에서 간단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모아 보았습니다.


▣ 白石,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子夜 여사의 회고) <李 東 洵>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지만, 서울에서 경의선(京義線)을 타고 서른 네 번째 역을 지나면 운전(雲田), 고읍(古邑) 다음에 정주(定州)역이 나타난다. 한양서 북으로 천리길을 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가야 하던 옛 평안도 정원(定遠) 땅의 군청 소재지.

정주의 동쪽으로는 달천(撻川)이 흘렀는데, 이 강은 구성(龜城)의 인산에서 발원해 남으로 흘러 봉명산 물줄기와 합류, 방호고개 밑을 꺾어 흐르다가 이윽고 정주 앞바다로 들어간다. 그 바다에는 고려적에 몽고군에게 쫓긴 김방경 장군이 피난해 숨었다는 위도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정양동 염전이 저녁 햇살 속에 가물가물 보였다.



▣ 고려 및 조선시대의 간척

우리나라의 논농사 기원은 BC 1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간척사업은 고려 고종 22년(서기 1235년)에 몽고병이 침입하였을때 병란을 피하여 강화도로 임시도읍을 옮긴 후 해상방어를 목적으로 연안제방(沿岸堤防)을 구축한 것이 최초의 기록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식량생산을 위한 농지조성목적의 간척사업은 고려고종 35년(서기 1248년)에 몽고병란시 부족한 식량을 조달할 목적으로 당시 병마판관이었던 김방경(金方慶)으로 하여금 안북부(지금의 평안남도 安州, 청천강 하구)의 갈대섬(葦島)에 제방을 축조하여 농지를 조성한 후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후 고려조와 조선조에서는 군량미 확보와 식량생산을 목적으로 강화, 김포 등에 간척사업을 시행한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 수리시설의 중심은 堤堰(제언)이었으므로, 수리사업도 제언의 부수와 신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제언의 수측과 보수는 명존 18년의 경우처럼 왕명에 의해 전국적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중방제 수측과 金方慶(김방경)에 의한 守山堤(수산제) 보수처럼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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