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쌍계재(18) 전라도 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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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4-21 11:23 조회1,402회 댓글0건본문
::::: 咸平郡
우리군은 선사시대에는 진국에 속해있었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는데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형성되어 우리 함평에도 1-2개의 소국이 있었음을 할 수 있는 지석묘(고인돌)와 옹관묘가 군내 전역에 산재해 있으나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있다.
우리 함평군역은 백제시대에는 굴내현과 다지현의 양현으로 굴내현은 오늘의 함평읍, 손불면, 신광면, 대동면 지역이며, 신라와 고려때는 함평현이라 불렀고, 다지현은 현 나산면, 해보면, 월야면 지역으로, 신라 때는 다지현, 고려때는 모평현이라 불려졌으며 무안과 영광군의 속현이었고, 백제시대부터 특정 행정구역인 영풍향과 다경부곡이 있었다.
조선 태종 9년(1409)에는 함풍현과 모평현을 합하여 함평현이라 칭하였으며 이때 함평현역은 동현내면 ,서현내면, 영풍면, 해제면, 다경면, 대동면, 손불면, 신광면, 평능면, 식지면, 해보면, 월악면, 모동면, 대야면등 14개 면이었다.
함풍현과 모평현을 통합하면서 함풍에서 "咸"자 모평에서 "平"자를 따서 함평이라 했다.
1895년 5. 26 속령 제98호 반포로 함평현이 함평군으로 개칭
1932. 11. 01 식지면과 평릉면을 합병하여 나산면을 신설 9개면이 되었고
1963. 01. 01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8개면 되었으며
1973. 07. 01 학교면의 상옥, 월송, 금곡, 백호 4개리가 대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1986. 12. 23 대통령령 제12017호에 의거
1987. 01. 01 일부로 함평읍 성남리 일부와 학교면 사거리 일부가 엄다면에 편입
지금까지 함평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함평군과 경계를 이루는 나주군 다시면(多侍面) 영산강 지류의 부식토에서 벼의 꽃가루를 채집하여 분석한 결과 쌀의 생산 연대가 약 3,000 BP(BC 1,050)로 밝혀졌으며 유역 지형 보존실태 조사에서 약 4,000년전 부터 이곳 일대가 사람의 손에 의하여 파괴 또는 개간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비추어 신석기시대는 물론 구석기시대에도 함평 지역에 사람이 살았으며 그 유적이나 유물이 있을 것이나 아직 발견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원삼국시대에 함평은 마한의 영역에 속했는데 마한은 54개소국으로 형성되었었다.
그 중에 1∼2개의 소국이 함평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아직 학계에서 국명을 비정(比定)한 바가 없다. 마한시대에 1∼2개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1990년말 현재 600여기(파괴,매몰한 200여기 제외)가 군내에 분포했고 138기의 고분이 함평천과 고막천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점이다. 그간 발굴 수습된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나산면 구산리 돌칼, 나산면 초포리, 월야면 월계리의 반달돌칼, 학교면 월산리의 꺽창(銅戈), 학교면 백호리 출토의 칼자루 장식이 있고, 1987년 2월 나산면 초포리 사촌(羅山面草浦里沙村) 마을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발굴된 마한시대에 편년되는 기원전 2∼3세기의 청동기 유물 잔무늬 거울(多 細紋鏡) 3점, 꺽창(銅戈) 2점, 한국식 동검(細形銅劒) 4점(2점은 칼자루 장식이 달려 있음), 중국식 동검(桃氏劒) 1점, 투겁창(銅 ) 2점, 장대투겁(竿頭鈴) 2점, 동시(銅施) 1점, 동도끼(銅斧) 2점, 가지방울(雙頭鈴) 1점, 조합식 가지방울(組合式雙頭鈴) 1점, 자루달린방울(柄附銅鈴) 1점, 굽은옥(天河石製飾玉) 2점, 숫돌(砥石) 2점등 무기(武器)와 의기(儀器)를 두루 갖춘 26점이다. 은 이 지역에서 청동기를 제작 할 수 있는 집단이 살았음을 입증해 주는 자료며 남북한을 통털어 청동기 발굴 사상 첫 손 꼽히는 경사였다. 또 1995년 1월부터 4월까지 1차 발굴하여 2∼3세기의 독(옹관) 등 다수 유물이 출토된 월야면 예덕리 만가촌고분은 고대 마한사 뿐만 아니라 일본(전방후원분 조형(前方後圓墳祖形)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는 귀중한 무덤이다.
