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함(1470∼1534)은 조선초기의 무신. 字(자)는 子實(자실). 본관은 德水(덕수) . 이의번의 5子(자)중 3子(자)이다. 공은 나면서 재주와 슬기가 남보다 달랐다. 장성하면서 얼굴 생김새가 魁偉(괴위)하고 氣局(기괴)과 도량이 깊고 침착하였다.
용맹스러운 힘은 남보다 뛰어났고 활쏘는 재주가 극히 절묘하여 20세에 武才(무재)로 뽑혀서 궁중을 숙직하며 지키는 장교가 되었다. 1491년(성종 22) 오랑캐가 北邊(북변)을 침범하자 左議政都元帥 許琮(좌의정도원수 허종) 의 휘하장교로 종군하여 정벌하는데 공이 있었다. 回軍(회군)후 그 공으로 修義副尉(수의부위) 와 定略將軍(정략장군) 에 제수되었고, 1505년(연산군 11) 建功將軍(건공장군) 에 올랐다. 中宗反正(중종반정) (1506)시 공을 세워 靖國功臣(정국공신) 이 되고 이 일로 2계급 특진하여 折衝將軍절충장군) 에 제수되었다. 1507년(중종 2) 嘉善(가선) 에 오르고 다음 해 嘉善大夫朔州府使兼兵馬僉節制使 海豊君(가선대부삭주부사겸병마첨절제사 해풍군) 에 봉해졌다. 이후로 네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선정을 베풀어서 명성과 치적이 높았다. 1529년(중종 24) 聖節使(성절사) 로 明(명)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에는 海豊君 奉朝賀(해풍군 봉조하) 로 임명되었다. 1532년(중종 27) 順天府使(순천부사) 재임 중 1534년(중종 29) 병으로 관사에서 壽(수)65세로 卒(졸)하였다. 그의 부음에 중종은 예조좌랑 金璣(김기)에게 제문을 보내어 애도를 표하였다.
이함 신도비
이함 신도비 관석
묘역은 고등동 등자리마을 父(부)의번의 묘 남쪽 구릉 중턱에 北東向(북동향)하며 配貞夫人密陽朴氏(배정부인밀양박씨) 와의 원형 雙墳(쌍분)이다.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마을내로 진입하면 父(부)의번의 묘역과 함께 멀리서도 그 위치가 쉽게 확인된다. 묘역 바로 아래에는 장남 麟祥(인상)과 配(배)의 원형쌍분 2기가 안장되어 있다. 각 봉분은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으며 봉분 높이 150㎝, 직경 480㎝이다.
묘역에는 봉분 중앙에 묘표·상석·4각 향로석·장명등과 상석 좌우에 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상석은 1994년 3월 새로 마련한 것이다. 한편 1994년 3월 20일, 해풍군 묘역을 사초하던 중 床石(상석)밑에서 灰白磁 陶板(회백자 도판) 으로 된 11장의 誌石(지석) 이 출토되었다. 크기는 17.5×23×1.5㎝ 정도로 글씨는 음각으로 정교하였고 색조도 청자와 같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현재 이 지석은 덕수이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함 신도비 관석
봉분 중앙의 장명등은 높이 164㎝로 간주석에 5각형태의 화창이 4면에 있으며, 상부 4모지붕을 갖추고 있다. 망주석은 좌우 높이 150㎝로 작지만 굵고 우람하다. 문인석은 按頭(안두)로 좌우 높이 145㎝에 얼굴부분 54㎝인 3등신의 신체비율이다. 얼굴에서 씩씩한 기상이 느껴지며 엄지를 치켜들어 笏을 잡고 있다. 관복은 길게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墓表(묘표)는 비좌와 비신 월두형이다. 비좌는 백색화강암제로 상부에 복련문이 조식되어 있다. 비신은 백색대리석제로 비문은 前後 2面(전후 2면)에 있다. 前面(전면)에는 종3열로 ‘秉忠○義靖國功臣嘉善大夫海豊君贈議政府左參贊李公?之墓 貞夫人密陽朴氏?左(병충○의정국공신가선대부해풍군증의정부좌참찬이공함지묘 정부인밀양박씨부좌) ’의 비문이 있다. 후면에는 건립연기와 書者(서자)가 새겨져 있다. 건립연기는 崇禎紀元後再壬子(숭정기원후재임자) (1732, 영조 8) 8月(월)日(일) 改立(개립)이며, 書者(서자)는 6대손 原任 左議政○(원임 좌의정○) 이다. 크기는 비좌 높이 10㎝·너비 84㎝·두께 43㎝, 비신 높이 114㎝·너비 上(상)51㎝·下(하)50㎝·두께 20㎝이며 總高(총고)124㎝이다. 神道碑(신도비)는 묘역에서 서쪽으로 400∼500m 떨어진 등산로변에 東向(동향)하여 있는데, 바로 아래는 배밭이다. 비는 비좌와 一石(일석)의 비신 및 반월 형태의 관석에 화려한 운문과 일월문을 조식한 유례가 드문 특이한 형태이다. 비좌는 백색화강암제로 아무런 무늬가 없다. 비신은 백색대리석제로 비문은 前面에만 있다. 비신 상부의 篆書(전서)와 비문은 일부 마모로 뚜렷하지 않다. 비문은 趙仁奎(조인규)가 撰(찬)하였으며, 書者(서자)와 篆者(전자)는 마모로 인해 불명하다. 관석은 前面(전면)에 화려한 운문과 상부 중앙에 높이 18㎝, 너비 22㎝의 日紋(일문)이 뚜렷하다. 반면 後面(후면)은 화려한 운문에 높이 17㎝, 너비 6㎝인 초승달 모양의 月紋(월문)이 조식되어 있는데, 이러한 조각양식은 율동 (한사개)묘역의 神道碑(신도비)와 더불어 성남 지역에서는 유례가 드물다. 다만 아쉽게도 신도비는 수풀잡목 속에 방치되어 관리가 안되고 있으며, 현재 비신은 앞으로 5°가량 기울어져 있다. 크기는 비좌 높이 28㎝·너비 96㎝·두께 59㎝, 비신 높이 137㎝·너비 67㎝·두께 17㎝, 관석 높이 60㎝·너비 74㎝·두께 23㎝이며 總高(총고)225㎝이다.
지도번호 : 둔전 190-3
참고문헌
德水李氏 孝貞公派宗會(덕수이씨 효정공파종회) , 『眉江 李景曾 行狀 및 神道碑文-附 그 直系一門의 墓碑銘集(미강 이경증 행장 및 신도비문-부 그 직계일문의 묘비명집) 』,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