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쌍계재(19)-용재총화- 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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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4-22 11:44 조회1,396회 댓글0건본문
용재총화 慵齋叢話
조선 중기 학자 성현(成俔)이 지은 필기잡록. 1525년(중종 20) 경주(慶州)에서 간행되어 3권 3책의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다가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간행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채록되었다. 이 책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의 풍속·지리·역사·문물·제도·음악·문학·인물·설화 등 문화 전반을 다루고 있다. 각 권은 편차 없이
서술되어 있고, 권별의 구분도 내용과는 무관하다. 내용 서술상의 특징은 신분·지위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인정세태를 생생하게 유려한 문장으로 구사한 점이다. 특히 잔치음식의 종류와 맛의 특징, 나례(儺禮)·처용무 등의
절차를 수록하고 있으며 유명인의 일화, 일반 대중이나 천인들의 소화(笑話) 등 다양한 설화를 수록하고 있어서
민족학 및 구비문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이용되고 있다. 10권
성현(成俔) 1439(세종 21)∼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용12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이다. 1462년(세조 8) 식년문과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년)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예문관수찬·승문원교검을 겸임하였다. 형 임(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는데,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 觀光錄》이라 하였다. 1474년(성종 5)에 지평을 거쳐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고, 이듬해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와 1476년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대사성·동부승지·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8년에 평안도관찰사로 있었는데,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이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을 거쳐 149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아지자 한달 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해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한편,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 〈쌍화점 雙花店〉·〈이상곡 履霜曲〉·〈북전 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또, 한편으로는 관상감·사역원·전의감(殿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 뒤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용재총화 #용12齋叢話》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허백당집》·《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 浮休子談論》 등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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