함평이 완전히 백제의 영역이 된 해는 아직 분명치 않다. 현재 학계에서는 반설화적(半說話的)인 일본 서기(書記)의 기록에 의해 영산강 유역이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369)에 합병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진서(晋書)에 안북장군(安北將軍) 장화(張華)가 “마한의 신미제국(新彌諸國)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대대로 서로 합치지 않은 채 20여개국이 살아 오는데 모두 사신을 보내 조헌 한다”고 한 점과 함평 지역에서 3∼5세기에 이르는 한성백제(漢城百濟)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점, 초대형 고분 분포 등으로 미뤄 볼 때 369년 이후에도 백제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동성왕 20년(498) 8월에 탐라(耽羅.濟州道)를 치기 위해 왕이 친히 무진주(武珍州.光州)에 머물었던 이후부터 완전히 백제의 지배권에 들어 간 것으로 여겨진다. 함평(咸平)이라는 이름은 조선조 태종 9년(太宗.1409)에 함풍현(咸豊縣)과 모평현(牟平縣){{) 함풍현(咸豊縣)이란 이름은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함풍현, 모평현(牟平縣)이란 이름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모평현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전해오나 백제의 중국 요서 경략,장보고의 신라방 설치,또 중국 난하 동쪽의 동이족(東夷族) 지배 등 역사 사실을 볼 때 중국에서 따온 이름이 아니라는 설이 나오고 있다. }}을 통합하면서 함풍에서 “咸”자를,모평에서 “平”자를 따 “咸平”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속되어 무안군인 해제면(海際面), 현경면(玄慶面), 지금의 광주광역시 본양동(本良洞), 임곡동(林谷洞)의 일부,장성군 동화면(東化面) 일부, 영광군 묘량면 일부까지가 함평군역(咸平郡域)이었다. 이 지역에는 백제때부터 고려때까지 6개의 현(縣)과 향(鄕), 부곡(部曲) 각 각 1개소가 있었는데 시대 마다 바뀐 이름은 다음과 같다.
백제 때 굴내현(屈乃縣)은 지금의 함평읍, 손불면, 신광면, 대동면 지역인데 백제 패망후 당(唐)이 7주를 설치했을 때는 군라현(軍那縣, 대동지지는 굴나-屈奈-로 표기)이라 하였고 대방주(帶方州, 치소 현 다시면)의 속현으로 하였는데 당의 7주는 671년 까지 존속하였다. 신라와 고려 때는 함풍현(咸豊縣. 고려 때 별호 기성 -箕城-)이라 불렀고 신라 때는 무안군, 고려 때는 영광군의 속현이었다.
백제 때 다지현(多只縣)은 지금의 나산면, 해보면, 월야면 지역인데 당의 7주 때는 다지현(多支縣)이라 하였고, 사반주(沙拌州. 치소, 장성 또는 영광)의 속현 이었으며 신라 때는 다기현(多岐縣)으로 무안군, 고려 때는 모평현(牟平縣. 고려 때 별호, 모양 -牟陽-)으로 영광군의 속현이었다.
백제 때 도제현(道際縣)은 오늘의 무안군 해제면(海際面. 오늘의 임수리 제외)과 현경면(玄慶面. 옛 다경면 지역 제외)인데 신라와 고려 때는 해제현(海際縣)이라 했고 신라 때는 무안군, 고려 때는 영광군의 속현 이었으며 조선조 태조 원년(太祖.1392)에 함풍현에 병합되었고 1906년 무안군에 이속되었다.
