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과 첨의령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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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11-12 11:17 조회1,267회 댓글0건본문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김흔, 김순(金恂), 김영돈(金永旽), 김영후(金永煦), 김사형(金士衡), 박구(朴球)의 기사 첨부〕
----- 1295년
9년에 또다시 글을 올리어 퇴관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추청 정난 정원(推忠靖難定遠)공신, 삼중 대광 첨의 중찬, 판전 이사사, 세자 사의 관직을 띠고 치사(致任)하게 하였다.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2. <고려사절요>에서
계미 9년(1283), 원 지원 20년
○ 12월에 중찬 ●김방경이 퇴직하기를 청하니, '추충정난 정원공신 ★상락공(推忠靖難定遠功臣上洛公)'의 작호를 더하여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을미 21년(1295), 원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
○ 봄 정월에 홍자번(洪子藩)을 첨의령(僉議令)으로, 조인규(趙仁規)를 첨의중찬으로 삼고, 중찬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에게 첨의령을 가자하였다.
○ ●김방경(金方慶)에게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의 작위를 주었다.
3.<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1993.8, 류선영, 전남대) 에서
충렬공 金方慶 48---충렬공의 만년 13 (연구논문3)
이러한 두 차례에 걸친 김방경 무고사건은 김방경의 권력성장과 관련되었다. 당시 김방경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막강하였다.
---이때 방경은 중찬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 일을 맡은 외에도 또 호두금부를 받고 원수가 되니 권세가 온 나라를 좌우하고, 그의 전답과 장원이 없는 데가 없었으며, 부하 장사들은 날마다 그의 문에 모여 들고 세력에 붙어 위엄을 빙자하는 자가 중앙과 지방에 횡행하였지만 금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19, 충렬왕3년12월)---
그는 국내적으로 최고직인 첨의중찬에 올랐고, 원으로부터는 호두금패를 받은 원수의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막강한 권력장악에 대해 반대세력의 견제가 나왔던 것이다.
<중략>
1281년 제2차 일본정벌로 실패하였다. 이후 김방경은 조인규의 참소를 받았다. 조인규는 왕이 행차할 때 김방경이 술에 취하여 예를 취하지 않고 지나간 것을 들어 김방경을 참소하였고, 이에 김방경은 순마소에 갇혔던 것이다. 이후 김방경은 곧 풀려났지만 그는 다시 사직을 원하였고 마침내 1283년(충렬왕9) 72세의 나이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왕이 김방경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또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고, 또 1295년 그가 첨의령, 상락군개국공으로 봉해지고 세자의 청으로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가 하사되었다.
충렬왕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4. <이승휴의 동안거사집>에서
이승휴(1224-1300)의 문집 동안거사집 <잡저(雜著) 일부>에 보면 충렬공과 이승휴의 주고받은 편지, 고부(古賦), 답신이 실려 있습니다. ***<잡저(雜著) 일부>라 함은 저자의 저술이 많았으나 산일(散佚)되고, 만년의 저작인 <촌거자계문(村居自誡文)> 등 14편만을 이르는 것이다.
충렬공 84세(=1295년) 11월 12일에 영공(令公=첨의령 충렬공)이 보낸 편지를 안집사(安集使=?안렴사)가 전하여 이승휴가 받아 보았다.
5. <성호사설에서>
*고려 관제(高麗官制)
고려의 관제는 지금 제도와 이동(異同) 이 있다. 삼사(三師) 와 삼공(三公) 은 한(漢) 나라 제도의 문하(門下) ㆍ 중서(中書) 처럼 되어 여러 관원을 맡아 통솔하였다. 그 중 낭ㆍ사(郞舍)는 간쟁(諫諍) 하고 논박(論駁)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혹 첨의부(僉議府)라고도 일컬었다. 판문하(判門下) 가 있었는데 혹 중서령(中書令) ㆍ 도첨의령(都僉議令) 이라고도 했고, 시중(侍中) 이 있었는데 혹 첨의중찬(僉議中贊)ㆍ 좌우정승(左右政丞) 이라고도 일컬었다.
찬성사(贊成事)가 있었는데 혹 내사시랑(內史侍郞)ㆍ평장사 문하시랑(平章事門下侍郞)ㆍ평장사 첨의시랑(平章事僉議侍郞)이라고도 했고, 평리(評理) 가 있었는데 혹 참지정사(參知政事) 라고도 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 ㆍ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ㆍ 상시(常侍) 가 있었는데, 상시는 좌ㆍ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 라고도 했다.
직문하(直門下) ㆍ 사의대부(司議大夫) 가 있었는데 혹 간대부(諫大夫) 라고도 했다. 그 중 헌납(獻納) 은 혹 보궐(補闕) ㆍ 사간(司諫) 이라고도 했고, 정언(正言) 은 혹 습유(拾遺) ㆍ 사보(思補) ㆍ 주서(注書) 또 중서주서(中書注書) 라고도 하였으니, 대개 낭ㆍ사(郞舍) 이하는 지금의 간원(諫院) 이었다.
6. <새국사사전> (교학사. 1996)
첨의부(僉議府) : 고려때의 관청, 1275년(충렬왕1)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을 아울러 설치한 관청. 관원으로는 좌․우 첨의중찬(左․右 僉議中贊), 첨의시랑찬성사(僉議中贊贊成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첨의참리(僉議參理), 참문학사(參文學事),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등이 있었다. 1293년(충렬왕19)에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개칭되었다.
