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휘사렴) 묘소발견과 양성현감공(휘취) 묘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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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3-24 01:53 조회1,489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휘사렴) 묘소발견과 양성현감공(휘취) 묘소에 대하여
---안렴사공 18대손 禮黙 제공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것임.
안렴사공의 묘소발견과 관련한 몇가지 기록을 살펴보면
설1)
숙종4년(1678년)에 실전된 양성공의 묘소를 찾다가 당시 실전되었던 안렴사공의 지석을 발견하였다는 설,
설2)
숙종4년(1678년)에 양성공의 묘소를 새로 쓰기 위하여(묘자리를 구하다가) 주변을 탐험하던중 당시 실전되었던 안렴사공 지석을 발견하였다는 설이
일부 종인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어 이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견해1)
집안의 역사는 통상 족보, 묘비석 등을 통해 기록으로 남는다. 양성공(휘취)에 대한 출생과 서거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양성공의 묘소에는 묘비석이 있다. 묘비석은 망자의 사후에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양성공 묘비문 전면에는 ‘통훈대부 행양성현감 김취지묘’가
측면에는 ‘홍치10년3월 일‘ 이라 새겨 있다.
홍치10년은 연산군3년으로 서기 1497년에 해당되며 양성공께서는 1497년 이전에 서거하셨고, 1497년에 세운 비석이 현재 엄연히 실재하고 있으므로 상기 설1)은 옳지 않음을 알수 있다.
견해2)
안동김씨 대동보에는 안렴사공 묘소에 대하여 ‘실전묘소 공지증손 양성공취지묘 탐험지지 출토지석’ 이라는 기록이 있다.
해석하면 ‘묘소를 실전하였으나 공의 증손 양성공 취의 묘자리를 구하다가 지석이 출토되었다.’라는 의미이다. 즉 양성공의 묘가 실전되었다는 말은 없다.
견해3)
가장 문제가 되는 기록은 孤忠誌(1982년 간행)에 실려있는 <오은안렴사김선생시장 抄記> 중의 다음 기록이다.
‘肅宗四年戊午因得先生曾孫縣監吹失傳之墓而審視石槨中平塚之誌始識先生---’
‘숙종 戊午년(=1678)에 선생의 증손 양성현감 휘吹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돌무덤에서 평총한 誌石을 얻어 비로소 선생의 실전된 묘소 광중으로 알고 또다시 실전이 될까하여 이에 봉토를 하고 墓碣을 세웠다.’ 라는 내용이다.
견해4)
그러나 정작 홍양호의 이계집에 실려 있는 <고려안렴사오은김공사렴시장>에 보면
‘肅宗四年塚圯(이)而誌見後孫始築土---’ 즉
‘숙종4년 평총한 무덤에서 지석을 발견하여 후손이 비로소 봉토를 하였다.’ 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당시 금석학의 대가였던 이계 홍양호( 1724-1802) 선생이 <안렴사공 시장>을 지으면서 상기와 같이 고증하여 쓴 것이다.
결론)
따라서,
1)1497년 세워진 묘비석이 현재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2)문제가 된 <시장 초기>와는 달리 이를 근거로 작성된 <시장>에는 실전 기록이 없으므로
1678년 당시 양성공의 묘가 실전되었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1678년 당시 양성공 묘소를 재봉축하거나 혹은 이장하는 과정에 안렴사공의 지석을 발견하여 실전되었던 안렴사공의 묘소를 찾은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홍양호(洪良浩)
1724(경종 4)∼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군수 중성(重聖)의 손자이고, 진보(鎭輔)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경모(敬謨)의 할아버지이다.
1747년(영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교리 등을 거쳤고,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뽑히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경흥부사로 밀려났다가 홍국영이 실각되면서 1781년 한성부우윤이 되고, 이어 사간원대사간·사헌부대사헌·평안도관찰사·이조판서 등을 거쳐 1799년에는 홍문관·예문관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겸임하는 최고의 영예를 지냈다.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연경(燕京)을 다녀오면서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하여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고증학(考證學)을 수용,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영조실록》·《국조보감》·《갱장록 羹墻錄》·《동문휘고 同文彙考》를 비롯한 각종 편찬사업을 주관하기도 하였으며, 지방관의 지침서인 《목민대방 牧民大方》을 저술하였다.
특히, 1764년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일행에게 부탁하여 벚나무 묘목을 들여다가 서울 우이동에 심어 뒷날의 경승지를 이루게도 하였다.
1801년 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이듬해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이계집》 37권 외에 《육서경위 六書經緯》·《군서발배 群書發排》·《격물해 格物解》·《칠정변 七情辨》·《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고려대사기 高麗大事記》·《흥왕조승 興王肇乘》·《삭방습유 朔方拾遺》·《북새기략 北塞記略》·《만물원시 萬物原始》·《향약절중 鄕約折中》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문장이 아순(雅馴)하고 전측(典則)이 있어서 당시 관각(館閣)의 신료 중에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글씨는 진체(晉體)와 당체(唐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곡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神德王后私第舊基碑)와 수원성(水原城)의 북문루상량문(北門樓上梁文)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經山集, 萬姓大同譜, 朝鮮金石總覽. 〈韓榮國〉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문무왕비>
문무왕비는 일찍이 파손되어 현재까지 비편(비석의 파편) 몇 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 비편은 조선 정조 20년(1796년)무렵 당시 경주 부윤이었던 홍양호란 사람이 발견한 두 개 가운데 하나로, 이때의 탁본이 중국 청나라의『해동금석원』에 실리게 되었다. 그 뒤 비편의 소재를 몰랐으나 1961년 경주시 동부동의 민가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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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편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능비 가운데 가장 연대가 이른 것이며, 비문을 짓고 쓴 사람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된 중요한 금석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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