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re] 金濤(연안김씨)안중온 두 대언에게 주다-척약재 김구용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5-11-21 10:56 조회1,975회 댓글0건

본문

김도, 안중온 두 대언에게 주다(奇金濤安仲溫兩代言)

兩君連袂步銀臺。두사람 소매맞대고 은대(승정원)길 걸으니

萬里靑雲脚底開。만리 푸른꿈이 다리아래 펼쳐지네

堪笑狂生時不遇。미친사람(나)는 때를 못만나 웃음지며

江山風月獨含杯。강산풍월을 노래햐며 술마시네

 

김도(金濤)
?∼1379(우왕 5). 고려 말의 문신. 자는 장원(長源). 연안부(延安府)출신.
1370년(공민왕 19) 8월 박실(朴實)·유백유(柳伯濡) 등과 함께 향공으로 뽑혀 정조사(正朝使) 권균(權鈞)을 따라 명나라에 갔다.
이듬해에 제과(制科)에 급제, 동창부(東昌府) 구현(丘縣)의 승(丞)에 임명되었으나, 중국어에 서투르고 고향에 노친이 있음을 이유로 사퇴하고 돌아왔다. 그가 귀국하자 공민왕은 예로 맞이하고 우사간 예문관응교(右司諫藝文館應敎)를 초수(超授)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사예(成均司藝)에 오르고 우왕이 즉위하자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서 좌사의(左舍議) 유순(柳珣), 기거사인(起居舍人) 박상진(朴尙眞),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안종원(安宗源) 등과 함께 환관의 정치간여 금지를 내용으로 도당(都堂)에 글을 올렸다.
또, 좌사의 안종원, 보궐(補闕) 임효선(林孝先), 정언(正言) 노숭(盧嵩) 등과 함께 왕에게 김흥경(金興慶)과 그 일당 왕백(王伯)·안소(安沼)·정귀수(鄭貴壽) 등을 내쫓고 유신(維新)의 정교(政敎)를 펼 것을 상소하여 김흥경을 언양(彦陽)으로 귀양보내고 그의 집을 몰수하였다.
1376년(우왕 2) 12월에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오르고, 이듬해 3월에는 지신사(知申事)로서 국자감시관(國子監試官)이 되어 정전(鄭悛) 등 99인을 뽑았으며, 곧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찬성사 홍중선(洪仲善)과 어울려 반대세력을 비판하여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데, 1379년 가노(家奴)가 연경궁(延慶宮)옛터의 돌을 훔친 일로 이인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그러나 환관 이득분(李得芬)의 도움으로 화는 면하였으나, 같은해 7월에 양백연(楊伯淵)의 옥사에 연루되어 효수당하였다.

 

 

安仲溫

 

고려말의 문신

 

安宗源의 長子   목은집에는 군부판서라고 나온다(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

1362년(공민왕11년) 예부시에 급제.  초명이 景溫인듯하다.

안종원의 아들로 안景良, 안景恭이 있는데 다른 아들인지 모르겠다.

 

안종원(安宗源)
1325(충숙왕 12)∼1394(태조 3).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 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축(軸)이다.
17세 때 과거에 급제,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選輔)되었다. 임기가 차서 승진, 전보될 즈음에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고 직위가 낮았으므로 그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안축은 이 소식을 듣고 가문에 인물이 났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1년 뒤에 삼사도사에 임명되었고, 공민왕초에 전법정랑이 되었다.
이때 많은 소송사건을 법에 따라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양광도안렴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내려온 공민왕을 충주에서 맞았다. 왕이 다시 음죽(陰竹)으로 옮기니 관리와 백성이 다 도망하여 왕이 접대를 받을 수 없게 되자, 그 책임을 물어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전법총랑(典法摠郎)에 승진되었다.
그무렵 신돈(辛旽)에게 아부하는 사대부가 많았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서 참소를 당하여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는데 그곳에서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제사지냈다.
한거하여 있기를 7∼8년, 신돈이 주살된 뒤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우왕초에 좌사의대부 유순(柳珣)외에 다섯 사람과 더불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환관의 폐단을 논하였으나, 재상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균관대사성·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였다가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된 뒤, 흥녕군(興寧君)에 피봉되었다. 이무렵 공민왕 때부터 환관으로 있던 김현(金玄)이 내사(內事)를 잘 정돈하지 못한다고 논박하여, 김현은 회덕현에 유배되었으며, 또한 환관의 수를 10명내로 줄여서 그들에 의하여 국정이 문란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사행(使行)을 기화로 금·은·말 또는 포목들을 밀반출하여 장사를 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1382년(우왕 8) 순흥군(順興君)으로 개봉(改封)되고 다시 공신호를 받았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최영(崔瑩)이 탐관과 권신들을 숙청할 즈음에, 그를 청렴근직하다고 하여 문하찬성사로 기용, 관리의 인사권을 맡겼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뒤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이 되고, 조선조에 와서는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