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金水亭 (금수정)-김창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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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1-17 11:16 조회1,314회 댓글0건본문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三洲). 경기도 과천출신.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로 성두(星斗)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의 아우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한 뒤, 병조좌랑·사헌부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를 승명교정(承命校正)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소에 부드럽고 화기가 가득하지만 의리를 변핵함에 있어서는 성조(聲調)를 높여 기절(氣節)이 강개하여 담봉(談鋒)을 범하지 못하였고, 선입(先入)한 의견을 내세우지 않아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으면 곧 주장한 바를 양보하였다. 후학을 순순히 교화하여 모두 심복하게 하였다. 문장은 단아순정(端雅純正)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고, 시는 두보(杜甫)의 영역에 출입하였으나 답습과 조회(藻繪)를 일삼지 않고 고고건아(高古健雅)하였다. 학문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하였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라는 이이의 설에 대하여,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 하는 한 구절이 다르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하였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라고 하여 이황의 기발이승(氣發理乘)의 설을 찬동하였다. 또,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도 기의 맑은 것이 다 선하나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으나 탁한 기가 발(發)하여 된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성악론변 性惡論辨〉에서는 “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대체로 이기설은 이이보다는 이황의 설에 가까우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특히, 문장에 능하며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 朱子大全글疑問目》·《논어상설 論語詳說》·《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 《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문곡연보 文谷年譜》 등을 편집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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