백제 때 고록지현(古祿只縣)은 지금의 무안군 임수리(臨水里)와 인근 섬 지방인데 신라 때는 염해현(鹽海縣)으로 압해영현(壓海領縣), 고려 때는 임치현(臨淄縣)으로 영광군의 속현이었다가 태조 원년(1392)에 함풍현에 병합되었고 1906년 무안군에 이속되었다.
백제 때 물아혜군(勿阿兮郡. 물아래)의 일부였던 지금의 학교면과 엄다면은 신라 때는 면주(綿州), 고려때는 물양군(勿良郡.994), 면성군(綿城郡.991)으로 바뀌었고 조선조에는 무안현(務安縣), 1895년에 무안군, 1897년에 목포부(木 浦府)에 속했다가 1914년 함평군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 수천현(水川縣)은 오늘의 광주광역시 본양동(本良洞)과 임곡동(林谷洞) 일부 고룡(古龍), 신룡(新龍), 두정(斗亭) 3개리 제외 장성군의 동화면 일부 송계(松溪), 구룡(九龍), 월산(月山), 남산(南山)의 4개리인데 신라 때는 여황현(艅 縣)으로 나주목의 속현이었고 고려와 조선조에는 나주목 이었으며 1906 함평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여황, 적양(赤良), 장본면(獐本面. 현 본양동)은 나주군, 뒤에 광산군, 광주광역시로, 오산면(烏山面. 현 임곡동)은 광산군에, 뒤에 광주 광역시로, 대화면(大化面)은 장성군 동화면에 편입되었다.
특정 행정구역이었던 다경부곡(多慶部曲. 귀화인 촌)과 영풍향(永豊鄕)은 신라 때부터 시행하였고 조선조 태종 때에 모두 폐지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함평의 향, 부곡은 고려 때부터 언급되고 있다. 다경부곡은 오늘의 무안군 현경면 동산(東山), 평산(平山), 외반(外盤), 송정(松亭), 수양(垂陽), 용정(龍井), 오류(五柳), 마산(馬山), 가입리(加入里) 지역으로 고려 때는 나주목이 관할하다가 고려 공양왕 3년(恭讓王.1391)에 함풍현의 감무(監務)가 관할하였다.
영풍향(永豊鄕)은 지금의 함평읍 일부인 옛 영풍면 지역 현 함평읍의 성남, 자풍, 수호, 만흥, 장교, 옥산, 가동, 석성, 장년리으로 이 지역 역시 나주목에서 관할하다가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함풍현의 감무가 관할하였다. 향청의 소재지는 현 함평읍 성남리 골샘 인근이었다. 백제는 굴내현(屈乃縣)과 다지현(多只縣)을 설치하였다. 663∼671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후 당(唐)이 7주를 설치하였는데 굴내현 지역에 군나현(軍那縣. 대동지지 屈奈縣)을 설치하고 대방주(帶方州)의 속현으로 하였고 다지현(多只縣) 지역에 다지현(多支縣)을 설치 사반주(沙拌州)의 영역으로 하였다.
757년(景德王 16) 굴내현을 함풍현(咸豊縣), 다지현을 다기현(多岐縣)으로 바꾸고 물아혜군(勿阿兮郡)의 속현으로 하였다.
892년(眞聖王 6) 견훤(甄萱)의 기병에 의해 후백제 세력권에 들어 갔다.
