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문하시중(1273-1275), 첨의중찬(1275-1283), (도)첨의령 가자(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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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1-12 13:11 조회1,453회 댓글2건본문
충렬공께서는
(62세)1273년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나서 문하 시중(侍中)이 되신후
(64세)1275년 관제개편때,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하면서 첨의 중찬(中贊)이 되시고 (72세)1283년 벼슬에서 물러나실 때까지 역임하셨습니다.
즉, 문하시중, 첨의중찬은 명칭만 바뀌었을뿐 같은 직책임.
(84세)1295년 정월에 (도)첨의령(僉議令)에 가자 되시고, 이어 상락군개국공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호를 받으셨습니다.
이때는 세자(충선왕)가 정권을 잡은 시기로서, 세자(충선왕)가 8월 충렬왕에게서 동첨의사·밀직사·감찰사의 판사직을 맡아 3개월간 왕권대행을 하기도 했다.
1. 문하 시중 (1273-1275)
(62세) 1273년 원종14
○그리고 드디어 탐라를 평정한 공을 논하여,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변윤을 판추밀원사로, 김석(金錫)을 상장군 지어사대사로, 나유ㆍ송보연을 함께 대장군으로 삼았다.
(63세) 1274년 원종15 (충렬왕원년)
1274년 금년 정월 3일에 귀국 조정의 지시를 받고(원나라 총관 찰홀을 보내어) 즉시 큰 배 300척을 만들도록 조치를 취하여 추밀원 부사 허공을 전주도 변산에, 좌복사 홍록주를 나주도 천관산에 파견하여 재목을 준비하게 하였다. 또 시중 김방경을 도독사로 임명하고, 그가 관할하는 관원과 장령들도 모두 우수한 인재들로 뽑았으며, 필요한 인부와 장인, 자재들도 모두 국내 각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재촉·보장하도록 하였다.
(64세) 1275년 충렬왕1
<4차 入元> ○봄 정월 경진일에 문하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역적 토벌, 군량 공급, 전함 건조, 일본 정벌 등으로 인한 고려의 궁핍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 3월 신묘일에 왕과 공주가 북산(北山) 낙산사(洛山寺)에 갔다. 문하시중 김방경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2. 첨의 중찬 (1275-1283)
<1275년 관제개편>
원나라의 간섭은 직접 행정에도 미쳐 관제가 분수에 넘친다고 고치기를 강요하여 1275년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樞密院)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는 감찰사(監察司)로 고치고 육부(六部)도 폐합, 변경하여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로 하였다.
(65세) 1276년 충렬왕2
○ 가을 7월 ----- 중찬 김방경, 직사관 문련(文璉)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 13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2년, 1276년) 7월에 심(?)이 그들의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을 보내 표를 받들어 올리며 송나라를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元史 卷二百八 列傳 第九十五 外夷一 高麗-58/41]>
(67세) 1278년 충렬왕4
○ 겨울 10월 계축일에 김방경을 첨의(僉議) 중찬(中贊) 상장군(上將軍) 판 감찰사사(判監察司事)로 임명하고 은 10근을 주었다.
(69세) 1280세 충렬왕6
○ 첨의중찬 김방경이 글을 올려 시작하기를 청하니, 좋은 말로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하였다.
3. (도)첨의령 (1295-)
(84세) 1295년 충렬왕21
○ 봄 정월에 홍자번(洪子藩)을 첨의령(僉議令)으로, 조인규(趙仁規)를 첨의중찬으로 삼고, 중찬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에게 첨의령을 가자하였다.
▣《고려사》 제76권 - 지 제30 > 백관 1 >
판문하(判門下). 건국 초기에는 내의령(內議令)이라고 부르던 것을 성종 때에 내사령(內史令)으로 고쳤고 문종 때에 와서는 중서령(中書令)으로 고치고 그 정원을 1명으로, 그 품계를 종 1품으로 정하였다.
충렬왕 원년에 폐지하였다가 21년에 도첨의령(都僉議令)을 두고 김방경(金方慶)을 이 관직에 임명하였다. 얼마 후 원나라의 중서령(中書令)과 유사하다 하여 판 도첨의사사사(判都僉議使司事)로 고쳤으며 그 후에 영 도첨의(領都僉議)로 고쳤다.
<시대상황>
세자(충선왕), 1295년 8월 충렬왕에게서 동첨의사·밀직사·감찰사의 판사직을 맡아 3개월간 왕권대행을 하다가 원나라로 가 이듬해 11월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였다.
■ 동안거사집 (이승휴 著, 삼척시 번역 간행)
단모부(旦暮賦)
---이해 11월 12일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첨의령 충렬공)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충선왕)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충렬왕)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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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 개국공 경조 (上洛郡開國公京兆) 김방경(金方慶)저하는 ---
전후(前後)의 공을 크게 드날려서 그를 동번제로도원수(東번諸路都元帥)로 삼아서 ---
맏아들 영공(令公, =김흔)은 월편(越篇)을 계승했고,
막내아들(=김순)은 학사가 되어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도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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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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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첨의중찬은 충렬공께서 재상으로 계실때(62-72세)의 관직명이고,
(도)첨의령은 충렬공께서 벼슬에서 물러난후 노년(84세)에 가자된 관직명입니다.
통일해서 첨의중찬으로 해야 하는지? 첨의령으로 해야 하는지?는 많은 검토와 논의가 있어야 할 듯 합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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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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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자료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