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삼소재 김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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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3-20 10:35 조회1,661회 댓글0건본문
김종락(金宗洛)(1796∼1875)
김종락은 정조 20년(1796) 소산(蘇山)에서 태어났다. 호는 삼소재(三素齋).
삼소(三素)란 '소산에 살며 깨끗한 행실을 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벼슬에 뜻을 버리고 소산마을에다 초가집 몇 칸을 짓고 '지곡서당(芝谷書堂)'이란 현판을 달고 날마다
그곳에 거처하여 서사(書史)로 자오(自娛)하다가 고종 12년(1875) 80세로 별세하였다.
삼소재 기문은 학서(鶴棲) ★류태좌(柳台佐)가 지었는데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사후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첩이 내렸다.
三素齋
- 풍산읍에서 우회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하회마을 가는 길로 좌회전하여 1km 쯤 가가 보면 길 오른편에 있는 마을이 소산 1리이다. 옛날에는 이 마을 이름을 금산촌이라 불렀는데, 병자호란 때 청음 김상현 선생이 낙향하여 은거할 때, 김씨가 모여 사는 마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다 하여 소산으로 고쳤다 한다. 소산이란 이 름은 마을 뒷산인 소요산의 이름에서 글자를 취한 것으로 깨끗하고, 희고, 빛나는 산에 둘러 쌓인 마을이라는 뜻도 된다.
이 곳 소산마을에는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두 김씨 문중이 400여년을 세거해 오고 있다. 하나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태사(金太師) 선평(宣平) 공을 시조로 하 는 후안동김씨(後安東金氏 또는 新安東金氏)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마지막 임 금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열(銀說)공을 시조로 하는 선 안동김씨(先安東金氏 또는 上洛金氏)이다.
마을입구에서 100m 정도 진입하면 길 우측에 소산구판장이 나온다. 이 곳을 지나면 세 갈래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길은 청음 선생의 집인 청원루(淸遠樓)로 가는 길이며, 삼소재(三素齋)는 가운데 길로 가면 된다. 길을 따라 300m 정도 가 다보면 동야고택(東野古宅)과 안동 김씨 종택인 양소당(養素堂)이 길 오른쪽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곳을 지나 왼쪽 길로 접어들어 30m 쯤 가면 길 오 른쪽에 삼소재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 당호의 유래
이 집은 선 안동 김씨 시조의 18대손인 용추(用秋)공의 종택으로 당호를 "삼소재" 라 한다. 삼소재는 용추공의 5대손인 김종락(金宗烙)공의 당호이다. 선생의 문집 인 "삼소재집(三素齋集)" 에 실린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의 "삼소재기(三素 齋記)" 를 살펴보면 당호를 삼소재로 삼은 뜻을 알 수 있다. "내 친구 상락 김사 문 기언은 글을 인고 행의가 있는 집 사람이다. 하루는 와서 청하기를 '사는 집에 현판이 없을 수 없으므로 삼소(三素)라고 써 걸어서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 뜻은 '소리(素履)를 행하고, 소찬(素餐)을 먹고, 소산 (素山)에 산다는 것이었다. ' 나는 이르되 '아름다운지고 집의 이름이여!' 라고 하였다. (吾友上洛金斯文耆彦 讀書行誼家人也 一日 來請於余曰 所居之室 不可無扁 慾以三素字書揭 以萬警省之意 日行素履 食素餐 居素山余曰 美哉 堂之扁乎)" '삼소'의 뜻을 살펴보면 먼저 '거소산(居素山)'이란 사는데 소박하다는 것으로 맑고 척박한 두메의 헌 집에서 살며 천성을 기르고 가난에 안주한다는 뜻이며, '식소찬(食素餐)'이란 먹는데 소박하다는 것으로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맑고 참되 고 담박한 음식을 먹으며 서적을 벗하는 기쁨을 얻는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행 소리(行素履)'란 행하는데 소박하다는 것으로 욕심이 없고 깨끗하며 참되고 꾸밈 이 없이 빈부간에 분수대로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 건축물의 구성과 배치
이 집은 조선 현종 15년(1674)에 건립하였으며, 1985년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마을 중턱의 완만한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앞에 화단을 꾸미고, 그 뒤에는 ㅁ자집을, 우측에는 사당을 지었다. ㅁ자집은 다듬돌 3벌 쌓기의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6칸, 측면 5칸의 건물로 지 붕을 팔작과 맞배지붕으로 구성하고, 안채와 사랑채를 중문칸으로 연결하였다. 특 히 안대청 건너방 앞에 뒤주를 둔 것과 중문간 옆 외양간 위에 부엌에서처럼 다 락을 둔 점 등이 주목된다.
안채는 중앙에 3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 그 좌측에 안방 2칸과 뒷방 1칸을 만 들었으며. 우측에는 상방 1칸 반을 놓았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을 연등 천장으로 꾸몄으며, 외벽의 각칸에는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바깥채는 중문을 사이 에 두고, 왼쪽에 마구간 1칸, 부엌 2칸을, 오른쪽에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사랑채와 접하여 서실 1칸과 광 1칸이 있다.
삼소재의 편벽이 걸려있는 사랑채는 전면 좌측에 1칸 반의 방을 꾸미고, 그 우 측에 마루 1칸 반을 깔고 방과 마루의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내었다. 마루는 우물 마루로 머름이 있으며, 천장을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벽은 중방과 하방 사이를 판 벽으로 마감하고 널빤지 문짝을 달아 바라지 창을 내었다.
사당은 장방형의 자연석으로 쌓은 50cm정도의 기단위에 자연석 주추를 놓고 각주 를 세워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집으로 전면에 반칸의 퇴를 내었다 . 전면의 각 칸에는 넉살무늬가 있는 넌출문을 달았는데, 중간 칸에는 씽여닫이문 이며, 좌우는 여닫이 문이다. 그리고 양 측면벽의 중방 위에는 각각 작은 넉살광창 을 내었다.
○ 출전 : 안동의 名賢堂號(안동민속박물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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