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여름캠프자료---김흔 장군 07 (한희유, 인후, 김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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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7-02 18:50 조회1,516회 댓글0건본문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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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6년) 3년에 김방경이 석주(碩州)에 가서 흔도를 만나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령들과 군사들이 모두 벽란도(碧瀾渡)에서 그를 마중하였다. 이때 노진의는 큰 술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김방경에게 올렸는데 김방경의 부하들은 자기들이 먼저 잔 바치는 것을 미워하여 말리었더니
노진의가 말하기를 “직할 부하나 다른 부하나 모두 다 사람인 것은 마찬가진데 무슨 앞뒤를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희유(韓希愈)가 옆에 있다가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이 자는 의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이니 청컨대 마시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경이 갑자기 일어나서 딴 데로 가버렸는데 노진의 등이 이 일에 대하여도 원한을 품었다.
위득유가 ★한희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왜 나를 동정해 주지 않는가? 나는 관직에서 쫓겨 나고 그대는 상을 받았는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욕질을 퍼붓다가 마침내 머리로 한희유의 가슴을 두 번이나 치받았으므로 한희유가 위득유를 때려서 물리치었다. 이로부터 위득유는 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그 사실을 재추와 감찰사(司)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취중에 실수했다”라고 하였으니 누가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겠는가? 그리하여 그 문제는 드디어 제기되지 않았다.
(1278년)
위득유는 더욱 더 김방경을 원망하게 되어 날마다 노진의, 김복대 등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어 김방경을 모해하였다. 그리하여 김방경의 죄상을 기록한 고발장을 가지고 흔도에게 참소하기를 “김방경이 그의 아들 김흔, 사위 조변, ★의남(義男) ★한희유 및 공유(孔愉), 나유(羅裕), 안사정(安社貞), 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더불어 왕, 공주 및 달로화적을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 ----- 아들 김흔을 진주(晋州)의 수령으로 삼고 막객(幕客) 전유(田儒)를 경산부(京山府)의 수령으로 삼고 ★의남(義男) ★안적재(安迪材)를 합포(合浦)의 수비장(守備將)으로 삼고, ★한희유에게는 병선(兵船)을 장악하는 일을 맡게 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곧 보조를 맞추어 일어나게끔 준비하였다”라는 등의 여덟 개의 조항을 들었다.
<디지털한국학>
한희유(韓希愈)
?∼1306(충렬왕 32). 고려의 권신. 가주(嘉州)출신.
원래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의 아전이었다. 군졸출신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기 때문에 항상 왕의 은덕에 감격하였고, 왕의 뜻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한편, 성품이 소박하고 도량이 넓으며 활쏘고 말달리는 것을 잘하고 담력도 대단하여, 1280년(충렬왕 6) 5월에는 대장군으로서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고성(固城)·칠포(漆浦)에 침입한 왜적을 방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일개 대정(隊正)에서 출발하여 대장군이 된 그에게는 모함의 사건도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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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년에는 쌍성(雙城)에 주둔하여 합단적(哈丹賊)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같은해 8월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인 1291년에는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오자, 원나라에서는 설도간(薛#도62干) 및 나만알대왕(那蠻#알09大王)을 보내어 구원한 적이 있었으나, 또다시 정병(精兵)이 와서 대진하게 되자, 창을 잡고 말을 달려 적진 속에 돌입하니 적진이 놀라 무너져버렸다. 또한, 용사를 잡아 목베어 그 머리를 창 끝에 매다니 적진이 모두 전의를 잃고 크게 패하였다.
같은해 6월에는 충청도에서 합단의 잔당을 추격하여 적군 580여명의 항복을 받았다. 충렬왕은 소환하여 강도(江都)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다시 1291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원나라에서는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으로 임명하여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주고 궁시(弓矢)·옥대(玉帶)·은(銀) 등을 전공으로 하사하였다. 이어 다음해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삼고 진변만호(鎭邊萬戶)를 삼았다.
1295년 8월에는 김신보(金信甫)의 참소로 조월도(祖月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1299년 만호 인후(印侯)·★김흔(金#흔05)과 밀직 원경(元卿)에 의하여 불법한 일을 꾀한다고 하여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좌승 합산(哈散)은 왕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닷새 동안 국문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충렬왕은 이 사건이 원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인후 등에게 부탁하였으나, 인후·김흔은 원나라에 가서 이 사건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나라에서 파견된 탑해(塔海)·활활불화(#활03#활03不花) 등에 의하여 원나라에 호송되었다.
1300년 왕이 원나라에 가서 희유와 인후의 시비곡직을 밝혀 다시 환국하게 되었다.
1302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고, 다음해에 첨의우중찬(僉議右中贊)에 임명되면서 7월에는 원나라의 명에 의하여 석주(石胄)와 그 아들을 연경으로 압송하기도 하였고, 1305년 11월 충렬왕을 따라 연경에 행차하였다.
《고려사》 제123권 - 열전 제36 > 폐행 1 >
인후
〔승단(承旦)의 기사 첨부〕
인후는 본시 몽고 사람인데 그 본명은 홀라대이며 제국 공주(齊國公主)의 겁령구(怯怜口)였다. 겁령구는 중국어인바 사적으로 종속권 사람이란 말이다. 삼가(三哥) 차고대와 함께 공주를 따라와서 중낭장(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그를 장군으로 임용하려고 이름을 고치게 하였더니 홀라대가 대장군 인공수(印公秀)에게 말하기를 ꡒ내가 너하고 친하니 왜 네 성을 못빌리겠는가?ꡓ라고 하면서 드디어 인후라고 성명을 고쳤다.
