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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익원공 연보자료15 (52세, 13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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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12 23:25 조회1,7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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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보(禹玄寶), 1392년 이방원(李芳遠)일파에 의하여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렀다. 이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하여 다시 탄핵을 받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광주(光州)에 다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고,


○이숭인(李崇仁), 조선조의 개국에 이르러 자기와 함께 처세하지 않은 데 앙심을 품고 정도전이 보낸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하여 유배소에서 장살(杖殺)되었다.

---저서로 《도은시집》 5권이 있는데, 그 서문에 의하면 그의 생존시에 《관광집 觀光集》·《봉사록 奉使錄》·《도은재음고 陶隱齋吟藁》 등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임선미(林先味)

생몰년 미상. 고려의 충신.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양대(養大). 찬성사 중연(仲沇)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성석린(成石璘)·박상충(朴尙衷)과 친교가 있었다. 당시의 풍속은 백일상을 지내는 것이었으나 어버이가 죽자 3년상을 치렀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 태조가 고려의 유신(遺臣)을 등용하기 위하여 과거를 실시하였으나 태학생(太學生) 조의생(曺義生) 등과 더불어 이에 응하지 않고 만수산(萬壽山)에 들어가 속세를 등지고 충의를 지켰다.

세상에서 이들을 72태학생이라 일컫고 이들이 숨은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다.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名臣傳, 中京誌, 西河集. 〈金南奎〉

○정도전(鄭道傳), 이듬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일파에 의하여 격살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나와, 같은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왕조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몸에 안았다. 같은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조준(趙浚), 1392년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정도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정몽주가 죽자 풀려나와 찬성사·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이해 7월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피봉되고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정치적 실권이 점차 정도전에게 집중되자, 그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세자책봉에 대하여 정도전은 방석(芳碩)을 지지하였으나, 조준은 이를 반대하여 개국에 공이 많은 방원(芳遠)을 지지하였고,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면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요동공벌을 계획하던 정도전과 대립하여 공요운동(攻遼運動)을 반대하였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자연히 이방원과 가까워져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고, 평소 방원에게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주고 읽기를 권장하였다.


○이방과(정종),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 영안군(永安君)에 봉하여지고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으며, 그 이듬해 의흥삼군부 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 中軍節制使)로 개수(改授)되는 등 병권에 관여하였다.


○이방원(태종),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을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기를 도모할 때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하게 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해 정도전 등과 공작하여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 추대를 결의하게 하고, 왕대비(王大妃: 공민왕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게 한 뒤 이성계를 등위하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정안군(靖安君)으로 책봉되었을 뿐, 강비(康妃: 태조의 계비),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책봉에서도 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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