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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유연재공 선조님 필적 - 송여해묘비(宋汝諧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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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5-06-10 14:10 조회1,383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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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여해 묘비(宋汝諧 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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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icon_gray.gifbbshis1_02.gif 조선 중종 6년(1511)
tableicon_gray.gifbbshis4_03.gif 대전광역시 동구 비래동
tableicon_gray.gifbbshis5_03.gif 대전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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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여해 묘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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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여해 묘비 탁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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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여해 묘비 탁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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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자 : 鄭光弼
서 자 : 金希壽
규 모 : 전체 높이 223㎝, 비신 높이 111㎝, 비신 폭 60㎝, 비신 두께 14㎝

후(侯 : 원 또는 관찰사를 의미한다)의 이름은 여해(汝諧)이고 자는 우경(虞卿)이니 은진 사람이다. 고(考 : 아버지의 사후칭)는 순년(順年)이니 예조 정랑(禮曹正郎)이요, 조부는 계사(繼祀)니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 正五品)이요, 증조 유(愉)는 호분위 사정(虎賁衛 司正 : 五衛都總府 虎賁衛 司正이니 正七品)이다. 비(  : 母의 사후 칭)는 김씨니 직제학 맹헌(直提學 孟獻)의 따님이다.

후가 성질이 민첩하고 글을 잘하여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정유에 음직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 봉사(奉事)와 직장(直長)을 거쳐 한성부 참군(漢域府  軍 : 正七品)을 경유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 正六品)로 승진하였다. 전라도 어사로 나가서 사무를 감찰하는 것이 명백하고 진실하였다. 형조(刑曹)와 호조(戶曹)의 좌랑(佐郎)으로 옮겨서 부임하는 곳마다 치적이 올랐다. 동료들이 보기를 선배나 장자와 같이 여겨서 감히 친압하지 못했다. 후가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사무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나 힘써 공부하여 마침내 갑인 별과(甲寅別科)에 제 4등으로 뽑혀서 곧 사헌부 지평 (司憲府 持平 : 正五品)을 제수받았다가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 正五品)으로 전임되었다. 이로부터 정교(政敎)에 능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무릇 조정에서 큰 일이 있으면 대신들이 다투어 끌어서 보좌관을 삼으려 하였다. 누차 예조 참의(禮曹 議 : 正三品)를 거쳐 품계가 통정 대부(通政大夫 : 正三品)로 승진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바른말하는 것을 싫어하여 주륙하거나 파출하여 오래 되었건 얼마 안 되었건 상관하지 않았다. 후도 마침내 옥천으로 귀양갔다. 금상(今上 : 현재의 왕을 지칭함. 즉 中宗)이 즉위하자 예에 따라 벼슬을 내렸으나 직위가 오히려 떨어져서 통정대부의 계급이 회복되지 않았다. 여론이 자못 억울하다고 하였다. 마침 안동(安東)이 새로 폐조(廢朝 : 연산조를 말함)에 시달려서 정사는 피폐하고 백성은 고생하고 있기 때문에 후를 기용하여 부사에 임명하였으니 제용감정(濟用監正 : 진헌하는 포백·인삼 또는 하사할 의복·직조물 등을 맡아보던 正三品의 벼슬)에서 뽑힌 것이다. 후가 먼저 관대하게 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니 백성을 위하여 피해를 제거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과연 공사(公私)가 다 안정되어 조상(凋傷)하고 폐퇴한 여독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만기는 아직 5년 남았는데 한 고을이 그 혜택을 입기를 바랐건만 천도가 도와주지 않아 대명(大命 : 하늘의 인간사회를 떠나라는 명령)이 갑자기 내렸다. 아! 원통한 노릇이다.

후의 성질이 평탄하고 단순하며 관대하고 조용하여 겉에 나타내지를 않았다. 동기간에는 화목하게 하고 붕우에는 믿음으로써 대하고 친척이나 향당에서 간고하여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을 무휼하여 그래도 미흡하지 않나 생각하였다. 서거하자 곡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슬픔을 다하였다.

부인은 연성부원군 이석형(延城府院君 李石亨)의 따님이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세충(世忠)이고 차자는 세량(世良)이다. 다 진사다. 세충이 종실 주계군 심원(宗室 朱溪君 深源)의 따님과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는데 다 어리다. 세량(世良)이 유승양(柳承陽)의 따님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는 구수(龜壽)고 차자는 인수(麟壽)다. 따님은 어리다. 후의 장녀는 별제 윤백령 (別提 尹伯齡)에 게 출가하여 2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계(溪)고 또 하나는 어리다. 후의 차녀는 황세건(黃世健)에게 출가하여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후의 생년월일은 壬申(1542) 10월 21일이요, 서거한 년월일은 庚午(1510) 5월 19일이다. 향년이 59세였다. 동년 12월 27일 회덕현 식장산(懷德縣 食藏山)의 자리에 장례지냈다. 광필(光弼)이 겨우 이(齒)갈 만한 나이를 조금 지나서 후의 댁에 장가들어 후의 가르침을 받고 또 그 덕을 사모하였다. 벼슬살이의 전말을 광필이 아니면 누가 또 서술할 사람이 있겠는가. 명에 가로되,

덕은 두터웠는데 저 하늘이 지위 줌을 아끼고 수조차 안 주었네.
어이 하늘에 저버림 받았는가. 푸르고 푸른 저 하늘도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도다.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경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정광필(鄭光弼)은 짓다.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지제교(知製敎)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 □문원 교리 (□文院 校理) 김희수(金希壽)는 쓰다.

정덕(正德) 6년(1511) 6월 28일 비를 세우다.

〈宋恪憲〉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감사합니다. 귀한 것을 찾아내셨습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김발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발용
작성일

  대부님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작년에 송여해 묘비를 직접 찾아 나선 적이 있습니다. 문화원에 전화로 문의하였으나 묘소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고 문화원에서 소개받은 은진송씨 모파 회장이란 분과 전화 통화하였으나 대전에 송씨의 묘소가 너무 많아 일일이 알지 못한다 라는 답변을 듣고 귀경 하였습니다.  기록 속에만 나오는 묘비로 잠정 결론 내렸었는데 이렇게 사진을 보니 반갑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귀한 자료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