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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六友堂 찾기 보조자료_김안국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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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5-11-29 18:55 조회1,166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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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만 대부님께서 올리신 <가보>의 '육우당구기기 고조고 추술(六友堂舊基記 高祖考 追述)' 중 ‘달관 김모’로 추정되는 김안국의 묘비명(<국역 국조인물고> 제5집 10~11쪽)입니다.


‘육우당구기기 고조고 추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從兄 始慶 씨가 黃驪에 가서 살면서 우연히 마을 사람과 時事를 말하게 되었고, 梨湖에서 한 遺址를 얻게 되었는데 곧 先祖께서 선정하여 집을 지었던 곳이다. 지금은 達官 金某의 점유가 되었으니 推尋하여 얻을 수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 선조께서 노닐던 곳을 분명히 알았으니 그 땅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가슴에 차 있을 것이다. 더구나 從兄이 거주하는 곳과 선조의 古基가 불과 하루아침에 다다를 가까운 곳이니, 그 우러르고 탄식하고 또 기뻐하고 느끼는 것이 다른 고을에 견줄 바가 아니다. 아, 지난 날 나의 所有였던 것이 지금은 타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오늘 타인의 소유가 후세에 우리 집 물건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무릇 우리 同宗은 나의 말을 잊지 말고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김안국(金安國)


비명(碑銘)

정사룡(鄭士龍) 지음


- 전략 -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는 의정부에 들어와 우참찬(右參贊)이 되어 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임하였으며, 여름에는 전라도 관찰사에 특별히 제수되어 떠나려 할 때 편전(便殿)에서 불러 만나보고는 ‘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치적의 효과가 대단히 드러났으므로 특별히 선택해서 임명하는 것뿐이다.’라고 유시하였다. 공은 명을 받들어 선정(宣政)하는 이외에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게 된 조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비교하여 더욱 두루 미침이 더하였다. 이 해 겨울에 조광조 등이 귀양을 가자, 공 역시 파직되어 이천(利川)에 있는 촌장(村庄)에 물러나 살면서 조그마한 집을 따로 지어서 ‘사일(思逸)’이라는 편액을 걸어놓고 날마다 학문을 좋아하는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강론하자 제자들이 점점 번성하니, 당시의 의논들이 옳지 않게 여겨 더러 견책(譴責)을 하려 하였으나 공은 듣고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여전히 강학(講學)만 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528년 중종 23년) 중종이 영릉(英陵 세종의 능)에 전알(展謁)하러 갈 때 길이 이천(利川)을 경유하므로, 공이 의복을 정제하여 입고 도로 왼편에 엎드려 어가(御駕)가 지나가도록 기다렸었다.

공이 일찍이 여주(驪州) 천녕(川寧) 물가에 나아가 터를 잡아 조그마한 집을 지어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사를 하여 그 곁에 초정(草亭)을 만들어 놓고 멀리 산꼭대기에 올라가 의지하여 푸른 들판을 내려다보매 넓디넓은 뗏목을 타고 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정자를 ‘범사정(泛傞亭)’이라 명명하고, 또 옛 현인들이 풍취를 붙였던 물체를 취하여 여덟 가지 제영(題詠)을 삼아 그 당(堂)에 이름을 ‘팔이당(八怡堂)’이라 정해 놓고, 고을 사람이 술을 싣고 오는 자가 있으면 귀하고 천하거나 젊고 늙거나를 가릴 것 없이 번번이 그들과 더불어 실컷 마셨으며, 아침저녁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서 거닐며 시(詩)를 읊고 먼데를 바라보곤 하였는데, 앞으로 이렇게 수명을 마칠 것처럼 지낸 지가 19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은 일찍이 조금도 쇠퇴하지를 않았다.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에 동지돈령부사로 옮겼으며, 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예조판서에 오르고 가을에는 다시 우참찬 겸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는데, 이어서 좌참찬에 승진하였다.

- 하략 -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이런 귀하고 놀라운 자료가 나오다니
감사합니다. 일단 &lt;김구용&gt;란에 올려 두겠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범사정, 팔이당...  기억해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