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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가족(2001. 8. 13. 김주회(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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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46 조회1,0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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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가족 ④ (子孫-석사논문 발췌)

충렬공 김방경 연구논문인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유선영 석사학위논문, 전남대학교대학원, 1993.8) 중에서 충렬공의 가족 및 혼인관계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김방경은 첫 부인으로 朴益旌(박익정)의 딸을 맞이하였다. 기거랑지제고중서사인을 지낸 朴益旌은 무인집권기에 고급관인을 배출하여 세족으로 성장한 죽산박씨의 후예였고, 인천이씨 李藏用과는 사돈관계였다. 박씨는 3남3녀를 두고 김방경에 앞서 사망하였다. 박익정의 장남 暉(휘)가 李藏用의 딸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김방경의 처남(박휘)의 장인이 이장용이었다.

김방경는 재취로 孫씨를 맞아 1녀를 두었으나 손씨에 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 서북면에 있을 때 김방경은 官妓와의 사이에 1녀를 두었다.



김방경의 큰 아들 瑄(★ 선의 오기인 듯)은 황조정대부사재경 薛仁儉(설인검, ★족보에는 설안으로 기록)의 녀와 결혼하여 전법판서 상장군에 올랐다.

둘째아들  (흔)은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여 판밀직사사찬성사상락공에 이르렀지만 그의 혼인관계는 알 수 없다

셋째아들 恂(순, 1258-1321)은 문과에 합격하고 도첨의중찬 許珙(허공)의 녀와 결혼하여 중대광상락군판삼사사 보문각대제학 상호군에 이르렀다. 순의 장인 許珙은 최씨정권 말기부터 출세길에 올랐던 인물이었고, 공암허씨는 고려후기 권문에 속하였다.



김방경의 첫째사위인 趙 (조변)은 참지정사 趙季恂(조계순)의 아들인데, 황주조씨 조계순은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이 집안은 무인집권기에 세족으로서 기반을 갖추었다.

막내 사위인 평강 蔡洪哲(채홍철)은 뒤에 충선왕의 신임을 받아 찬성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김방경의 큰 손자 承用(선의 둘째아들)은 문과에 합격하여 첨의찬성사 元瓘(원관)의 녀와 결혼하였고, 밀직사 만호에 올랐다. 元瓘은 충렬왕대 中贊에 오른 元傅(원부)의 아들로 이 원주원씨는 원부 이래 크게 두각을 나타냈던 가문이다.

둘째손자 承澤(선의 세째아들)은 삼중대광 도첨의사 정승에 올랐다.



또 큰 손녀 ( 의 첫딸)은 찬성사 趙璉(조련)과 혼인하였는데 조련은 평양조씨 趙仁規(조인규)의 아들이었다.

또 恂에게서 난 세 손녀는 각기 무인집권기 무반을 배출하였고 충렬왕 때 찬성사를 지낸 청주정씨 정계(★정해의 오기인 듯)의 아들인 정책(판선공사사), 성리학을 수용한 감포(★남포의 오기인듯) 백이정(대광상당군), 원의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인 야영돈(강절성참지정사)과 혼인하였다.



恂의 아들 永旽은 좌정승 판정치도감사에 이르렀다.

김방경의 증손자 厚(승용의 큰 아들)는 검교첨의평리 만호에 이르렀고 昴(승택의 큰 아들)은 찬성사 閔(삼수변蹟)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상락군에 봉해졌다.



이상과 같이 김방경은 죽산박씨를 처가로 두었고, 그의 자손들은 공암허씨, 황주조씨, 원주원씨, 평양조씨, 청주정씨, 감포백씨 등 당대의 세력가문 및 원의 고위층과 혼인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혼인관계가 김방경과 그후의 안동김씨의 정치활동과 세력형성의 기반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김방경의 성공에는 그의 혼인관계도 작용하였다. 그는 竹山朴氏(★김방경의 장인 박익정)를 처가로 두었고, 그의 자손들을 공암허씨(★김순의 장인 허공), 황주조씨(★김방경의 사위 조변, 그의 부 조계순), 원주원씨(★김승용의 장인 원관과 그의 부 원부), 평양조씨(★김흔의 사위 조련과 그의 부 조인규) , 청주정씨 (★김순의 사위 정책과 그의 자 정오, 정포), 염포백씨(★김순의 사위 백이정와 그의 부 백문절) 등 당대의 세력가문 및 원의 고위층(★김순의 사위인 원의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 야영돈=별리가불화)과 혼인관계를 맺게 하였다. 그는 왕실과 권문세족, 그리고 원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함으로써 한때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고, 그의 후손들의 활동에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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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가족 ⑤ (先祖-석사논문 발췌)

