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원관 <고려국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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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8-26 10:35 조회1,972회 댓글0건본문
*원부---원관=원정,<원경>---여+김승용, 원충
*김방경---1김선,<2김흔, 3김순>---2김승용+여(부 원관)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는 閔漬(민지,1248-1326)가 撰하고 중대광상락군 金恂(김순, 1258-1321)이 書幷題하여 元祐元年 2月日 한 것으로,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한림원직학사 조열대부 본국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부사 치사 민(閔)□□ 지음.
중대광 상락군 김순(金恂)이 글씨와 제액(題額)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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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延祐) 원년(충숙왕 1, 1314 ) 2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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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주(功德主)는 대광 첨의찬성사 판총부사 치사(大匡 僉議贊成事 判總部事 致仕) 원관(元瓘)이고, 성해자조명종대사(性海慈照明宗大師) 화엄종주(華嚴宗主)로 항주로 고려혜인교사(杭州路 高麗惠因敎寺) 주지인 승려 혜복(慧福)이 비를 세움.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이?, 옥금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6)
○ 著者 閔漬 (1248-1326)
○ 典據 <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7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인데, 이의 찬자는 민지, 서자는 김순으로서 이들 두 사람은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도 찬,서를 함께 하였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 *69)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는 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
이에 나타난 元瓘(?-?)은 첨의중찬 元傅의 아들로서 1298년 (충렬왕24, 대덕2) 11월에 지밀직사사 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8년 (충선왕 복위년) 10월에 宰臣으로서 왕을 수녕궁에서 饗宴(향연)한 인물이지만 *70) 고려측의 자료에서는 그의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려사열전20, 원부, 고려사 세가31 충렬왕24년 11월 경술, 세가33 충선왕복위년 10월 갑진, 고려묘지명집성 <박거실처원씨 묘지명>, <원충 묘지명>
이 자료 및 다음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그의 호가 退翁임을 알 수 있고, 충선왕의 퇴위 이후 왕을 수종하여 元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71)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의 아들 元忠이 충선왕으로부터 賜姓받게 되었을 것이다.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원충묘지명)
아울러 강남 지역에 진출하여 강절행성 경원로 >현에 위치한 천동사 *72) 및 항주의 고려혜인사에 대장경의 인본과 토지를 시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천동사는 후일 충선왕이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를 피해 피신한 사찰이다.
■ 원관묘지명(元瓘墓誌銘) (1247~1316)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해석문>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원공(元公) 묘지명 및 서문 <결락> 쓰고,
중대광 검교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여흥군(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驪興君) 민지(閔漬) 지음.
공의 이름은 관(瓘)이고, 자는 퇴옹(退翁)으로, 원주(原州) 사람이다. 원래 이름이 정(貞)이었으나 성과 이름이 상국(上國 : 元)의 연호(年號)와 서로 같으므로 고쳤다. 증조는 좌사간 지제고(左司諫 知制誥) 승윤(承胤)이고, 조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봉된 진(瑨)이며, 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 수대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병부사(金紫光祿大夫 守大傅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兵部事)이고 시호가 문순공(文純公)인 부(傅)이다. 어머니는 봉성군대부인(峰城郡大夫人) 염씨(廉氏)인데 예빈□경(禮賓□卿) 수장(守藏)의 장녀이니, 곧 중고(中古)의 명재상인 신약(信若)의 손녀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태부소윤(太傅少尹)이 되고, 청주목부사(淸州牧副使)가 되어 나가자 다스림에 위엄과 은혜가 있었다. 이듬해에 국가에서 재상의 아들로 재능이 있는 자 10여 명을 뽑아 천자의 조정에 입시(入侍)하게 하였는데 궁전배(弓箭陪)라고 불렀다. 이 때에 총재(?宰, 金方慶)의 아들인 대장군(大將軍) 김흔(金?)이 그 우두머리가 되고, 공은 □ 재상의 아들로 부(副)가 되었다. □ 이 때 조의대부 비서윤 세자중윤(朝議大夫 秘書尹 世子中允)으로 뛰어 올랐다. 정해년(충렬왕 13, 1287 )에 부친상을 당하여 돌아오게 되었으나, 상이 끝나자 다시 기용되어
---또 강절(江浙)에서 대장경 한 부가 만들어져서 항주(杭州)의 혜인사(惠因寺)에 모셔두었는데, □ 실로 만세(萬世)의 보물이었다. 이를 아울러 사들이면서 □전(田)□장(藏), □백찬(白粲, 白米) 15□를 바쳤다. 몇 년에 걸쳐 토지와 노비[田藏]의 경비를 들여 기울여 장수를 비는 비석을 세우니, 강남의 도인(道人)과 속인(俗人)이 노래를 지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시를 이은 것이 한 축(軸)이나 되었는데 이를 보내왔다.
---공은 처음 지첨의부사 판삼사사(知僉議府事 判三司事) 홍녹준(洪祿遵)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자녀가 없이 사망하였다.
