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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고려첨의중찬 으로 써야할지 고려첨의령이라 해야할지 명쾌한 해석을 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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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5-11-12 10:53 조회1,4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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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문(經史門) - 고려의 관제
고려의 관제는 지금 제도와 이동(異同)이 있다. 삼사(三師)와 삼공(三公)은 한(漢) 나라 제도의 문하(門下)ㆍ중서(中書)처럼 되어 여러 관원을 맡아 통솔하였다. 그 중 낭ㆍ사(郞舍)는 간쟁(諫諍)하고 논박(論駁)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혹 첨의부(僉議府)라고도 일컬었다. 판문하(判門下)가 있었는데 혹 중서령(中書令)ㆍ도첨의령(都僉議令)이라고도 했고, 시중(侍中)이 있었는데 혹 첨의중찬(僉議中贊)ㆍ좌우정승(左右政丞)이라고도 일컬었다.
찬성사(贊成事)가 있었는데 혹 내사시랑(內史侍郞)ㆍ평장사 문하시랑(平章事門下侍郞)ㆍ평장사 첨의시랑(平章事僉議侍郞)이라고도 했고, 평리(評理)가 있었는데 혹 참지정사(參知政事)라고도 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ㆍ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ㆍ상시(常侍)가 있었는데, 상시는 좌ㆍ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라고도 했다.
직문하(直門下)ㆍ사의대부(司議大夫)가 있었는데 혹 간대부(諫大夫)라고도 했다. 그 중 헌납(獻納)은 혹 보궐(補闕)ㆍ사간(司諫)이라고도 했고, 정언(正言)은 혹 습유(拾遺)ㆍ사보(思補)ㆍ주서(注書) 또 중서주서(中書注書)라고도 하였으니, 대개 낭ㆍ사(郞舍) 이하는 지금의 간원(諫院)이었다.
밀직사(密直司)는 지금의 정원(政院)과 같았다. 좌ㆍ우승선(左右承宣)이 있었는데 각각 부관(副官)이 있어서 혹은 승지(承旨), 혹은 대언(代言)이라고 하였다. 이조(吏曹)는 혹 선부(選部)ㆍ전리(典理)라고도 했는데 그 중 상서(尙書)는 혹 판서(判書)라고도 했고, 시랑(侍郞)은 혹 총랑(摠郞)이라고도 했으며, 낭중(郞中)은 혹 정랑(正郞), 원외랑(員外郞)은 혹 좌랑(佐郞)이라고도 하였다.
호조(戶曹)는 혹 민관(民官)ㆍ판도(判圖)라고도 했고, 형조(刑曹)는 혹 언부(讞部), 전리(典理)는 혹 의조(儀曹), 공조(工曹)는 혹 우부(虞部)라 하기도 하였다. 그때 우부(虞部)은 지금의 우부(虞部)이었고, 사헌부(司憲府)는 혹 어사대(御史臺)라고도 했는데 그 중 대부(大夫)는 혹 제헌(提憲)ㆍ대사헌(大司憲)이라 하기도 했다. 중승(中丞)은 혹 집의(執義)라고도 했고 시어사(侍御史)는 혹 장령(掌令)이라고도 했으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는 혹 지평(持平)ㆍ잡단(雜端)이라 하기도 했고, 감찰어사(監察御史)는 혹 규정(糾正)이라고도 하였다.
그 때 예문관(藝文館)은 혹 원봉성(元鳳省)ㆍ학사원(學士院)ㆍ한림원(翰林院)ㆍ사림원(詞林院)이라고도 했는데, 그 중 대사백(大詞伯)은 혹 대제학(大提學)ㆍ대학사(大學士)라고도 했고, 사백(詞伯)은 혹 제학(提學), 직사백(直詞伯)은 혹 직제학(直提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때 성균관(成均館)은 혹 국자(國子)라고도 했는데, 좨주(祭酒)는 혹 전주(典酒), 사성(司成)과 사업(司業)은 혹 사예(司藝)라고도 했고, 그 중 승(丞)은 혹 직강(直講)이라고도 하였다.
그 때 전교시(典敎寺)는 지금의 교서관(校書館)이었다. 그중 통례문(通禮門)은 혹 합문(閤門)이라 하기도 하여, 사(使), 부사(副使), 지후(祗候)가 있었으니, 지금의 좌우통례(左右通禮) 따위였다. 그때 전의시(典儀寺)는 지금의 봉상시(奉常寺)이고, 그때 통문관(通文館)은 지금의 사역원(司譯院)이었다.
그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지금의 비변사(備邊司)와 같았던 것인데 혹 도병마사(都兵馬使)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그때의 문하(門下)를 합쳐서 의정부(議政府)로 만들었다가 후에 와서 다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순군부(巡軍府)는 지금의 포도청(捕盜廳)이었고 금오위(金吾衞)는 혹 비순위(備巡衞)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의금부(義禁府)와 같았고, 안렴사(按廉使)는 지금의 감사(監司)와 같았던 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도평의사(都評議司)를 의정부라 하고 순군부(巡軍府)를 금부라고 하였으니, 이는 틀린 것인 듯한데, 송도(松都) 정도전(鄭道傳)의 기(記)에 상고할 수 있다.
<성호사설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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