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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쌍계재 자료 이승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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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3-29 10:44 조회1,3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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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소(李承召)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422-1484(세종4-성종15)
본관 양성(陽城)
윤보(胤保)
삼탄(三灘)
시호 문간(文簡)
활동분야 문신
이승소(李承召)에 대하여
이승소(李承召)
1422(세종 4)∼1484(성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 고려조 시중 춘부(春富)의 현손이며, 병조판서에 증직된 온(蒕)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 17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7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을 배수받았다. 이어 부교리·응교에 승진하고, 1454년(단종 2) 장령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집현전직제학으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예문관응교를 지내고, 1458년(세조 4) 예조참의가 되어 《초학자회언해본 初學字會諺解本》을 찬정하였다. 이어 형조와 호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1459년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지냈다.
1462년 예문관제학으로서 사성을 겸하고, 세조가 지은 《병장설 兵將說》을 찬수하였다.
1467년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신병을 얻어 위중하자 국왕이 의약을 내렸다. 예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와의 외교사무를 잘 처리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어 지경연사로서 경연활동을 크게 일으켰다.
1472년 민간에 산재한 조종의 법전을 거두어 춘추관에 보관하게 하였고, 제사(諸史)의 간행·보급을 주청하였으며, 1475년에는 교육의 강화와 해불론(害佛論)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과거를 주관, 인재등용에 힘썼으며, 왜인·야인의 접대를 주관하였다. 이어 우참찬이 되고, 1480년 이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를 편찬하였다.
1480년 주문사(奏聞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노비 6구, 전지 40결을 받았다.
그러나 정사였던 한명회(韓明澮)의 사헌궁각사건(私獻弓角事件)에 연루되어 간관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뒤 이조판서·형조판서·우참찬·좌참찬으로서 문명을 드날렸으나, 1483년 신병이 심해져 사직을 상소하자, 한직인 중추원의 지중추부사가 되어 녹봉을 특별히 급여받았다.
성품은 우연히 사물을 접하더라도 힘써 대체(大體)를 알고자 하였고, 널리 독서하여 예·악·병(兵)·형(刑)·음양(陰陽)·율(律)·역(曆)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청렴하여 집안을 장식함에 꾸민 것이 없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삼탄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志,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崔完基〉

 

 

 

이승소(李承召)
세종(世宗) 29년 (정묘, 1447년), 식년시(式年試) 을과1(乙科1)
 인적사항
생년(生年) 임인1422(壬寅1422)
자(字) 윤종(胤宗)
호(號) 삼탄(三灘)
본관(本貫) 양성(陽城)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간,좌리공신/양성군(文簡,佐理功臣/陽城君)
 가족사항
종숙(從叔) 휘(徽)
부(父) 이온(李蒕)
조부(祖父) 이사근(李思謹)
증조부(曾祖父) 이옥(李沃)
외조부(外祖父) 이회(李薈)
처부(妻父) 정충석(鄭忠碩)
 이력 및 기타사항
소과(小科) 1438(무오) 생원시
다른문과합격 정묘1447중(丁卯1447重)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직(官職) 예조/판서(禮曹/判書)
*** 문온공의 장손자인 직제학공 (김맹헌)의 장인이 공소공 이사검인바 이사검의 형님의 손자가 이승소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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