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高麗時代 都評議使司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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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6-03-02 16:02 조회1,239회 댓글0건본문
동문선 77권
기(記)
고려국 신작 도평의사사청기(高麗國新作都評議使司廳記) |
홍무(洪武) 22년(고려 공양왕 1년) 12월 병오일에 전하께서 신(臣) 도전(道傳)에
게 명하여 이르기를, “도평의사(都評議使)라는 직책은 실로 대신들이 과인을 보
좌하는 요직이다. 내가 정사를 맡은 처음에 사사청(使司廳)이 마침 낙성되었으
니, 그대는 그 전말을 기록하여 밝혀 후세에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고 하시므
로, 신 도전이 절하고 머리 조아리고 아뢰었다.
국가에서 문하부를 설치하여 정치와 법을 맡기고, 삼사로 전곡(錢穀)을 맡기며
밀직(密直)으로 군사를 맡았는데, 각기 그 직책을 맡지만 큰 일이 있으면 세 관청이 모여 의논하니 도평의사사라 하였는데, 일에 따라서 설치하기도 하고 혁파하기도 하니, 대개 《주례(周禮)》에 관청이 연합하던 제도입니다.
근래에는 사사(使司)에서 여러 직책을 전적으로 맡아 항상 설치하고 혁파하지 않으니, 그 직책과 관질(官秩)이 벌써 다른 어느 관원보다 중한데도 일정한 청사가 없다가 이때 와서 새로 청사를 지었습니다. 문하 찬성사 신 우인열(禹仁烈), 평리(評理) 신 설장수(偰長壽)ㆍ신 김남득(金南得), 정당문학(政堂文學) 신 김주(金湊), 동지밀직사사 신 유화(柳和), 첨서밀직사사 신 이염(李恬), 자혜부윤(慈惠府尹) 신 유광우(兪光祐) 등이 그 공사를 감독하였습니다. 무릇 재목을 자르고 기와를 굽는 일들을 모두 고직(雇直)하는 무리들에게 시켜 공사를 부지런히 하도록 독촉하였으나, 달포 동안을 일하는 중 백성들이 수고로움을 몰랐습니다. 높다랗게 중앙을 차지한 것이 사사청(使司廳)이요, 날아갈 듯이 좌우에 마주 있는 것이 수령관청(首領官廳)인데, 수령관은 곧 옛날 경사(卿士)의 직위입니다. 행랑으로 짓고 담장으로 둘렀으며, 심지어 부엌과 곳간까지 완전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비로소 문하시중 신 심덕부(沈德符), 수문하시중 신 이국휘(李國諱)를 판사로 삼고, 삼사에서는 판사 신 왕안덕(王安德) 이하, 문하에서는 찬성사 신 정몽주 이하를 동판사(同判事)로 삼으며, 밀직에서는 판사 신 전사안(全士安) 이하를 사(使)로 삼아서 그 명칭을 바로잡았으니, 사사(使司)의 소임이 더욱 중하여졌습니다. 당(唐) 나라에서 다른 관원으로서 동평장사(同平章事)의 직함을 가진 이를 재상으로 삼았으니, 바로 이 제도입니다. 신 도전이 외람되이 용렬하고 소루한 자격으로 동판사사(同判使司)가 되었는데, 신에게 명하여 기문을 쓰라고 하니, 불민한 신이 무슨 말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논어》에 이르기를, “가까운 데서 비유를 취한다.” 하였으니, 신이 이 청사에서 비유하여 아뢰겠습니다.
당우(堂宇)는 비유하면 임금이요, 동량(棟樑)은 비유하면 정승이요, 터는 비유하면 백성이오니, 집터가 견고하고 두터워야 동량이 편안하고 높을 것이요, 그런 뒤에야만 당우(堂宇)가 견고하고 치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량은 위로 그 집을 받들고 아래로 터에 의지하니, 이것은 재상이 임금을 받들고 백성을 안무하는 것과 같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신하는 위를 위해서는 덕을 펴고, 아래를 위해서는 백성을 가르친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청사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집을 보고 우리 임금 받들 것을 생각하고, 그 터를 보고 우리 백성 잘 살게 할 것을 생각하며, 그 동량을 보아 자신의 직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옛날에 천자를 잘 도우는 이로는 고요ㆍ기ㆍ방현령ㆍ두여회같은 이가 있고, 열국(列國)에는 숙향(叔向)ㆍ공손교(公孫僑)같은 이가 있었는데 모두 이름난 정승이었습니다. 천자와 열국의 다름은 있지만 천시(天時)를 순하게 하고, 생민을 도우며 임금을 받들고, 여러 관리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그 직책이 한 가지입니다. 고요와 기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방현령은 계획하는 것으로, 두여회는 결단하는 것으로, 숙향은 곧은 것으로, 공손교는 은혜로써 잘하였습니다. 대개 계획이 아니면 일을 시작할 수 없고 결단이 아니면 일을 이루지 못하며, 곧음이 아니면 백성이 심복하지 않고, 은혜가 아니면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니, 이상 몇 사람같은 이들은 역시 그 직책을 잘 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진한 점이 있으니 반드시 선유(先儒)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이 정승의 할 일을 논한 것처럼 해야 됩니다. 진서산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 해야 한다.’ ‘자신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일을 처리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임금의 마음을 바로 하려면 역시 스스로 발라야 할 것이요, 자신이 이미 발라지면 모름지기 사람을 아는 밝음이 있게 되어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 우리 나라는 국운이 중흥하고 어진 임금과 밝은 신하가 서로 만나, 위에서는 성심으로 아랫사람을 대우하고, 아랫사람은 성심으로 위를 섬기니, 이것은 동방의 일대 성세(盛世)입니다. 정승된 사람들이 각각 스스로 면려하여 위에서 등용하여 준 의사에 부합하게 한다면, 사사(使司)의 설치가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기문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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