다시 동지밀직사사 전리판서(同知密直司事 典理判書)로 은퇴한 곽여필(郭汝弼)의 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관례(冠禮)를 올리기 전 일찍 죽었고, 딸은 관군만호 성균제주(官軍萬戶 成均祭酒) 김승용(金承用)에게 시집갔다.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다시 좌승지(左承旨) 김신(金信)의 딸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충(忠)은 □□ 통헌대부 밀직부사 상호군(通憲大夫 密直副使 上護軍)이고, 차남은 □인데 역시 먼저 죽었다. 큰딸은 서원수군만호 □□위보승호군(西原水軍萬戶 □□衛保勝護軍) 박거실(朴居實)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동지밀직사사 민부전서(同知密直司事 民部典書) 민적(閔?)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우사보 지제교(右思補 知製敎) 김광철(金光轍)에게 시집갔다.
---이 해 □ 9월 초나흘에 장단현(長湍縣)의 금동(金洞)에 장례지내려 하면서, 아들과 사위들이 행장을 갖추어 나(=민지)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 나는 늙고 병든 지 오래 되어 □□□□□ 사양하고 피하려고 하였으나, 공(=원관)은 나(=민지)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同榜], 어쩔 수 없이 다만 엉성하게나마 그 대략을 적는다.
■ 문화일보 (2005/01/11)
“한국불교계 참여” 목소리 높다
中 항저우市 ‘의천 머물던 고려寺’ 복원사업
불교전적의 수집과 중국 불교계의 새로운 사조를 둘러보기 위해 송(宋)나라에 유학했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의 체류를 계기로 이후 의천과 고려 왕실 및 정부의 후원을 받았던 중국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시 고려사(高麗寺)의 복원소식이 최근 국내에 전해지면서 이번 복원계획을 주도하는 중국의 의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월간 ‘선문화’ 발행인인 최석환씨는 “지난해 11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선사 탄신 1100주년 기념 학술연토회’에 참석했다가 항저우 종교국장과 이곳 불학원장인 광취안(光泉)스님으로부터 고려사(또는 혜인사)가 올해 10월 준공을 목표로 복원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최근 밝혔다. 또 광취안 스님 등 중국의 고려사 복원 대표단이 지난해 같은 달 한국을 방문, 자료조사까지 끝마쳤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여러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았던 고려사 복원이 이렇게 급진전된 데는 중국 내 한국 문화유적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는 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의 노력과 함께 고려사터 인근인 항저우 시후(西湖) 일대를 찾는 한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중국측의 의도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국내 일각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떠올리며 3만평의 부지에 고려사와 대각국사 기념관 등을 계획하고 있는 이번 복원계획에 한국측의 참여가 전혀 없음은 물론 국내 불교계의 무관심 속에서 중국 항저우시 주도로 행해지고 있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의천의 흔적이 서려 있고 고려왕실의 후원으로 유지됐던 사찰인만큼 한·중 우호를 위해서도 한국 불교계의 일정한 참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지난 1995년 문화일보에서 ‘의천(義天) 구법(求法) 2만리’로 연재된 기획시리즈를 위해 최병헌 서울대 교수 등 학술조사단이 중국 항저우 고려사터를 찾았을 때 법당 자리에는 허름한 공장이 들어서 있는 등 고려사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 현지 주민은 ‘고려보살’이라는 불상과 커다란 비석이 있었던 3채의 건물이 문화대혁명 때 완전히 파괴됐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최병헌 교수는 옛날 고려사 전성기에 즐비했던 건물들인 대웅전과 천왕전, 천불각, 화엄경각, 칠조당, 종루, 고려왕사(高麗王祀) 등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며 공장으로 전용된 법당자리와 그 앞의 농지에 대한 정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런 과정이 일체 무시되고 설계와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란 지적이다.
최석환씨는 “현재 고려사터 일부에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정부가 중국 저장성 정부와 조인을 맺고 화자산좡(花家山莊)이란 호텔을 지어 공동경영하며 차(茶)등 자신들의 특산물을 홍보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정부나 불교계의 대응이 너무 안일하다”고 말했다.
고려사의 원래 이름은 927년 오월왕(吳越王) 전씨(錢氏)가 선원으로 건립한 혜인원(慧因院)이었다. 고려 문종(文宗)의 4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은 31세 때인 선종 2년(1085) 송나라에 들어가 13개월여 체류하는동안 이곳에서 고승 정원(淨源)법사를 만나 화엄학을 토론했다. 의천이 귀국후 재정적인 후원을 한 것을 계기로 이름이 혜인고려화엄교사(慧因高麗華嚴敎寺)로 바뀌었으며 줄여서 고려사로 더 많이 불려지게 됐다.
또 의천과의 인연을 계기로 그의 모후 인예태후(仁睿太后)와 형인 선종(宣宗)도 금물로 쓴 화엄경을 보내주었으며 숙종(肅宗)은 이를 보관할 경각(經閣)을 지을 경비도 시주했다. 1628년 간행된 ‘옥잠산(玉岑山) 혜인고려화엄교사지(志)’에 따르면1312년 충선왕(忠宣王)도 고려 관리를 파견해 대장경 한 질과 사찰 보수비용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 이 곳과 고려의 관계는 고려후기까지 계속됐으며 고려사라는 이름도 1757년 법운사(法雲寺)로 바뀔때까지 이어졌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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