7. <숭의전 기록에서>
세종 7년에 유사가 말하기를, “국가의 종묘에서 제사 받드는 것은 다만 5실(室)인데, 전조(고려)의 사당에는 8위(位)를 지내니 예에 합당하지 아니하다.” 하여, 이에 다만 태조ㆍ현종ㆍ문종ㆍ원종만 남겨두고 춘추 이중삭(二仲朔 음력 2월과 8월)에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하게 하였다.
12년에 전교하기를, “고려의 임금으로 공덕이 있는 자는 이미 제사를 받들게 했으나, 능(陵)이 무너진 곳을 개수하지 아니한 것은 차마 그대로 둘 수 없는 바이니, 능이 있는 곳은 마땅히 소재지의 관리로 하여금 땔나무를 베는 일을 금지하고 때때로 수축하고 보호하게 하라.” 하였다.
문종 원년에 숭의전에 편액을 하사하고, 고려 현종의 원손을 공주(公州)에서 찾아내어,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주어 부사(副使)로 삼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마전현(麻田縣)을 승격시켜 마전군으로 하고, 교관(敎官)을 두어 왕씨의 자손을 가르치게 하며, 고려의 명신으로서 공덕이 있는 자를 택하여 사당(숭의전)에 배향하였다. 문종의 하교는 문종조 고사에 들어 있다.
문종이 숭의전을 짓고 사람들을 시켜 왕씨의 후손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왕순례(王循禮)라는 자가 성명을 바꾸고 평민 행세를 하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 이웃 사람과 밭을 갈다가 밭 이랑을 다투던 끝에 그 사람이 관에 고하게 되었다. 임금이 곧 명하여 문과에 급제시켜 특히 3품에 올려 숭의전사(崇義殿使)로 삼아 왕건 태조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후청쇄어(侯鯖?語)》에는 명종조에 지었다 하였으나 그릇된 것이다.
숭의전의 배향 문종이 명하여 배향하였다.
태사 개국(太師開國) 무공공(武恭公)복지겸(卜智謙)
태사 개국 장절공(壯節公)신숭겸(申崇謙)
태사 개국 충렬공(忠烈公)홍유(洪儒)
태사 문하시중(門下侍中)인헌공(仁憲公)강감찬(姜邯贊)
태사 개국 무열공(武烈公)배현경(裴玄慶)
태사 내사령(內史令)장위공(章威公)서희(徐熙)
태사 개국 충절공(忠節公)유금필(庾黔弼)
수 태보(守太保) 문하시중문숙공(文肅公)윤관(尹瓘)
문하시중문열공(文烈公)김부식(金富軾)
문하시중위열공(威烈公)김취려(金就礪)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문정공(文正公)조충(趙?)
첨의령(僉議令)충렬공(忠烈公)김방경(金方慶)
정당문학(正堂文學)김득배(金得培)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이방실(李芳實)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안우(安祐)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정몽주(鄭夢周)
세조가 일찍이 강녕전(康寧殿)에 임어하고 명하여 숭의전부사왕순례를 입시하게 하여 어찬(御饌)을 내리고,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대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세종께서 왕씨의 뒤를 세우려고 하셨으나 성취하지 못하셨고, 태종(문종)이 비로소 숭의전을 세우셔서 그 제사를 잇게 하셨으니, 이제 나는 선세(先世)의 뜻을 받들어 이은 것이다.” 하였다.
중종 7년에 관리를 보내 소뢰(小牢 염소나 돼지를 제물로 하는 제사)로써 숭의전에 제사 지냈다.
왕태조(王太祖)의 화상(?像)이 처음에는 문경(聞慶)의 양산사(陽山寺 봉암사(鳳巖寺)의 속칭)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우왕(禑王)) 5년에 왜변(倭變)으로 말미암아 풍기(?基)용천사(龍泉寺)로 옮겨 모셨다가, 선조(宣祖) 병자년에 그 해당 관아에 명하여 의장(儀仗)을 갖추어서 숭의전으로 옮겨 모셨다. 《후청쇄어》
8. <고려 정치제도와 녹봉제 연구> (최정환 저)
高麗後期(고려후기)의 中書令(중서령)
성종 원년(982)에발족한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을 그뒤에 문종15년(1061)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이라고 고치고, 충렬왕(忠烈王)원년(1275)에 이르러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되었다.
충렬왕 원년에 중서문하성을 상서성(尙書省)과 병합하여 첨의부라 하였다. 이러한 개편과 더불어 중서령도 첨의령 또는 판도첨의사사 (判都僉議司事) 영도첨의사사(嶺都僉議司事)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시기에 따라 다르게 불리어 지면서 제수 (除授)되기 시작 하였다.
충렬왕 원년 이후 고려가 멸망하는 공양왕 때 이르기까지 중서령 (中書令)에 임명된 사례는 모두 22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중서령[[僉議令]]에 제수된 사람은 김방경 (金方慶)과 홍자번(洪子藩)이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은 충렬왕 9년 12월에 문하시중(中贊)을 치사한 이후 충렬왕 21년 정월에 중서령(僉議令)을 가직(加職) 받고, 홍자번은 중서령의 실직을 받았다.
충렬왕 20년 12월에 문하시중 이었던 홍자번은 충렬왕 21년 정월에 중서령을 가직받은 김방경과 함께 같이 중서령[[僉議令]] 을 실직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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