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회곡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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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2-02 00:16 조회1,330회 댓글0건본문
7) 1608년,
<영가지> 간행시의 회곡리
회곡촌(檜谷村) : 하계곡(下桂谷) 서쪽 몇 리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 : 충렬공(忠烈公)의 집터
강과 시내가 합치는 곳에 외로운 산 충렬공 정자
상고산(上孤山) : 회곡촌(檜谷村) 앞의 남양담(南陽潭) 위 충렬공 정자
上洛臺 在府西金谷村
상락대(上洛臺) : 회곡촌(檜谷村)의 남쪽 기슭, 동쪽에 마암(馬巖) 절벽, 암서(巖西)에는 석대(石臺), 아래는 맑은 못
▣ 영가지
○영가지(永嘉誌)」<안동읍지(安東邑誌)>에 의하면 안동(安東)에는 김방경(金方慶)의 유적(遺蹟)이 곳곳에 산재(散在)하고 있다.
○회곡촌(檜谷村) : 하계곡(下桂谷)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 간다. 외로운 산이 강과 시내가 합치는 곳에 있으니 여기가 충렬공(忠烈公)8) 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유전(流傳)하기를 이는 충렬공(忠烈公)의 집터라고 한다. 충렬공(忠烈公)은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여러 대(代)에 걸쳐 벼슬하였다. 문극공(文克公) 설헌(雪軒) 정오(鄭?)와 대사간(大司諫) 설곡(雪谷) 정포(鄭?)는 외가이므로 와서 살았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1 pp56》
○상고산(上孤山) :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회곡촌(檜谷村) 앞의 남양담(南陽潭) 위에 있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12)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는데, 그 기초(基礎)가 지금도 남아있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2 pp91》
上孤山 上洛公金方慶作亭其上, 基礎尙在, 上洛臺 在府西金谷村, 金方慶嘗遊賞地 (「永嘉誌」卷 2, 山川條) 《출전 : 영남 사림파의 형성 pp57/영남대학교 출판부/이수건》
☞‘상고산 위에 상락공 방경 할아버지께서 정자를 지으셨는데 지금도 그 기초가 남아있다.’ 그리고 상락대는 ‘안동부 서쪽 금곡마을에 있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유상한 곳이다.’
○상락대(上洛臺) : 안동부 서쪽 25리 회곡촌(檜谷村)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일찍이 유상(遊賞)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동쪽에 마암(馬巖) 절벽이 있어 천길을 깎아 세운 듯 하다. 암서(巖西)에는 석대(石臺)가 반회(盤回)하고 기괴(奇怪)한 경치가 형용하기 어려우며, 아래는 맑은 못에 배를 댈만하고 위에는 수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돌 사이에는 비채(菲菜)가 많이 나는데, 전하기는 상락공이 심은 것이라 한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2 pp110》
<문화재청 홈>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224호
명 칭 영가지및책판 (永嘉誌및冊板)
분 류 전적류
수 량 일괄12책99판
지정일 1986.12.11
소재지 경북 안동시 길안면 대사리 206
소유자 권오기,권기백
관리자 권오기,권기백
영가지(永嘉志)는 안동지역의 대표적 향토지 초고본(草稿本)으로서 1602년 용만 권기((龍蠻 權紀)1546∼1624)공이 스승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선생의 명에 따라 편찬에 착수하여, 1608년에 8권 4책으로 초고본을 완성한 책이다. 이 초고본 영가지는 간행되지 못한 채 300여년간을 지내다 1899년에 척암 김도화(拓菴 金道和)와 도사 류도헌(都事 柳道獻)공의 발문으로 후손 상학, 상태, 상표가 판각하여 간행되었다.