충렬공 김방경 연구논문인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유선영 석사학위논문, 전남대학교대학원, 1993.8) 중에서 충렬공의 가계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김방경은 안동김씨였는데 안동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金傅(?-978)에게서 비롯되었다. 김부는 9명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이중에 넷째아들인 대안군 殷說(?-1028, 현종19)은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소생으로 태조왕건의 외손자였다. 그는 관직이 공부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아홉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 叔承이 공부시랑 평장사로서 안동에 봉해짐으로써 안동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숙승의 아들 日兢은 三韓功臣에 책봉되었고, 금자광록대부 상서우복야 태사대광의 지위에 올랐다. 김방경의 시조는 태조왕건의 외손자로서 또 삼한공신으로 宰相의 반열에 올랐던 귀족이었던 것이다.

김방경 가계가 안동에서 거주하게 되었던 것은 日兢의 아들 利淸때부터였다. 이청은 상락군 안동태수로서 고령 곧 안동에 거주하였으며 "受籍安東 自公始" 라 한 것처럼 그로부터 안동이 본적지로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義和는 司戶를 지냈다.

김방경의 선대는 利淸과 義和때 지방관으로 밀렸던 것이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무신난이 일어난 때와 비슷하다. 따라서 이 가계가 일시 지방으로 밀렸던 것이 무신난의 발생과 관계되지 않을까 추측된다.

義和의 아들 敏成이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직사관겸장치서령을 지냄으로써 이 가계는 다시 중앙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민성의 두 아들도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에 진출하였다. 큰아들 敞(초명 孝恭, ?-1256 고종43)은 희종조에 등제하여 직사관 상서우승을 거쳐 수태사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에 올랐다. 둘째아들 孝印 역시 희종때에 문과에 합격하였고, 이후 한림학사 병부상서를 지냈다.

金敞, 孝印 형제가 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최씨무신정권과 관계가 깊다. 이들은 최충헌의 집권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崔怡(최이)가 政房을 설치하고 문신을 기용하는 정책을 취했을 때 金敞은 중용되었다.

金敞은 崔怡에게 중용되어 정방에서 銓注를 담당하였고, 권문에서 오래동안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승진이 가능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李奎報나 趙 (조충) 등 최씨집권기에 宰樞를 지냈던 인물들도 金敞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同年이었다. 김창의 지위는 막강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고종때 기거사인을 지냈던 李溱(이진)이나 崔怡의 문객으로 권력이 막강했던 兪千遇(유천우)는 金敞에 위해 추천되어 성장한 인물이었다.. 김창은 최씨정권과 밀착하여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김창의 동생 효인도 崔沆(최항)의 치하에서 고시관을 지냈다. 그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글씨를 잘 썼고 또 한림학사에 이르렀던 것은 그의 학문적 능력이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병부상서에 이르른 것은 형과 더불어 최씨정권에 밀착되어 발탁되었던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최씨정권은 왜 이들 형제를 발탁하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들이 寒微(한미)한 가문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같은 지적은 이 가계가 안동지방으로 밀려났던 처지에 있었던 점에서 타당하다.

