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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영가지>에도 고산정 기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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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3-11 21:54 조회1,1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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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83년 치사후

충렬공(김방경)이 늙어서 복주의 전나무골[檜谷]---◀<학봉집>에는 상락촌(上洛村, 금계金溪 아래 10리 되는 곳)이라 하였다.---에 물러나 살았다. <학봉집>



2) 1295년,

충렬공(김방경) 84세, 상락군개국공 작위와 식읍 1천호 식실봉 300호를 받았다. <고려사> <동안거사집>



3) 1312년,

문영공(김순) 55세, 선친 충렬공의 작위와 식읍을 이어 받았다. <김순 묘지명>

충렬공(忠烈公)은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여러 대(代)에 걸쳐 벼슬하였다. 문극공(文克公) 설헌(雪軒) 정오(鄭?)와 대사간(大司諫) 설곡(雪谷) 정포(鄭?)는 외가이므로 와서 살았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1 pp56》



4) 1342년 가을(10월), 1343년 여름

문영공(김순) 외손자 정오, 정포 형제가 회곡리에 들렸다. 그때 외삼촌 김좌랑(金佐郞) 승고(承古)가 복주의 전나무골[檜谷]에 한가로이 살고 있었다.<동문선 제11권> 정포가 제공과 함께 영가에 있는 외삼촌 김좌랑 승고 산장(山莊)을 다녀갔다.<설곡집>---◀김방경이 세운 정자에 손자 김좌랑(金佐郞) 승고(承古)가 거처한 것으로 볼수 있다.---


雪谷先生集 /詩 (정포)

永嘉。同諸公過金佐郞 承古 舅山莊

鞍馬悤悤閱數州。夕陽携手更登樓。謫來未厭湖山好。事去空驚歲月?。半壁殘燈孤館夜。傍?疏樹故園秋。欲知別後相思意。天際長江??流。


*정포(1309∼1345)의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본관은 청주(淸州). 최해(崔瀣)의 문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름. 설곡집(雪谷集)이 있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해(#해15)의 손자로, 판선공(判繕工) 책(責)의 아들이며, 최문도(崔文度)의 사위이다.



5) 1392년 12월,

익원공(김사형) 52세, 상락백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 300호를 받았다.<조선왕조실록>



6) 1559년 癸丑 가을

송암 권호문(1532∼1587) 27세,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했다. 대는 성산서(城山西) 즉 상락군 김방경 유상처에 있다. 이후 여러차례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했다.


松巖先生年譜 /年譜

八年癸丑先生二十土歲夏。---秋。遊上洛臺。臺在城山西卽上洛君金公方慶遊賞處有詩一絶 十一月。


*권호문(1532∼1587)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 본관은 안동. 이황의 문인.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함. 시가(詩歌)도 남김. 송암집(松巖集)이 있다.



6) 1571년 이전 3월 16일

퇴계 이황(1501∼1571)이 권호문(權判書) 강정(江亭)을 찾았다. 정자는 계곡(桂谷)에 있는데, 상락공 김방경의 옛 유상처이다. 상락암(上洛巖) 앞은 천길 낭떨어지 아래 물길이다. <퇴계집>


退溪先生續集卷之一 /詩

三月十六日。謁權判書江亭亭在桂谷。上洛公金方慶舊游處。

小舟橫渡一江天。草屋中閒謁退賢。上洛巖前千丈水。從今喚作判書淵。



7) 1587년 2월

학봉 김성일(1538∼1593) 50세, 안동부의 서쪽 낙동강 가에 있는 바로 김방경(金方慶)이 놀고 구경하던 곳인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하고, 북쪽 조금 위에 있는 고산정(孤山亭)을 유람하였다.

상락촌(上洛村)은 금계(金溪) 아래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김시중(金侍中)이 늙어서 물러나 살던 곳이다. <학봉집>---◀이 당시에는 회곡촌을 상락촌(上洛村)으로도 부른 듯 하다.---


■ 학봉전집 3 (2000. 6, 민족문화추진회)

연보

15년(1587, 선조20, 정해) 선생 50세

○2월에---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하였다. ---대는 안동부의 서쪽 낙동강 가에 있으니, 바로 김방경(金方慶)이 놀고 구경하던 곳이다. ○고산정(孤山亭)을 유람하였다. ---정자는 상락대 북쪽 조금 위에 있다. ---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을 방문하였다. ---선생은 송암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살면서 ---

○7월에 송암 권호문의 상에 곡하였다. ---장사를 지낼 적에 제문을 지어 제사하였는데 상심하고 애석해 하는 뜻을 극력 말하였으며, 묘갈명(墓碣銘)을 지었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8) 1608년

영가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가지(永嘉志)는 안동지역의 대표적 향토지 초고본(草稿本)으로서 1602년 용만 권기((龍蠻 權紀)1546∼1624)공이 스승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선생의 명에 따라 편찬에 착수하여, 1608년에 8권 4책으로 초고본을 완성한 책이다.