8) 1635-1800년대 전반
1765년
충렬공 유허비를 건너편 안산에 다시 건립 (대산 이상정 서)
1814년,
유허비를 건너편 안산에서 옛 초당터로 이건
충렬공 유허비는
최초로 언제, 어느 위치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1635년 유허비가 실석된 것을 비로소 발견하였고
1717년 官에서 다시 건립할 곳을 선정하고
1765년 官에서 건너편 안산에 다시 건립 (전면 글씨는 대산 이상정 書)
1814년 후손들이 건너편 안산에서 충렬공 소거 초당유허 로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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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돈인(1783-1859)이 경상감사(安東官)로 부임하였을 때, 김성동 이라는 사람이 충렬공 유허지를 범하여(入葬하여) 4년동안이나 씨름을 하고 山송사가 걸려 있었음. 이에 감사 권돈인이 김성동을 가두고 移葬해 나갈 것을 명하는 <유허비 禁葬時 營題 (감사 權敦仁)>를 지어 남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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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구 비각을 철거하고 확장 중건
■ 문화유적총람 3편
【유적명칭】고려 충렬공 김방경 유허비(高麗忠烈公金方慶遺墟碑)
【관리번호】760-800-231-099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기타비(유허비)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시 대】조선시대 【관 리 자】기타(안동김씨대종회)
고려 충렬공 김방경 유허비(高麗忠烈公金方慶遺墟碑)는 높이 165cm, 폭 65cm, 두께 28cm로 1825년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인조 13년(1635)에 유허비가 실석된 것을 비로소 발견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훨씬 그 이전에 세워진 것은 알 수 있으나 그 연대와 장소는 미상이다.
숙종 43년(1717)에 관에서 다시 건립할 곳을 선정하였다. 영조 41년(1765)에 관에서 건너편 안산에 다시 비를 세웠고 전면 글씨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다. 순조 14년(1814)에 후손들이 합력하여 건너편 안산으로부터 충렬공께서 평소에 소거하시던 초당유허(草堂遺墟) 임좌(壬坐)인 바로 이곳에 이건하였다.
지금도 건너편 안산 밭에는 전에 유허비가 서있던 좌태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모습을 방불케하고 있다. 현재 이곳의 유허비 거북좌대는 이건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적혀 있다.
【참고문헌】안동시립민속박물관, 1995, <<안동의 비석>>, 201-202.
■ 안동김씨 족보
●유허비
在안동부 서선면이니 지금의 안동군 풍산읍 회곡동이라. 숭정을해 1635년에 失石되었음을 발견하고 숙종정유 1717년에 自官打量(자관타량)으로 竪碑(수비)하였더니 영조갑술 1754년(?1814년)에 후손 ★永淳이 案山에서 옛 草堂터 임좌로 옮겼다. 유허비 前面 大山 ★李象靖 書
●충렬공 유허비 및 비각 연혁 (유허비각內 있음)
1. 숭정을해 인조13년 (서기 1635년) 에 유허비가 失石된 것을 비로소 발견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훨씬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확신할 수 있으나 그 연대와 장소는 유감스럽게도 문헌에 기록이 泯滅(민멸)되어 未詳이다.
2. 숙종43년 정유 (서기 1717년) 에 官으로부터 다시 竪碑(수비)할 곳을 선정하였다 (以自官打量竪碑)
3. 숭정기원138년 을해 영조41년 (서기 1765년) 3월 일에 官에서 건너편 案山에 다시 碑를 세웠다. 비 전면 글씨는 大山 ★李象靖 선생이 쓰다 (유허비 규격은 높이 165cm, 가로 넓이 65cm, 두께 28cm)
4. 가경19년 순조14년 갑술 (서기 1814년) 에 移建成造都監(이건성조도감)에 前선전 ★永淳, 助役(조역)에 ★重玉(중옥) ★聲鶴(성학), (九+鳥)財에 ★鳳翼(봉익) 등 후손들이 합력하여 건너편 안산으로부터 충렬공께서 평소에 所居하시든 草堂遺墟(초당유허) 임좌인 바로 이곳에 移建 서기 1814년 5월 25일 未時에 立柱하고 동월 28일 卯時에 上樑(상량)하다. (都木手는 前낭청 ★權亨中)
건너편 案山 밭에는 전에 유허비가 서있든 座台石(좌태석)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어 옛 모습을 방불케 하고 있다. 현재 이 곳의 유허비 거북 좌대는 이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북 좌대의 규격은 높이 40cm, 길이 145cm, 가로넓이 125cm)
5. 구 비각은 근 200년의 오랜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자연 노후 頻落(빈락)하여 후손된 자들로서 항시 송구한 감을 금치 못하여 오든바 금반 안동김씨대종회 총회에서 다시 重建할 것을 만장일치 가결하고 서기 1985년 7월 20일에 구 비각을 철거하고 다시 이 곳에 확장 중건 서기 1985년 7월 26일 15시에 立柱하고 동월 27일 12시에 上樑하다.