더불어 형제가 최씨정권에 발탁된 이유로 이 가계가 안동으로 밀려나기 이전에 三韓功臣으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점도 고려된다. 최씨정권은 일시 지방으로 밀려나 당대는 한미하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안동김씨 인물을 다시 기용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창과 효인은 최씨를 하늘이 내린 존재로 인정하여 적극 충성을 다하였다. 물론 김창같은 공신의 후예가 최씨정권을 지지하였던 것은 최씨정권의 안정유지에 도움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김방경의 선대는 신라왕족의 후예이며 고려왕실의 외족으로서 출발하였고, 또 三韓功臣의 후예로서 재상의 반열에 올랐던 가문이었다. 무신란을 전후한 시기에 이 가계는 지방으로 밀려 났으나 무인집권기에 다시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이어 최충헌 집권때 등제한 김창,효인 형제가 최우집권때 크게 중용되므로써 이 가계는 크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이 가계는 번창하여 갔다. 김창은 후사가 없었고, 동생 효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세 아들은 고위직에 올랐는데, 김방경는 바로 효인의 큰 아들이었다. 둘째아들 之慶은 밀직부사에 이르렀고, 셋째 아들 현경은 좌정승에까지 진출하였다.



김방경은 최씨정권 아래에서 정치적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안동김씨 가문의 후광과 최씨정권의 비호, 그리고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김씨는 태조왕건의 외손으로(★태조왕건의 장녀 낙랑공주가 경순왕과 결혼) 출발하여 고려전기에 三韓功臣(★金日兢김일긍 : 시조 김숙승의 아들)을 배출하고 중앙의 고위직을 보유하였던 문벌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계는 무신난 등 혼란기에 처해 한때 안동지방으로 밀렸다.


이 가계가 다시 중앙으로 진출한 것은 최씨정권의 문신기용책에 의해서였다. 과거를 통해 김방경의 조부 金敏誠이 다시 중앙으로 진출하였고, 백부 金敞은 崔禹의 집권기에 宰樞를 지냈으며, 부 孝印은 尙書에 이르렀다.

김방경은 삼한공신의 후예에게 주는 蔭補로 관직에 나갔다. (고종14, 1227년). 그는 최씨정권 아래에서 무인직에 진출하여 성장하였다.

무인정권의 몰락과 원종복위에 공헌함으로써 그는 더욱 권력의 핵심에 들어 섰고, 삼별초 토벌의 공으로써 侍中의 자리에 올랐다. (원종14, 1273년). 이어 충렬왕대 致仕할 때까지(충렬왕9, 1283년) 첨의중찬의 자리를 계속 지켰다.



이러한 그의 성공에는 그의 혼인관계도 작용하였다. 그는 竹山朴氏(★김방경의 장인 박익정)를 처가로 두었고, 그의 자손들을 공암허씨(★김순의 장인 허공), 황주조씨(★김방경의 사위 조변, 그의 부 조계순), 원주원씨(★김승용의 장인 원관과 그의 부 원부), 평양조씨(★김흔의 사위 조련과 그의 부 조인규) , 청주정씨 (★김순의 사위 정책과 그의 자 정오, 정포), 염포백씨(★김순의 사위 백이정와 그의 부 백문절) 등 당대의 세력가문 및 원의 고위층(★김순의 사위인 원의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 야영돈=별리가불화)과 혼인관계를 맺게 하였다. 그는 왕실과 권문세족, 그리고 원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함으로써 한때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고, 그의 후손들의 활동에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최우의 집권때에 관직에 진출한 김방경은 崔宗峻 등 최씨정권의 실력자로부터 비호를 받아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감찰어사, 서북면병마판관, 견룡행수 등 중직을 역임하였다. 김방경은 최씨정권에 중용되어 최씨의 강화체제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최씨정권이 붕괴한 후 김방경은 개경 출배별감, 진봉사 入元 등으로 개경환도와 친몽정책의 추진에 참여하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는 重房이나 최씨 이후의 실력자인 金俊과도 대립하여 갔다.


김방경은 시중 崔宗俊의 사랑을 받아 감찰어사, 서북면 병과판관, 견룡행수 등으로 중요한 무반직에 빠르게 승진하였던 것이다. 최종준은 철원최씨 가문으로 이 가문은 최씨 집권기에 6명의 재추를 배출하였으며, 崔瑀(최우)는 바로 최종준의 조카사위였다. 또 최종준은 강화천도를 주도하는 등 최씨정권에서 절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최종준이 그를 돌봐 주고 있을 정도로 그는 백부,부친에 이어 최씨정권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탄등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도 김방경의 妹壻(매서, ★매형매제)인 박주수 강분과 정주수 권천만은 죽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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