936년 후백제가 망하고 태봉국의 세력권에 들어 갔다. 940년(고려 태조 23) 함풍현은 이름을 그대로 두고 다기현을 모평현(牟平縣)으로 바꾸었다. 1018년(顯宗 9) 함풍, 모평 두 현을 무안군에서 영광군 영현으로 바꾸었다. 함풍현은 별호를 기성(箕城)이라 하고 모평현은 모양(牟陽)이라 하였다. 1172년(明宗 2) 함풍현과 모평현에 감무를 두었다. 감무를 두기 전에는 향리(鄕吏)가 현을 다스림 1391년(恭讓王 3) 영풍향과 다경부곡, 해제근농방어사(海際勤農防禦使)를 함풍의 감무가 겸임하였다. 겸임한 연(年)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391년,동국여지승람에는 1392년으로 되어 있어 1년 차이를 보이는데 세종실록지리지가 정확성을 가지고 있어 이를 택했다.
1392년(태조 원년) 해제현과 임치현을 함풍현에 병합하였다. 1409년(태종 9) 1월 18일 함풍현과 모평현 두 현을 병합하고 함풍에서 “咸”자 모평에서”平”자를 따 “함평현(咸平縣)”이라 하였다. 1413년(태종 13) 함평현에 최초의 중앙 관원인 현감을 두었고 1759년(영조 35)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14개면을 관할하였다. 동현내면(東縣內面), 평릉면(平陵面), 식지면(食知面), 갈동면(葛洞面), 월악면(月岳面), 서현내면(西縣內面), 영풍면(永豊面), 다경면(多慶面), 해제면(海際面), 신광면(新光面), 대***면(大也洞面), 해보면(海保面), 대동면(大洞面), 손불면(孫佛面) 1895년 5월 26일 23부제로 전국의 행정 구역이 바뀌면서 함평군으로 개칭하였고 광주관찰부(光州觀察府)에 속하였다.(칙령 98호) <이하 연월일은 양력임> 이 때 관할면은 14개면으로 1759년 관할면과 같은데 대***면의 이름이 대야면(大野面)으로 바뀌었다. 관할 책임자로 군수가 발령되었다. 1895년 9월 5일 면(面), 결(結), 호수의 다소(戶數多小)에 따라 5등군 까지 나누었는데 함평군은 2등군이 되었다.
(칙령 164호)
우리군은 선사시대에는 진국에 속해있었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는데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형성되어 우리 함평에도 1-2개의 소국이 있었음을 할 수 있는 지석묘(고인돌)와 옹관묘가 군내 전역에 산재해 있으나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있다.
우리 함평군역은 백제시대에는 굴내현과 다지현의 양현으로 굴내현은 오늘의 함평읍, 손불면, 신광면, 대동면 지역이며, 신라와 고려때는 함평현이라 불렀고, 다지현은 현 나산면, 해보면, 월야면 지역으로, 신라 때는 다지현, 고려때는 모평현이라 불려졌으며 무안과 영광군의 속현이었고, 백제시대부터 특정 행정구역인 영풍향과 다경부곡이 있었다.
조선 태종 9년(1409)에는 함풍현과 모평현을 합하여 함평현이라 칭하였으며 이때 함평현역은 동현내면 ,서현내면, 영풍면, 해제면, 다경면, 대동면, 손불면, 신광면, 평능면, 식지면, 해보면, 월악면, 모동면, 대야면등 14개 면이었다.
함풍현과 모평현을 통합하면서 함풍에서 "咸"자 모평에서 "平"자를 따서 함평이라 했다.
1895년 5. 26 속령 제98호 반포로 함평현이 함평군으로 개칭
1932. 11. 01 식지면과 평릉면을 합병하여 나산면을 신설 9개면이 되었고
1963. 01. 01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8개면 되었으며
1973. 07. 01 학교면의 상옥, 월송, 금곡, 백호 4개리가 대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1986. 12. 23 대통령령 제12017호에 의거
1987. 01. 01 일부로 함평읍 성남리 일부와 학교면 사거리 일부가 엄다면에 편입
지금까지 함평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함평군과 경계를 이루는 나주군 다시면(多侍面) 영산강 지류의 부식토에서 벼의 꽃가루를 채집하여 분석한 결과 쌀의 생산 연대가 약 3,000 BP(BC 1,050)로 밝혀졌으며 유역 지형 보존실태 조사에서 약 4,000년전 부터 이곳 일대가 사람의 손에 의하여 파괴 또는 개간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비추어 신석기시대는 물론 구석기시대에도 함평 지역에 사람이 살았으며 그 유적이나 유물이 있을 것이나 아직 발견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원삼국시대에 함평은 마한의 영역에 속했는데 마한은 54개소국으로 형성되었었다.