♠ 전해오는 이야기 (김봉수 증언, 200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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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곡동 유허비각이 40-50년 전에는(현 비각으로 교체 되기전) 유허비각 벽면에 벽화가 사방에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벽화는 현 비각으로 교체하며 다 헐어버렸다고 하는데 너무나 아쉬운 일입니다. 안동유사 봉수님은 그 때 본 벽화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합니다.
● 유허비 禁葬時 營題 (감사 權敦仁)
山訟事(산송사)에 어찌 귀천이 없겠는가. 步數(보수)의 尺量(척량)이 이미 법전에 차이가 있으니 동일 葬地(장지)에서 禁(금)함에 귀천이 다르다는 것도 이미 스스로 명백한 것이다.
이 유허비는 비록 분묘와는 달라도 이것은 선현의 유적이 있는 땅이라 자손들이 지금도 愛護(애호)하고 있으니 樵童(초동)과 牧 (목수)라도 또한 다 指點(지점)을 하고 一道의 사대부가 지날때는 반드시 경례를 하고 비용을 분담해서 비를 세워 기록하고 집(閣)을 지어 존경하여 비각이라는 이름으로 원근에서 말하니 요컨대 온 동네 안이 모두 김씨의 舊物(구물)이니라.
비각 때문에 禁葬(금장)을 하니 비록 口實(구실)이라고는 해도 빈산 주인없는 땅에 한 조각 埋標(매표)로도 오히려 타인의 入葬(입장)을 금하는 터인데 이렇게 간다면 하물며 선현의 유적이 수백년을 相傳(상전)할 수 있겠는가
너는 한낱 아전으로서 부모를 葬事(장사)하는데 어는 山이라도 좋지 않는가. 비록 너희들이 서로 소송하는 곳은 신분이 아전으로서는 본대 감히 타인으로 더불어 시끄럽게 할 수 없는데 이에 감히 함부로 유허지를 범하여 一鄕의 사대부와 서로 4년 동안이나 씨름을 하고 있는데 어찌 이같은 무엄한 습성이 있느냐
山에 대한 소송의 曲直(곡직)은 고사하고라도 명분이 한번 어그러지면 백가지 폐단이 다 일어나게 되니 내가 부임하는 처음에 불가불 크게 착안을 하나니 ★金聲東(김성동)은 칼(枷)을 씌워서 엄하게 가두고 官에서 정한 날짜로 발굴해야 하나니 만일에 완강히 거부한다면 당장에 엄형에 처할 것임으로 각별히 星火(성화)같이 거행하여 허다한 訴狀(소장)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路上(노상)에서 바쁘게 쏘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라. (安東官)
● 권돈인(權敦仁)
1783(정조 7)∼1859(철종 10). 조선 말기의 문인·서화가. 본관은 안동.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재(#이23齋)·우랑(又#낭22)·우염(又髥)·번상촌장(樊上村庄) 또는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우의정을 지낸 상하(尙夏)의 5대손이며, 군수를 지낸 중집(中緝)의 아들이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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