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일기 35---사천지방 여행기 6(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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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0-18 17:54 조회1,438회 댓글0건본문
10월 7일 (금) 사천여행 7일차
하얼빈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비행기 시간이 확정되지 않아 호텔에 남아 빈둥빈둥하다가 점심때가 다 되어 밤 10시 비행기로 확정되는 바람에 하루 일정을 공치게 되었다. 이곳 성도에서 남쪽으로 너댓시간 거리에 있는 노주[누저우]시에 다녀오고 싶었는데, 어제 저녁에라도 비행기 시간이 확정되었다면 가볼수도 있었으나 이도 저도 안 되게 되었다. 하릴없이 사천 지도만 뒤적이다 보니, 여주시 주변 양자강 위아래로 安寧鎭, 寧安鎭, 長寧鎭 등의 지명이 보이고 있다. 척약재 김구용 선조님께서 양자강상 유배길에 객사하신 <여주시 永寧縣 감문참>이 이곳 어디일 가능성만 확인하였다.
점심때가 되어 성도 시내로 나가 마파두부집에 들어가 그 유명한 마파두푸 원조 요리를 먹었으나 입안이 얼얼하여 먹다가 말았다. 오후 시간에 시내 공원 한 군데를 가 보기로 했다. 사천대학 인근에 있는 강변에 있는 望江공원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우연히 들린 사천대학 정문 글씨 ‘四川大學’ 네 글자는 등소평이 쓴 글씨였다. 등소평의 고향이 바로 사천이라고 한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모택동이 없었다면 新中國이 없고, 등소평이 없었다면 부유한 中國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197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改革開放을 이끌어 오늘날의 中國을 일구어낸 등소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망강공원에는 어디에나 어른 팔뚝만한 굵기의 대나무가 하늘높이 솟아 있는데, 당나라 제일의 규수시인이요, 중국의 황진이라 할 수 있는 설도(薛濤)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시는 물론 행서 또한 잘 썼을뿐만 아니라 만년에는 손수 붉게 물들인 종이를 만들어 그곳에 시를 썼다고 한다. 이를 설도箋이라고 했는데 이를 만들때 물을 길었다는 설도井, 설도전을 만든 현장인 浣箋亭, 그 다락에 기대어 시를 짓고 설도전에 옮겼다는 강변의 吟詩樓 초석, 그리고 그녀의 시에 빈도 높게 등장하는 대나무 1백40여 종이 숲을 이루며 보존되어 있었다. 만년의 그녀는 두보의 초당이 있고,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유혹했던 탄금대 근처 완화계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묘는 현재 이곳 망강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다.
공원내 좌판에서 문고판만한 성씨 책을 팔고 있었다. 金씨 편을 찾았으나 간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는 중국내 제69 성씨인데, 제50 성씨까지만 간행되었다고 했다. 아쉬웠으나 할수 없었다. 대신 呂씨 편을 한권 샀는데, 뒤쪽 부록난에 제69성 金씨는 0.32%를 점유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였다. 13억명의 0.32%는 얼마인가? 4백만명? 바로 계산되지 않았다. 제1성 李 7.94%, 제2성 王 7.41%, 제3성 張 7.07%, 제4성 柳 5.38% 등도 보였다.
7일동안의 강행군으로 둘다 다리가 퉁퉁 부어 더 이상 돌아다니기가 귀찮아 졌다. 호텔로 돌아와 두세시간 낮잠을 자다가 호텔 옆 [훠궈]집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들어가 중국식 샤브샤브로 저녁을 먹고 성도공항으로 이동했다. 밤 10시 성도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곧장 북으로 서안을 지나고 방향을 틀어 동으로 산동 제남을 지나 다시 방향을 북으로 틀어 대련, 심양, 장춘을 거쳐 다음날 새벽 1시 40분 하얼빈공항에 내렸다. 버스를 타고 하얼빈시내로 들어와 택시를 갈아타고 대학 숙소에 돌아오니 새벽 3시였다. 한참 잠에 빠져 있는 아이 둘의 얼굴을 보고나니 여독이 이미 풀리는 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잠은 이미 달아나고 10분만에 짐을 정리해두고 TV를 작은 소리로 틀어놓고 한시간 가량 서성거리다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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