그 중에 1∼2개의 소국이 함평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아직 학계에서 국명을 비정(比定)한 바가 없다. 마한시대에 1∼2개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1990년말 현재 600여기(파괴,매몰한 200여기 제외)가 군내에 분포했고 138기의 고분이 함평천과 고막천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점이다. 그간 발굴 수습된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나산면 구산리 돌칼, 나산면 초포리, 월야면 월계리의 반달돌칼, 학교면 월산리의 꺽창(銅戈), 학교면 백호리 출토의 칼자루 장식이 있고, 1987년 2월 나산면 초포리 사촌(羅山面草浦里沙村) 마을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발굴된 마한시대에 편년되는 기원전 2∼3세기의 청동기 유물 잔무늬 거울(多 細紋鏡) 3점, 꺽창(銅戈) 2점, 한국식 동검(細形銅劒) 4점(2점은 칼자루 장식이 달려 있음), 중국식 동검(桃氏劒) 1점, 투겁창(銅 ) 2점, 장대투겁(竿頭鈴) 2점, 동시(銅施) 1점, 동도끼(銅斧) 2점, 가지방울(雙頭鈴) 1점, 조합식 가지방울(組合式雙頭鈴) 1점, 자루달린방울(柄附銅鈴) 1점, 굽은옥(天河石製飾玉) 2점, 숫돌(砥石) 2점등 무기(武器)와 의기(儀器)를 두루 갖춘 26점이다. 은 이 지역에서 청동기를 제작 할 수 있는 집단이 살았음을 입증해 주는 자료며 남북한을 통털어 청동기 발굴 사상 첫 손 꼽히는 경사였다. 또 1995년 1월부터 4월까지 1차 발굴하여 2∼3세기의 독(옹관) 등 다수 유물이 출토된 월야면 예덕리 만가촌고분은 고대 마한사 뿐만 아니라 일본(전방후원분 조형(前方後圓墳祖形)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는 귀중한 무덤이다.
함평이 완전히 백제의 영역이 된 해는 아직 분명치 않다. 현재 학계에서는 반설화적(半說話的)인 일본 서기(書記)의 기록에 의해 영산강 유역이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369)에 합병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진서(晋書)에 안북장군(安北將軍) 장화(張華)가 “마한의 신미제국(新彌諸國)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대대로 서로 합치지 않은 채 20여개국이 살아 오는데 모두 사신을 보내 조헌 한다”고 한 점과 함평 지역에서 3∼5세기에 이르는 한성백제(漢城百濟)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점, 초대형 고분 분포 등으로 미뤄 볼 때 369년 이후에도 백제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동성왕 20년(498) 8월에 탐라(耽羅.濟州道)를 치기 위해 왕이 친히 무진주(武珍州.光州)에 머물었던 이후부터 완전히 백제의 지배권에 들어 간 것으로 여겨진다. 함평(咸平)이라는 이름은 조선조 태종 9년(太宗.1409)에 함풍현(咸豊縣)과 모평현(牟平縣){{) 함풍현(咸豊縣)이란 이름은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함풍현, 모평현(牟平縣)이란 이름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모평현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전해오나 백제의 중국 요서 경략,장보고의 신라방 설치,또 중국 난하 동쪽의 동이족(東夷族) 지배 등 역사 사실을 볼 때 중국에서 따온 이름이 아니라는 설이 나오고 있다. }}을 통합하면서 함풍에서 “咸”자를,모평에서 “平”자를 따 “咸平”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속되어 무안군인 해제면(海際面), 현경면(玄慶面), 지금의 광주광역시 본양동(本良洞), 임곡동(林谷洞)의 일부,장성군 동화면(東化面) 일부, 영광군 묘량면 일부까지가 함평군역(咸平郡域)이었다. 이 지역에는 백제때부터 고려때까지 6개의 현(縣)과 향(鄕), 부곡(部曲) 각 각 1개소가 있었는데 시대 마다 바뀐 이름은 다음과 같다.
