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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정묘지명(金周鼎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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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8-22 19:21 조회1,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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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정묘지명(金周鼎墓誌銘)  


문숙공(文肅公) 묘지


생명이 있는 □ 것들 중에서 일찍이 오직 한 가지 면에서는 뛰어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준마에는 난(鸞)새와 봉(鳳)새의 날개가 빠져 있고, 깃털이 아름다운 새에는 준마의 발굽이 없으니, 날개 달린 용[應龍]과 같은 경우는 드물다. 선비 역시 □와 같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장차 □이 되는 것은 옛부터 어려운 일이다. 황전(黃錢)과 청전(靑錢)을 함께 가져 능히 둘 다 아름답게 하는 일은 드문데, 그것을 겸하여 지닌 자는 오직 우리 나라를 통털어 한 사람뿐이다.

공의 이름은 주정(周鼎)이고, 자는 □이며, 해양군(海陽郡) 사람이다. 증조 위(位)는 상서령(尙書令)에 추봉되고, 조부 광세(光世)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봉되었으며, 아버지 경량(鏡亮)은 조청대부 금오위대장군(朝請大夫 金吾衛大將軍)을 지냈다. 공은 젊은 나이[弱冠]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지(葬地)를 찾아 □제(兄弟?)들과 함께 갔는데, 공이 홀로 묘 안에서 복령(茯笭) 버섯을 얻으니 이를 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그 뒤 오랫동안 고향에서 힘써 공부하였는데, 글씨를 잘 쓰며 □문(文)에 □ 뛰어났다.

정사년(고종 44, 1257 )에 부성현위(富城縣尉)가 되었다. □순문후(巡門侯) 한취(韓就)가 공이 고을을 다스린 치적을 으뜸으로 평가하여 천거하였으므로 권도병마녹사(權都兵馬錄事)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북조(北朝 : 元)에 행리서장관(行李書狀官)으로 다녀와 업무를 보고하니, 당시의 집정(執政)인 해양공(海陽公 : 金俊)이 그릇으로 여겼다. 지원(至元) 원년 갑자년(원종 5, 1264 )에 과거[春場]에 응시하여 1등으로 뽑혔다. 여러 번 옮겨 해양부전첨(海陽府典籤)이 되었다가 드디어 내시(內侍)에 적(籍)을 두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정사당(政事堂)에 들어갔다. 잇달아 합문지후 형부낭중 국학직강(閤門祗候 刑部郎中 國學直講)에 임명되고, 국자사업 보문대제 지제고(國子司業 寶文待制 知制誥)로 승진하였다.

갑술년(원종 15, 1274 )에 □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즉위하자 곧 이부시랑 조정대부 대부경 보문각직학사 우사의대부(吏部侍郞 朝靖大夫 大府卿 寶文閣直學士 右司議大夫)에 임명되었다. 시무(時務)를 논하여 20여 조를 봉(封)하여 올리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여러 가지를 시행하였다. □사(□司)를 거쳐 사마시(司馬試)를 주관하였다. 무인년(충렬왕 4, 1278 )에 임금을 호종하여 북조(北朝, 元)로 갔는데 임금이 심복으로 여겼다. 중찬(中贊 : 金方慶)의 죄가 없음을 밝히고, □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아문(衙門)을 파하여 원래대로 환원하도록 하였다. 돌아와 중대부 우승지(中大夫 右承旨)에 임명되고, 잠시 뒤 밀직사부사 문한학사(密直司副使 文翰學士)가 되었다. 경진년(충렬왕 6, 1280)에 다시 호종하여 돌아오자 임금이 문무의 재능을 갖추었다고 하여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하였다. 또한 상국(上國 : 元)의 선□ 소용대장군 관군만호(宣授 昭勇大將軍 管軍萬戶)가 되면서 이에 금호부(金虎符)와 인신(印信)을 받았다.

