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문온공의 교류인물(5)조선왕조 창업의 숙명적 맞수 정도전과 하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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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4-20 11:14 조회1,520회 댓글0건본문
조선왕조 창업의 숙명적 맞수
정도전과 하륜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정도전. 태종 이방원을 도왔던 하륜. 이 두 사람은 고려시대 유학자 이색의 문하생이면서도 끝내 목숨까지 빼앗는 정적이 되었다. 이들의 출신 배경과 학문, 그리고 개혁정책을 재조명한다.
金 九 鎭 홍익대 교수·동양사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은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장량(張良)을 등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한나라를 세울 때에 일등공신 장량이 유방을 만나서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고사를 인용하여, 나라를 창업할 때에는 임금이 신하를 발탁해서 쓸 수도 있으나, 신하가 오히려 임금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서 같이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만약 정도전이란 인물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결코 조선 왕조를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공민왕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자기의 힘으로 쓰러져가는 고려왕조를 일으켜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돌아간 뒤에 자기의 주장을 펴다가, 도리어 실권자 이인임(李仁任) 등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영주·단양 등지에서 유배, 혹은 유랑생활을 했다.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초라한 초가에서 살기도 하고, 가난한 농부에게서 밥을 얻어 먹기도 하고, 손수 쟁기를 잡고 밭을 갈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을 할 때에 아내 최씨와 정도전이 주고받은 편지가 『삼봉집(三峰集)』의 「가난(家難)」에 실려 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또 터무니 없는 구설수에 올랐는지를 알 수 있다. 아내 최씨는 이렇게 불평했다.
『당신은 평상시에 부지런히 글을 읽느라고 아침에 밥이 끓는지 저녁에 죽이 끓는지를 알지도 못하시니,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곳간이 텅 비어서 한 톨의 식량도 없었습니다. 방 안에 가득한 아이들이 춥다고 보채고 배고프다고 울었으나, 제가 끼니를 도맡아서 그때 그때 꾸려나가면서도, 오직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여 뒷날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시면, 처자(妻子)들을 남이 우러러 보도록 만들고, 가문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나라의 법을 어겨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어, 몸은 남쪽 지방에 귀양가서 지독한 풍토병을 앓으시고, 형제들은 쓰러져 가문(家門)이 여지없이 망하니,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인(賢人), 군자(君子)라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정도전이 아내에게 답장을 쓰기를,
『당신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나에게 친구들이 있어서 그 정의가 형제보다 나았으나, 내가 패망한 것을 보고서 그들은 뜬구름처럼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본래 권력으로 맺어진 것이지 은의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도리는 한번 맺어지면 일생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원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데, 이러한 이치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집안을 걱정하는 것과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각기 자기가 맡은 직분을 다할 뿐입니다. 사람의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해, 영예와 치욕, 그리고 잘하고 못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닌데, 그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이 얼마나 가난에 쪼들리고, 또 홀로 낙담하고 절망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성계 찾아간 정도전
그러나 나이 40대가 되자, 정도전은 가만히 앉아서 현실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3년(우왕 9년) 가을에 정도전은 함주(함흥)에 있던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군영(軍營)을 찾아갔다. 말하자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개혁에 한계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당시 왜구를 소탕하여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성계의 힘을 빌려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군영으로 찾아간 정도전은 이성계 군영의 지휘 체계가 엄격하고, 군사 조직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만한 군대를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니, 이성계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물었다. 정도전은 짐짓 핑계대기를 『이만한 군대라면 동남방의 근심거리인 왜구를 물리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그는 군영 앞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이성계에게 시를 한 수 지어서 바치겠다고 청했다. 그는 즉석에서 나무를 하얗게 깎아서 그 위에 시를 썼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滄茫歲月一株松]
몇 만겹 푸른 산 속에 자랐도다.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다가 다음해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好在他年相見否]
인간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人間俯仰便陳踵]』
이 시는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여 읊은 것이다.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또 자기와 손을 잡고 큰 일을 하여 인간 세상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 것이라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1383년(우왕 9년) 8월에 정도전은 「변방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安邊之策)」이라 하여 국방에 관한 문제를 이성계에게 건의했다고 하는데, 정도전이 함주의 군영을 찾아갔던 까닭은 이러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성계에게 진언(進言)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때 이성계는 정도전이 제시한 계책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 같다. 그 이듬해인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정도전은 이성계와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맺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정도전은 이성계를 섬겨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다했다.
