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외갓댁, 고모댁(10)낙랑군부인 경주김씨의 외가 언양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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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18 14:49 조회1,804회 댓글0건본문
언양김씨는 고려 중후기에 대단한 집안이다
위열공(김휘려)-익대공(김전)-문신공(김변)-정렬공(김륜)-무려 4대에 걸쳐 시호를 받았습니다.
김전의 따님이 김혼에게 시집갔으며 김혼의 따님은 김승택에게 시집오셨으며
김륜의 따님은 민사평에게 시집왔으며 민사평의 따님은 김묘에게 시집오셨다.
김취려(金就礪)
?∼1234(고종 21).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언양(彦陽). 아버지는 예부시랑을 지낸 부(富)이다.
음서로 정위(正衛)가 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으며, 이후 장군이 되어 동북계를 맡아 지켰고, 대장군에 발탁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몽고가 일어나 중국 화북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금나라를 정벌했고, 금의 지배하에 복속하고 있던 거란이 반기를 들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그런데 거란 또한 몽고의 공격을 받아 형세가 불리해지자 1216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이때 그는 대장군으로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또, 연주(延州)에 이르러서는 거란 군사가 강성하여 모두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더불어 앞장서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여 그에 힘입은 군사들이 적군을 무찔러 목베고 사로잡은 군사들이 2천4백명이나 되어, 거란은 드디어 청새진(淸塞鎭)을 넘어서 퇴거하였다. 이 전투에서 맏아들이 전사하였다.
1217년 거란군 5천여명이 다시 남으로 내려오자, 금교역(金郊驛:지금의 瑞興)에서 5군을 재편성하여 상장군 오응부(吳應夫)를 중군병마사, 상장군 최원세(崔元世)를 전군병마사, 차상장군(借上將軍) 공천원(貢天源)을 좌군병마사 등으로 삼았다.
그러나 5군이 출발을 지체할 사이에 거란이 동주(東州:지금의 鐵原)를 함락시키자, 당시의 집정자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상장군으로 전군병마사에 임명되어, 거란 군사를 명주(溟州:지금의 江陵)방면으로 패주시켰다.
그해 다시 거란이 여진족과 연합하여 침입하자 예주(豫州:咸鏡南道 定平)에서 교전하였으나 병으로 돌아왔으며, 1218년 거란이 또다시 침입하므로 병마사가 되어 서북면원수 조충(趙沖)과 함께 적을 강동성(江東城)으로 쫓아냈다.
이때 동진국(東眞國)을 쳐서 신하로 따를 것을 맹세하게 하고, 함께 거란을 토멸하겠다는 명분으로 고려의 동북면지방으로 들어와 공동작전을 제의한 몽고군과 그리고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1219년에는 의주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의 반란을 이극서(李克$서02)·이적유(李迪儒)와 더불어 평정하여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는 많은 공을 세워 1221년에는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樞密院使兵部尙書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를 거쳐 1228년에는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사람됨이 정직, 검약하였으며, 군사통제에 엄격하고 공정하여서, 사졸들이 추호의 범함도 없었고, 존경하였다. 일찍이 많은 공을 세웠으나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칭찬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고종묘정(高宗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김전(金佺)1
?∼1271(원종 1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아버지는 문하시중을 지낸 취려(就礪)이다.
1258년(고종 45)에 좌복야(左僕射), 1260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262년에 추밀원사, 이듬해 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守司徒知門下省事太子少傅)가 되었다.
1268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영(崔瑩)과 함께 단련조병도감판사(團練造兵都監判事)에 제수되었으며, 1271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익대(翊戴)이다.
김변(金賆)
1248(고종 35)∼1301(충렬왕 2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손지(損之).
아버지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전($전01)이며, 시중(侍中) 취려(就礪)의 손자이다.
1263년(원종 4) 문음(門蔭)으로 동북면 도감판관(都監判官)에 임명되고 1268년 봄 과거에 급제한 뒤 이듬해 국자박사(國子博士), 1270년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에 들어갈 때는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따라가 4년간 원에서 충렬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함께 귀국하여 이등공신에 녹훈되고 충렬왕으로부터 “너의 공은 큰데 나의 상은 작구나. 너에게 비록 죄가 있더라도 열번 범하면 아홉번은 용서할 것이며 자손들에게도 역시 같이 하리라.”는 내용의 서권(誓券)을 하사받기까지 하였다.
1277년 안중도(按中道)에 출보(出補)되고 1285년 이조(吏曹) 등의 판서를 거쳤다.
1290년 정당문학(政堂文學)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1295년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로서 동수국사(同修國史) 임익(任翊)과 원나라 세조(世祖)의 사적(事蹟)을 찬(撰)하였다.
이해에 우승지, 1298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감찰대부(監察大夫)를 거쳐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지냈으며, 그리고 1300년에 첨의참리(僉議參理)·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동수국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신(文愼)이다.
김륜(金倫)
김경직(金敬直)1
김희조(金希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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