백제 때 굴내현(屈乃縣)은 지금의 함평읍, 손불면, 신광면, 대동면 지역인데 백제 패망후 당(唐)이 7주를 설치했을 때는 군라현(軍那縣, 대동지지는 굴나-屈奈-로 표기)이라 하였고 대방주(帶方州, 치소 현 다시면)의 속현으로 하였는데 당의 7주는 671년 까지 존속하였다. 신라와 고려 때는 함풍현(咸豊縣. 고려 때 별호 기성 -箕城-)이라 불렀고 신라 때는 무안군, 고려 때는 영광군의 속현이었다.
백제 때 다지현(多只縣)은 지금의 나산면, 해보면, 월야면 지역인데 당의 7주 때는 다지현(多支縣)이라 하였고, 사반주(沙拌州. 치소, 장성 또는 영광)의 속현 이었으며 신라 때는 다기현(多岐縣)으로 무안군, 고려 때는 모평현(牟平縣. 고려 때 별호, 모양 -牟陽-)으로 영광군의 속현이었다.
백제 때 도제현(道際縣)은 오늘의 무안군 해제면(海際面. 오늘의 임수리 제외)과 현경면(玄慶面. 옛 다경면 지역 제외)인데 신라와 고려 때는 해제현(海際縣)이라 했고 신라 때는 무안군, 고려 때는 영광군의 속현 이었으며 조선조 태조 원년(太祖.1392)에 함풍현에 병합되었고 1906년 무안군에 이속되었다.
백제 때 고록지현(古祿只縣)은 지금의 무안군 임수리(臨水里)와 인근 섬 지방인데 신라 때는 염해현(鹽海縣)으로 압해영현(壓海領縣), 고려 때는 임치현(臨淄縣)으로 영광군의 속현이었다가 태조 원년(1392)에 함풍현에 병합되었고 1906년 무안군에 이속되었다.
백제 때 물아혜군(勿阿兮郡. 물아래)의 일부였던 지금의 학교면과 엄다면은 신라 때는 면주(綿州), 고려때는 물양군(勿良郡.994), 면성군(綿城郡.991)으로 바뀌었고 조선조에는 무안현(務安縣), 1895년에 무안군, 1897년에 목포부(木 浦府)에 속했다가 1914년 함평군에 편입되었다.
백제 때 수천현(水川縣)은 오늘의 광주광역시 본양동(本良洞)과 임곡동(林谷洞) 일부 고룡(古龍), 신룡(新龍), 두정(斗亭) 3개리 제외 장성군의 동화면 일부 송계(松溪), 구룡(九龍), 월산(月山), 남산(南山)의 4개리인데 신라 때는 여황현(艅 縣)으로 나주목의 속현이었고 고려와 조선조에는 나주목 이었으며 1906 함평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여황, 적양(赤良), 장본면(獐本面. 현 본양동)은 나주군, 뒤에 광산군, 광주광역시로, 오산면(烏山面. 현 임곡동)은 광산군에, 뒤에 광주 광역시로, 대화면(大化面)은 장성군 동화면에 편입되었다.