당시 정도전은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막강한 군사의 힘이라는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모시고 큰 일을 도모할 사람으로서 이성계라는 인물을 선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왕조의 창업을 위하여 한쪽은 지략으로써, 한쪽은 군사의 힘으로써 서로 협력했던 것이다.
풍수지리 밝았던 하륜
하륜(河倫)은 1365년(공민왕 14년) 겨우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년)에 감찰 규정(監察糾正)이 되어, 당시의 집권자 신돈(辛旽)의 문객(門客)을 규탄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 이때 그의 외삼촌 강회백(姜淮伯)이 위로하기를, 『너는 장래에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이니, 결코 시골에 묻혀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에 최영(崔塋)이 철령위(鐵嶺衛) 문제로 군사를 일으켜 명(明)나라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했다. 하륜은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에 의한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이 성공하자 그는 곧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옹립된 직후인 1388년(창왕 1년) 여흥(여주)에 유폐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 일파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하륜은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과 같이 우왕을 지지하는 유학자 일파로 간주되어 또 유배를 당했다.
이처럼 하륜은 고려 말엽의 유학자로서 이색 정몽주(鄭夢周)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파(親明派)에 속했으나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 일파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46세가 되던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이때부터 정도전이 권력을 잡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하륜은 언제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서 지방의 관찰사와 부사 같은 한직에 머물렀다. 그는 조선왕조를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 남은(南誾) 등의 개국공신파에게 견제당하여, 중앙정계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륜은 풍수지리학을 통해서 여러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륜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다른 점이었다. 당시 정통 유학자들은 이러한 잡설을 배격했다. 그러나 하륜은 이러한 잡설에까지 정통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상은 고루한 유학자와는 달리 현실성과 다양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1393년(태조 2년) 3월에 나라에서 계룡산(鷄龍山)으로 천도(遷都)하려고 하자, 하륜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여 천도 계획을 중지시켰다. 이리하여 하륜은 풍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인정을 받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륜은 다시 한양(漢陽)의 무악(毋岳)이 지리설에 맞는 길지(吉地)라고 추천하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실권자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무악(毋岳)은 지금 서울의 신촌 일대를 말한다. 하륜은 끝까지 무악이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에 묘청(妙淸)이 서경(西京,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부식(金富軾) 등 유학자들의 반대로 좌절된 것과 같았다. 중 묘청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시의 하륜은 그러한 힘도 없었다. 아마 이러한 좌절이 그로 하여금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에게 접근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방원 만남 간청한 하륜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 『하륜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하륜이 이방원을 만나보기 위해서 꾸며낸 계략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과 하륜은 이렇듯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또 두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었다.
만약 하륜의 지모(智謀)가 없었더라면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도 하륜은 살꽂이(箭串) 다리에서 태종 이방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무학(無學) 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서울로 돌아오던 날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이때 하륜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지주(支柱)를 아주 굵은 나무로 만들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로 차일 지주를 세웠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태종은 황급히 차일의 지주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넘기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지주에 꽂혔다. 이것을 본 태조는 크게 웃으면서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 하고 단념했다. 지금 남아 있는 「살꽂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정몽주와 절친했던 정도전
고려 말에 태어난 정몽주(1337∼1392년) 정도전(1342∼1398년) 하륜(1347∼1416년) 세 사람의 출생연도를 보면 나이가 각기 5년씩 차이가 난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정도전보다 5년 선배였던 정몽주는 정도전을 항상 동생처럼 이끌어 주고,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를 깨우쳐 주었다.