○회곡촌(檜谷村) : 하계곡(下桂谷 *현재의 풍산읍 계평리)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 간다. 외로운 산강과 시내가 합치는 곳에 있으니 여기가 충렬공(忠烈公)8) 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외로운 산에 있는 정자이니 고산정(孤山亭)이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유전(流傳)하기를 이는 충렬공(忠烈公)의 집터라고 한다. 충렬공(忠烈公)은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여러 대(代)에 걸쳐 벼슬하였다. 문극공(文克公) 설헌(雪軒) 정오(鄭?)와 대사간(大司諫) 설곡(雪谷) 정포(鄭?)는 외가이므로 와서 살았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1 pp56》


   ○상고산(上孤山) :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회곡촌(檜谷村) 앞의 남양담(南陽潭) 위에 있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12)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는데, 그 기초(基礎)가 지금도 남아있다. ---◀상고산(上孤山) 위에 정자를 지었으니 고산정(孤山亭)이다.---《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2 pp91》


上孤山 上洛公金方慶作亭其上, 基礎尙在, 上洛臺 在府西金谷村, 金方慶嘗遊賞地 (「永嘉誌」卷 2, 山川條) ---◀상락대가 있다는 금곡촌(金谷村)은 회곡촌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상락대(上洛臺) : 안동부 서쪽 25리 회곡촌(檜谷村)---◀학봉집에는 상락촌(上洛村)이라 적었다.---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일찍이 유상(遊賞)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동쪽에 마암(馬巖) ---◀퇴계집에는 상락암(上洛巖)이라 적었다.--- 절벽이 있어 천길을 깎아 세운 듯 하다. 암서(巖西)에는 석대(石臺)가 반회(盤回)하고 기괴(奇怪)한 경치가 형용하기 어려우며, 아래는 맑은 못에 배를 댈만하고 위에는 수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돌 사이에는 비채(菲菜)가 많이 나는데, 전하기는 상락공이 심은 것이라 한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2 pp110》



9) 현재의 기록


□ 경북마을지 하권

풍산면 회곡리

고려 명신 충렬공 김방경 장군이 노시던 곳으로 경관지로 알려진 낙동강의 절벽에 상락대마을 앞에 있다. 마을 앞의 소는 낙연이며, 그 앞에 단호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다. 상락대의 동편의 바위는 마암이라 가파른 절벽이 대의 경관을 더욱 높인다.


□ 안동김씨 족보

上洛臺碑 : 상락대 정상에는 낙낙장송이 우뚝 서 있고 절벽 아래는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충렬공께서 젊으신 시절에 무술을 연마하시고 공께서 거처하시던 별장이 있던 곳을 영구히 기념 보존하기 위하여 수십년 전에 안동군수로 있던 재환씨와 후손 대용, 범용 제씨가 기념비를 세웠다.

위치 : 안동시 풍산면 회곡동 앞 낙동강 건너편에 있다.


□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56호 (1997. 4)

上洛臺 복원사업 완료

지난해 40만원을 예산에 반영하여 상락대를 복원한 바 복원한 그 자리가 옛 상락대 자리가 아님이 그 마을 노인들의 증언으로 밝혀져 원 위치를 확인한 바 현 장소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옛날 坐臺가 확인되어 今春 3월 9일 원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낙암정(洛巖亭)

상락대에서 江기슭을 거슬러 굽이를 돌아 오르면 江心에 드리운 절벽 위에 고색창연(古色蒼然)한 한 채의 정자 낙암정(洛巖亭)이 있는데, 세종대의 문신으로 흥해배씨인 낙암(洛巖) 배환(裵桓, 1379-?,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인 배상지<裵尙志>의 아들)이 은퇴하여 만년을 지내던 별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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