신사년(충렬왕 7, 1281 )에 우익만호(右翼萬戶)로서 □(倭를?) 정벌할 때 군사들이 질병에 많이 걸려 □ 능히 서로 구휼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군(□軍)으로 공의 힘으로 □졸(軍卒?)을 □ 보호하고, 온전하게 □ 도와준 것이 많았다. 또한 태풍으로 인하여 선박이 크게 부서져 사람과 물자들이 □ 바다에 빠져 떠다니자 □ 공이 □ 보고 □ 건져 실었는데, 목숨을 건진 사람이 또한 400여 명이나 되었다. 군사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따랐다. 돌아와 광정대부 판밀직사사 □감찰 □학사승지 겸 □장(匡靖大夫 判密直司事 □監察□學士承旨 兼 □將)에 임명되었다. 갑신년(충렬왕 10, 1284 )에 동남도 병마사(東南道 兵馬使)로서 □포(合浦?)로 출진(出鎭)하였다. 곧 지공거(知貢擧)로 공을 세우고 상□(相府?)에 들어가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가 되었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뒤에 불려와 □존(□尊)을 뵙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리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고 보문서태학사 세자이부(寶文署太學士 世子貳傅)를 더하여 주었다.

당시 □호(□豪)들이 권세를 믿고 □하니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였다. 임금이 □ 바로잡고자 하여 □ 다스리도록 하였다. 강관(絳灌)의 무리들이 더욱 해를 끼쳤으나, 능히 □ 훌륭하게 이루어내었다. 공이 마침 궁궐의 연회에서 술에 취하여 □ 못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죄를 받아 □상□<相府에서 내쫓기고?> 이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폄출되었으나, 반 년도 되지 않아 □(복직되었다?).

3월에 처음 작은 병이 들었는데, 낫지 않아 경인년(충렬왕 16, 1290) 3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면서 미리 □일시(日時)와 □ 뒷일을 부탁하였다. □ 정신이 또렷하고 태연하고 □ 편안하게 돌아가시니, 얼굴빛이 맑고 깨끗하였다. 향년 63세이다.

공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바라보면 근엄하여 마치 두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성품은 □하여 평생 한 사람도 채찍질한 적이 없었다. □사(□事)에 밝고 □학(□學)에 힘쓰며, 무릇 정사를 맡은 것이 13년이다. 두 차례 문형(文衡)을 잡아 발탁한 인재가 모두 당시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금□(金□)를 차지 않았으나 넉넉하게 지낸 것이 또한 7년이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금(十金?)의 재산이 없었으니, 공의 덕이야말로 맑다고 할 것이다.

아, 생전에 바로 현인이었으니 보통 사람들이 □(千?)에 한 번 만날 수 □ 있는 것으로 □ 더욱 □ 도움이 되었다. □보(宰輔)에 올랐으나 □ 생전에 그 복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만물이 □ 어찌 □ 알지 못하는가. □ 세상의 □ 백성과 □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현인으로 남게 되었다.

장덕현 사호(章德縣 司戶) 장득구(張得球)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심(深)은 지금 좌중금지유문(左中禁指諭文)이고, 장녀는 낭장(郎將) 진□단(陳□鍴)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장군(將軍) 윤□손(尹□孫)에게 시집갔다. □ 찬성사(贊成事) 김련(金璉)의 딸과 결혼하여 1남을 낳으니, 가(珂)인데 지금 □녹사(錄事)이다. 뒤에 판합문사(判閤門事) 이신손(李信孫)의 딸과 결혼하였다.

□ 장례를 치르면서 아들이 □ 행장을 갖추어 묘지명을 □(청하니), 대개 내가 일찍이 공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 훌륭한 전기를 보니 뛰어남이 □ 공과 같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우리 공이여, □ 장원으로 급제하여 □

□ 나라의 문무의 재능을 □ 가졌으며

조정에 들어와 신률(神律)로 다스렸으며

과거[棘圍]를 주관하여 연(蓮)꽃 같은 많은 인재들을 뽑았도다.

일신(一身)이 □하였으니 그 덕에 힘입을 것이며

옥(玉)에는 본디 더러움이 없으나 소인(小人)들이 <결락>.

  지원(至元) 27년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 짓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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