하륜도 이색의 문생(門生)이었는데, 정몽주와는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므로정몽주를 무척 어려워 했다. 하륜은 원래 정도전과는 친숙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권근(1352∼1409년)과 가까이 지냈는데, 하륜은 권근보다 나이가 다섯살 위였다. 정몽주가 1392년에 비명에 죽고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비명 횡사하자 하륜의 전성시대가 오게 되었다.
정도전은 자가 종지(宗之)이고 본관이 경상도 봉화(奉化)인데, 아버지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우씨(禹氏)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연도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태조 5년(1396년)에 그의 나이 55세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출생연도는 1342년이 틀림없다. 당시 본가는 영주(榮州)에 있었지만 그는 외가가 있던 단양(丹陽) 삼봉(三峰)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서 그의 호가 삼봉이 됐으며, 그의 유저로서 『삼봉집(三峰集)』이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고려 말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3품의 형부상서·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정운경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유명한 유학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서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그 문하의 젊은 유학자들과 교우할 수가 있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머리가 명석했다고 한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 윤소종(尹紹宗) 등과 친구가 되어 쉬지 않고 유학을 공부하여 높은 학식을 쌓아나갔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의 위치를 보면 경학에서는 정몽주 권근 등과 비길 만큼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으며, 문장에서는 이숭인 등과 앞뒤를 다툴 만큼 내용이 호방하고 글이 유려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켜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숭인과의 경쟁 의식이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에 그를 참혹하게 죽이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1362년(공민왕 11년) 10월, 약관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363년(공민왕 12년)에 충주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고, 1364년(공민왕 13년)에 전교주부(典校主簿)에 제수되고, 1365년(공민왕 14년)에 통례문(通禮門) 지후(祗侯)에 전보되었다.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1366년(공민왕 15년)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달아 당하여 고향 영주에 내려가서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부모의 무덤을 지켰다.
그후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370년(공민왕 19년) 여름에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에 임명되어 비로소 마음에 맞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 그때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고,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朴尙衷) 박의중 이숭인 등이 교관(敎官)을 맡았는데, 이들이 정도전을 추천하여 박사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나가 앉아서 유생(儒生)들에게 경서를 강의하고 토론하여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스스로 깨닫게 했다. 이때부터 고려의 성리학이 비로소 크게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절친한 교우관계를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孟子)』 한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정도전은 매일 그 『맹자』를 한장씩, 혹은 반장씩 읽고 철저히 연구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평상시에 정도전은 정몽주를 존경하고 그의 학풍을 추종했다. 후일 정몽주가 죽은 후에, 정도전은 그의 유학 체계를 조선왕조에 계승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가끔씩 자기만이 정몽주의 심오한 유학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의 혼란기에 나라와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유학의 보수파로서 정통 본류를 형성하여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애썼고, 정도전은 유학의 좌파로서 개혁을 추진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또 정도전의 혈통 문제를 시비하는 과정에 우현보(禹玄寶)와 이숭인 김진양 등과도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은 대개 고려 말엽 권문세가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의 어머니 우씨(禹氏)가 우현보의 집안이었는데 그 혈통에 천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禹洪壽) 등이 세상에 퍼뜨렸다. 집안 혈통이 미천하다고 하여 정도전은 동문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로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았다. 정도전이 새로운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헌부의 관리들은 임명장에 서경(署經,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정도전을 괴롭혔다. 이러한 시비로 말미암아 정도전은 이색 문하의 다정했던 친구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 결과 고민을 거듭하던 정도전은 신흥 군벌인 이성계의 군영을 찾아가서 그의 막료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명(親明) 주장하다 유배 당해
고려 말에 정도전의 일관된 주장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친명정책(親明政策)을 고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왕 창왕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젊은 유학자들은 몽고의 원(元)나라를 배척하고 중국의 명(明)나라와 가까이 하는 공민왕(恭愍王)의 배원정책과 친명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민왕이 죽고 난 다음 정권을 잡은 이인임 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을 취하자 정몽주를 비롯한 젊은 신진 유학자들은 이에 반대했다. 1375년(우왕 1년)에 몽고 본토로 쫓겨간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인하여 정도전은 배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친원파 이인임 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 나주군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이때 정도전의 나이 34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는데, 소박한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농촌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했다. 거평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정도전을 위로했고, 그가 거처할 초가를 짓는 일도 도와주었다. 정도전은 그 농민들의 온정에 감격했을 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농민들이 유식한 데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가 36세 되던 1377년(우왕 3년)에 귀양지가 고향땅으로 옮겨져서 영주와 단양의 삼봉 사이를 오가면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뒤에 거주지 제한이 풀려서 서울 삼각산 아래 초가를 짓고 「삼봉재(三峰齎)」라고 이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또 다시 부평의 남촌(南村)으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정도전은 친명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30대를 보내고 40대를 맞았다.