인후는 장순룡(張舜龍), 차신(車信)과 서로 경쟁적으로 큰 집을 세웠는데 집이 극히 사치스럽고 참월(僭越)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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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단(哈丹)이 침입하였을 때 왕은 재추들을 불러 놓고 방어 대책을 토의하였다. 이때 인후는 말하기를
ꡒ전하께서는 친히 동계(東界)로 나가서 적의 길을 끊고 만약 적이 서울 근방에 침입하면 전하는 강화도로 들어가고 우리들로 하여금 병력을 거느리고 방어하게 하십시오ꡓ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말하기를 ꡒ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내가 먼저 피난하여 백성을 낙심시키겠는가? 적이 비록 승승장구하여 들어와도 내가 삼군의 후군이 되어 사직을 보존할 것이다ꡓ하고 인후를 파견하여 방어케 하였다. 인후는 연기(燕岐)까지 적을 추격하여 한희유(韓希愈), ★김흔과 함께 적을 격파한 후 전승 보고를 하고 포로를 보냈더니 원나라 황제가 인후에게 진변 만호부 달로화적(鎭邊萬戶府達魯花赤) 벼슬을 주고 옥대(玉帶) 1개, 은 1정(錠), 말안장 1벌을 상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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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유가 합포에서 진수할 때였다. 인후가 왕명을 받고왔는데 서로 자리를 다투게 되었다. 한희유는 한참 동안이나 인후의 목을 틀어쥐고 배를 타고 올라 앉아 있었다. 인후가 돌아 와서 공주에게 하소연하고 한희유를 처벌해 달라고 청했으나 공주는 말하기를 ꡒ한희유는 나라에 공로가 있고 나이도 너보다 많다. 한희유가 아니면 누가 감히 너를 모욕(侮謔)할 사람이 있겠는가? 다시는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ꡓ라고 하였다.
인후가 ★김흔, 원경(元卿)과 함께 한희유를 거꾸러뜨릴 음모를 하였으나 공주가 죽고 또 왕이 한희유를 정승으로 삼았으므로 인후 등이 두려워서 감히 어찌 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 중(僧) 일영(日英)이 거짓말을 꾸며서 낭장 이승우(李承祐)에게 말하기를 ꡒ한희유 등이 반역을 음모한다ꡓ고 하였고 이승우는 이것을 인후와 ★김흔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인후와 ★김흔 등은 군대를 발동시켜서 한희유, 상장군 이영주(李英柱), 천호 석천보(石天補) 및 그의 아우 석천경(石天卿), 장군 이무(李茂), 박송견(朴松堅), 원충갑(元忠甲), 한대장(韓大莊), 유수대(兪守大), 전 중낭장 백서경(白瑞卿), 별장 배인검(裴仁儉) 등 10여 명을 체포한 후 행성(行省) 좌승(左丞) 합산(哈散)에게 말하기를
ꡒ한희유 등이 장차 인후와 ★김흔을 죽이고 왕을 납치하여 바다 섬으로 도망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사태가 긴급하여 만약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그 화가 예측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지금 이미 체포했으니 좌승은 이것을 처결하라ꡓ하였다. 이에 대하여 합산이 ꡒ이 일을 임금도 알고 있는가?ꡓ라고 물으니 인후는 ꡒ임금이 어찌 모르겠는가?ꡓ라고 하였다. 합산은 그 아들을 왕궁으로 보내여 동정을 살피게 하면서 말하기를 ꡒ만약 이것을 왕이 알고 있다면 반드시 경비가 엄할 것이다. 너는 왕을 보고 ꡐ우리 아버지가 사변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호위병이 없으므로 저더러 병기를 빌려 오라고 했습니다ꡑ하라ꡓ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이 이른 새벽에 왕궁으로 가니 궁중은 고요하고 호위병은 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왕궁에 들어가니 왕은 즉시로 그를 불러 보고 활과 칼을 주었다. 그 아들이 돌아와서 합산에게 말하기를
ꡒ전자의 말을 허튼소립니다. 그러나 이미 한희유 등을 잡았으니 왕궁에 가서 그들을 심문할 것을 청하십시오?ꡓ라고 하였다.
왕이 합산과 함께 문초했으나 불복하였으므로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고 일영은 도망쳤다.
왕은 합산과 함께 또 한희유 등을 흥국사(興國寺)에서 5일간에 걸쳐 문초했으나 이영주와 배인검이 거짓으로 죄를 인정했을 뿐이요. 3일간 더 문초했으나 한의유 등은 끝내 불복하였다.
인후, ★김흔, 원경은 자기들 도당 상장군 강수, 대장군 김칠초(金七貂), 장군 환정(桓貞), 이우(李瑀), 소윤(少尹) 민적 등과 함께 일영이 도주하였으므로 한희유 등이 불복한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가서 항제에게 고소하려 하였다. 이때 왕은 승지 김심(金深)을 시켜 만류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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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귀국하자 왕은 유비가 인후와 합심되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처벌하려 하였으므로 유비가 도망치니 왕은 그의 관직을 파면시켰고 또 인후의 관직도 파면하고 인후가 찼던 만호부(萬戶符)를 빼앗아 왕유소(王惟紹)에게 주었으며 한희유를 다시 정승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인후는 겁이 나서 계속 원나라에 유하면서 감히 돌아오지 못하다가 한희유가 죽고 왕유소도 사형된 후에 인후는 자의 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 평양군(平陽君)으로 되었으며 또 다시 만호부(萬戶符)를 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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