특정 행정구역이었던 다경부곡(多慶部曲. 귀화인 촌)과 영풍향(永豊鄕)은 신라 때부터 시행하였고 조선조 태종 때에 모두 폐지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함평의 향, 부곡은 고려 때부터 언급되고 있다. 다경부곡은 오늘의 무안군 현경면 동산(東山), 평산(平山), 외반(外盤), 송정(松亭), 수양(垂陽), 용정(龍井), 오류(五柳), 마산(馬山), 가입리(加入里) 지역으로 고려 때는 나주목이 관할하다가 고려 공양왕 3년(恭讓王.1391)에 함풍현의 감무(監務)가 관할하였다.
영풍향(永豊鄕)은 지금의 함평읍 일부인 옛 영풍면 지역 현 함평읍의 성남, 자풍, 수호, 만흥, 장교, 옥산, 가동, 석성, 장년리으로 이 지역 역시 나주목에서 관할하다가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함풍현의 감무가 관할하였다. 향청의 소재지는 현 함평읍 성남리 골샘 인근이었다. 백제는 굴내현(屈乃縣)과 다지현(多只縣)을 설치하였다. 663∼671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후 당(唐)이 7주를 설치하였는데 굴내현 지역에 군나현(軍那縣. 대동지지 屈奈縣)을 설치하고 대방주(帶方州)의 속현으로 하였고 다지현(多只縣) 지역에 다지현(多支縣)을 설치 사반주(沙拌州)의 영역으로 하였다.
757년(景德王 16) 굴내현을 함풍현(咸豊縣), 다지현을 다기현(多岐縣)으로 바꾸고 물아혜군(勿阿兮郡)의 속현으로 하였다.
892년(眞聖王 6) 견훤(甄萱)의 기병에 의해 후백제 세력권에 들어 갔다.
936년 후백제가 망하고 태봉국의 세력권에 들어 갔다. 940년(고려 태조 23) 함풍현은 이름을 그대로 두고 다기현을 모평현(牟平縣)으로 바꾸었다. 1018년(顯宗 9) 함풍, 모평 두 현을 무안군에서 영광군 영현으로 바꾸었다. 함풍현은 별호를 기성(箕城)이라 하고 모평현은 모양(牟陽)이라 하였다. 1172년(明宗 2) 함풍현과 모평현에 감무를 두었다. 감무를 두기 전에는 향리(鄕吏)가 현을 다스림 1391년(恭讓王 3) 영풍향과 다경부곡, 해제근농방어사(海際勤農防禦使)를 함풍의 감무가 겸임하였다. 겸임한 연(年)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391년,동국여지승람에는 1392년으로 되어 있어 1년 차이를 보이는데 세종실록지리지가 정확성을 가지고 있어 이를 택했다.
1392년(태조 원년) 해제현과 임치현을 함풍현에 병합하였다. 1409년(태종 9) 1월 18일 함풍현과 모평현 두 현을 병합하고 함풍에서 “咸”자 모평에서”平”자를 따 “함평현(咸平縣)”이라 하였다. 1413년(태종 13) 함평현에 최초의 중앙 관원인 현감을 두었고 1759년(영조 35)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14개면을 관할하였다. 동현내면(東縣內面), 평릉면(平陵面), 식지면(食知面), 갈동면(葛洞面), 월악면(月岳面), 서현내면(西縣內面), 영풍면(永豊面), 다경면(多慶面), 해제면(海際面), 신광면(新光面), 대***면(大也洞面), 해보면(海保面), 대동면(大洞面), 손불면(孫佛面) 1895년 5월 26일 23부제로 전국의 행정 구역이 바뀌면서 함평군으로 개칭하였고 광주관찰부(光州觀察府)에 속하였다.(칙령 98호) <이하 연월일은 양력임> 이 때 관할면은 14개면으로 1759년 관할면과 같은데 대***면의 이름이 대야면(大野面)으로 바뀌었다. 관할 책임자로 군수가 발령되었다. 1895년 9월 5일 면(面), 결(結), 호수의 다소(戶數多小)에 따라 5등군 까지 나누었는데 함평군은 2등군이 되었다.
(칙령 1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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