1388년(우왕 14년)에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여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 등의 친원파를 숙청하게 되자 정도전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이 직접 관여한 것 같지는 않다.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울 때에 정도전과 윤소종은 창왕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왕씨 중에서 다른 사람을 골라서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들이 신돈의 피를 받았고, 고려 왕씨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때에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서 이성계에게 협력한 조민수(曺敏修)가 창왕을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리하여 당시 명망이 높은 대유학자 이색에게 그 의견을 물었는데, 이색은 그의 제자 정도전과 윤소종의 주장을 묵살하고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판정했다. 목은(牧隱) 이색 같은 사람이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후손이다』라고 단정한 것을 보면 정도전과 윤소종이 『그들은 왕씨가 아니고 신씨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날조된 논리임에 틀림없다.
고려말 위기 모면한 정도전
그러나 1388년(창왕 1년) 11월에 정도전의 주장에 의하여 이성계 심덕부(沈德符) 지용기(池湧奇) 정몽주 등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므로 마땅히 가짜 왕씨를 폐지하고 진짜 왕씨를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 하고 창왕을 강화도로 추방하고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계획대로 고려의 왕실이 혈통문제로 말미암아 점차 권위를 잃어가고, 그대신 새로운 왕조의 창업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주장은 나중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할 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씨왕조 건국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신씨(辛氏)로 몰아붙여서 세가(世家)의 고려 제왕(諸王)에서 제외하여 열전(列傳)에 편입했던 것이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에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었다. 이성계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정몽주 김진양(金震陽) 등 유학자들은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오른팔인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한 다음이라야 이성계 제거를 도모할 수가 있다』 하고,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에게 정도전 등을 처형하도록 상소하게 했다.
간관(諫官) 김진양도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풀을 뽑을 때에는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결국 다시 싹이 나오며, 악(惡)을 없앨 때에는 그 근본을 없애지 않으면 그 악은 더 자란다」고 했습니다. 조준과 정도전은 악의 뿌리이고, 남은과 윤소종 등은 악의 뿌리를 북돋워서 덩굴로 자라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라면서, 정도전 남은 조준 윤소종 등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먼저 남은 등을 심문한 다음에 조준과 정도전이 관련이 있으면 그때에 가서 그들을 아울러 심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위기를 모면하여 보주(예천)에 귀양가는 데에 그쳤다. 정몽주 등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 직후 정몽주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해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되었다. 이때에 그의 나이가 51세였다. 정도전은 1등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서 봉화백(奉化伯)에 봉해졌다. 그는 개국공신 중 태조 이성계로부터 가장 높은 신임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도평의사사 판사(都評議使司 判事) 호조(戶曹)판사 등의 문관직과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 節制使)와 같은 무관직을 아울러 맡아서 실권을 잡았다.
