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외갓댁 고모댁(20) 현풍곽씨 따님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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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1-20 17:24 조회1,317회 댓글0건본문
김구 어머니 곽낙원 (윤정모)
곽낙원 씨는 1858년 철종 9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나 1939년 망명정부 피난지였던 중국 중경에서
아들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거의 1세기동안 급류와 같은 역사 속에서 꿋꿋이
버텨온 그녀는 대한 독립도 보지 못한 채 먼 타국에서 객사해야 했던 것이 끝내 억울했다.
게다가 아들과 손자의 뒷바라지는 누가 해준단 말인가. 그녀의 소망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소원 풀이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아들의 소원은 대한독립이었다.
그날이 오면 함께 손잡고 귀국해서 나라가 없던 설움과 그 숱한 고생담을 지나간 역사의
뒷갈피에 꼭꼭 묻어두고 싶었다. 그러나 죽음은 단 5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 억울해서 어찌 눈을 감을까." 그녀는 아들에게 그 말을 남겼다.
험로 지켜준 모정
사회에 공헌하고 세상에 빛을 남긴 여성들은 대개 3가지 상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논개같이 애국을 하거나 황진이같이 문학을 남긴 여성이 있고,
둘째 지어미가 되기 이전부터 인격을 겸비했고 그래서 더욱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한석봉 어머니나 신사임당 같은 여성이 있는가하면,
셋째 고리키의 소설『어머니』에서처럼 처음은 그저 무지몽매한 아낙에 불과했으나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아들로 인해 점차 의식화되어 가는 여인상이 있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씨도 이 후자로 보는 것은 그녀가 여성으로서보다는 철저한
어머니로서 한평생을 살다 갔기 때문이다.
고귀한 뜻을 이해
먼저 그녀는 가난한 상민으로 태어났다. 때문에 짓눌린 백성들이 그렇듯 살아남기
위한 본능만 갖고 있었을 뿐 양반댁처럼 가풍이라거나 교육을 받아 따로 인격을 개발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14세가 되던 해에 입하나 덜기 위해(추측이지만)민며느리 비슷하게
시집을 갔다. 신랑 김순영은 가난해서 장가도 들지 못한 노총각으로서 당시 10년 연상인 24세였다.
어쨌든 2,3년간 종조부 집에 얹혀 살다가 태기가 있어 비로소 분가를 했는데 그때 나이 17세였다.
첫아이를 낳을 때 어떻게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세상에 나온
어린애가 차라리 죽어주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아들은 남의 젖을 얻어먹으면서 건강하게 자랐다.
건강할 뿐만 아니라 영민하고 똑똑해서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게다가 보통 상민들처럼 주어진 신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부당한 계급제도를
저항해서 서당 공부를 하는가하면 결국은 과거까지 응시하고 마는 특출한 인물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들은 본능적인 모성애만 베풀어주면 만족해하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고귀한 아들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그녀자신이 의식화되어야만 했다.
아들이 21세때 국모시해에 대한 보복으로 한 일본인을 척살한 데서부터 그녀의 길고 긴
옥바라지가 시작되었다. 아들이 황해도에서 인천감영으로 이감될 때 그녀는 가사를 전폐하고
아들을 따라가 끼니를 보살폈고 그나마 여의치 못할 땐 물상객주집에 식모로 들어가 그
품삯으로 하루 세끼 아들에게 사식을 넣으면서 수해동안 옥바라지를 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 니가 죽으면 우리도 따라 죽는다."는 말로 아들을 위로했던 마음 여린 어머니에 불과했다.
한때 떡장수까지
그러나 십수년 뒤 다시 국사강도범으로 아들이 17형을 받고 서대문교도소에 구속되었을 땐
이미 씩씩한 투사처럼 강인한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먼저 그녀는 단단한 각오로 집과 가재도구를
팔아 서울로 옮긴 뒤 떡장수를 하면서 옥바라지를 했고, 면회날이 되면 아들 앞에
나는 니가 경기감사가 된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힘주어 말하며 아들에게 용기를
주기도 했다. 비록 그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일본인 간수에게 굽신거리며 들어왔을지언정
아들 앞에서는 조금도 굴함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네라고 하겠네."
그리고 임정 때의 일이었다. 교묘히 형사의 눈을 피해 중국의 아들 곁으로 간 그녀는 지도자가
된 아들을 보고 "나는 이제부터 너라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만 나무랄지언정
자네에 매로 때리지도 않겠네." 라고 말하면서 이젠 자신의 아들이기보다는 나라에 필요한
중요한 인물임을 은근히 시사했다. 그러니까 나라의 몸이 한갓 어머니에게 좌우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들의 모든 것을 우러러 존중하면서도 단 한가지 용서하지 않았던 것은 아들 김구가
제 아내에게 잘못 대하는 것이었다. 소위 나라살림을 맡고 있다는 군자가 자식을 잉태하는
지어미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 사랑인들 진실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은 아들로 인해 의식화되기 시작했지만 곧 아들을 다스릴 수 있는 덕과 도량을 겸비한
곽낙원 여사, 동서고금을 통해 그 어느 성현의 어머니보다 위대한 것은 아들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한평생을 노력했다는 바로 그 점일 것이다
권문해의 부인 현풍곽씨
"이제 그대 저승에서 추울까봐 어머니 손수 수의 지으시니 이 옷에는 피눈물이 젖어 있어 천추만세 입어도 해지지 아니하리.
오호라, 서럽고 슬프다. 사람이 죽고 살기는 우주에 밤낮이 있고, 사물에 시종(始終)이 있음과 다를 바 없으나,
이제 그대 상여에 실려 그림자도 없이 저승으로 떠나니, 나는 남아 어찌 살리오.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고 말았네."
피를 토한다 하는데 이럴 때 쓰는 말인가.
권문해(權文海.1534-1591).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란 거질 백과사전을 편찬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30년을 살다가
먼저 간 아내 현풍곽 씨를 잃은 슬픔을 이렇게 노래했다.
슬하에 아들은 물론이고 딸 하나 없이 먼저 간 아내가 원통했으리라. 팔순 시어머니를 먼저 두고 간 아내가 참으로 원망스러우면서도
그 팔순 시어머니가 먼저 간 며느리를 위해 수의를 만들어야 하는 이 기막힌 현실이 차마 믿어지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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