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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잘 알려지지 않은 선조님 시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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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5-07-11 17:33 조회1,649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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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도총관공파는 장흥입향 이후 조선후기에 이르러 문중 현조를 모신 사현사를 건립할 만큼 족적 기반과 문중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현사는 1846년(헌종 12) 건립한 사우로 築隱 金方勵(1324∼1423), 축은의 손자인 退隱 金係熙(1400∼1455), 퇴은의 손자인 淡軒 金克儉(1439∼1498), 담헌의 현손인 節翁公 金渾(1539∼1622)을 배향한 사우이다. 장흥군 안양면 수양리 96-2번지 소재한다.


김계희(金係熙);

金順生의 아들이다. 자는晦叔, 호는退隱. 世宗乙卯(1435)에 生員探花郞, 辛酉(1441)에 문과에 올라 예문관 검열에 들어갔으나 부모가 연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니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한강까지 나와서 송별하고 시로 읊으니 太虛亭 崔恒(뒤에 영의정)은 "청운의 뜻은 백운의 뜻을 빼앗지 못하더라",(靑雲未奪白蕓思) 집현전 校理 魯山李永瑞는 "어버이 떠나 벼슬 하는 이 몇 사람인가 마는(離親 仕宦知多少)강위의 가을 바람에 홀로 그대만을 보내네"(江山秋風獨送君)라 읊으니 모두가 조선명시다.

그때지은 퇴은정은 그의 손자金克儉, 증손金寬, 현손金庾信등이 모두 한람학사를 역임하여 세칭 한림정이라 부른다.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지금도 그 마을을 한람정이라고 칭하고 그 면을 한림면, 翰林亭驛, 한림중학교 등이 있다. 홍문관교리, 사헌부감찰, 경상도도사를 거쳐 나주목사가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하여 학교를 크게 수리 했으므로 백성들이 그가 간 뒤에도 생각하였다., 그가 죽자 백성들이 어버이 상을 당한 것 같았고 寶(계)를 세워 제삿날이 되면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明倫堂에서 제사를 지냈다. 1462년(世祖8)吏曹參判으로서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고 漢城判尹을 지냈으며, 1463년(世祖9)에 仁順府尹에 이르렀다.

김극검(金克儉);(1439∼1499)

김계희(金係熙)의 손자다. 자는士廉, 호는淡軒,乖崖(괴애)다. 1459년(세조5)에生員,進士에 모두 일등. 같은해 문과에 오르고 翰林을 거쳐 1466년(세조12)에 文科重試에 壯元, 拔英試에 3등에 올랐다. 慶尙都事, 梁山, 咸安郡守로서 치적이 있고, 도승지, 홍문관 副提學, 황해·전라 觀察使, 안동 대도호부사 名宦이 되었고 사헌부 대사헌이다. 그가 죽자 벼슬이 이품에 이르렀으나 집도 없고 저축도 없다고 하여 나라에서 크게 부의를 하고 서울에서 고향인 김해까지 안장을 하니 그 마을을 지금도 觀察使촌이라 부른다. 史臣의 평론에 "극검은 性行이 淸簡하여 사림이 복종한다."하였다.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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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이리 저리 찾아 보았습니다.  당사자인 축은에 관한 자료는 더 찾아보겠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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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합니다.  축은 퇴은 담헌  김해김씨가 맞군요.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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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아저씨, 감사합니다. 어제는 산행 잘 다녀오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