조선 도읍 정한 정도전
1394년(태조 3년) 10월에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 정도전은 하륜의 주장을 물리치고 도성이 들어설 자리를 오늘날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정했다. 그 다음해 10월에 새 서울 한양의 궁궐과 종묘가 완성되자, 정도전이 새로 지은 궁전과 누각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도 사용되는 경복궁(景福宮) 사정전(思政殿) 근정전(勤政殿) 등의 이름은 그 당시에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또 도성(都城)이 완성되자 동서남북의 크고 작은 성문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지었는데,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성 안 5부(部) 49방(坊)의 이름도 모두 그가 지었다. 이처럼 조선왕조 창업 당시에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정도전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1393년(태조 2년) 7월에 정도전은 동북면 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함경도) 일대에 살던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편호(編戶)로 편입시켜 우리 백성으로 동화시켰으며, 1397년(태조 6년) 12월에 동북면 도선무사(東北面都宣撫使)로 나가서 동북 지방의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주군(州郡)의 경계를 정했다.
고려 때에는 여진족이 동북면 일대에 내려와서 농경생활을 했다. 이성계는 함주(함흥)의 대토호로서 그 세력이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을 통솔할 만큼 막강했다. 이성계는 길주(吉州) 출신인 여진족 대토호 이지란(李之蘭, 퉁두란)과 손을 잡고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이 조선의 판도 안에 들어오게 했다. 이리하여 조선이 건국하자 정도전을 도안무사로 보내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호적에 올리고, 그들에게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짓도록 생존권을 보장해 주었으며 우리나라 백성들과 여진족의 혼인을 장려했다.
4년 뒤에 정도전은 다시 도선무사로 나가서 동북면의 주(州) 군(郡) 현(縣)의 구획을 정하고 성(城)과 보(堡)를 쌓아 함경도 일대의 땅을 우리나라의 국토로 완전히 편입하는 작업을 했다. 후일 세종시대에 김종서(金宗瑞)가 개척한 6진(鎭)의 땅은 수복하지 못한 두만강 하류 일부 지역이었던 것이다.
1396년(태조 5년)부터 1398년(태조 7년) 정도전이 죽을 때까지 중국의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에서 보낸 외교 문서를 트집삼아 정도전을 중국으로 압송하라고 강요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입지가 정부 안에서 아주 어려워졌고, 이 틈을 타서 정적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일찍이 정도전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세 번이나 갔다 온 적이 있었다.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몽주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갈 적에 정도전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했는데, 당시 명나라 수도였던 남경(南京)에서 명 태조를 만나 우왕의 왕위 계승을 허락받고 공민왕의 시호를 받았다.
제1차 왕자의 난
1390년(공양왕 2년) 6월에 정도전은 「정당문학」으로서 성절사가 되어 명 태조를 만나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를 명나라에 고발한 사건을 변명했다. 정도전은 명 태조에게 황제의 사신을 조선에 보내 이 사실을 직접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는 위화도 회군 직후였으므로 명 태조는 요동 정벌군을 돌이킨 이성계를 두둔했고 주원장은 정도전을 위로하기를 『윤이와 이초가 그대 나라의 국사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을 알고 짐은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벌써 그들의 죄를 다스렸으니 그대 나라에서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리하여 윤이 ·이초의 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또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년) 겨울에 정도전은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를 만나 하례를 드렸다. 이처럼 명 태조는 정도전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정도전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1396년에 명 태조 주원장이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트집잡아 그 문서를 작성한 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나라로 압송하도록 강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여진족의 송환 문제 등 양국의 다섯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조선왕조의 실권자인 정도전을 강제로 압송하여 그를 볼모로 잡아두고 조선을 협박하려는 야비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으로 오가던 외교문서는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表文)과 황태자에게 보내는 전문(箋文)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표전문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내용과 경박한 문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표전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실제 문제의 표문을 지은 사람은 정탁(鄭擢)이었고, 교정한 사람은 정총(鄭摠)과 권근이었다. 그러므로 정도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명나라에서는 정도전을 「화(禍)의 근원」이라고까지 몰아붙이면서 중국으로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처럼 명 태조의 무리한 압력을 받은 태조 이성계는 『그가 나를 어린아이로 아는가?』 하고 크게 화를 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치욕을 참다 못하여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정벌할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진도(陣圖)를 만들어 지휘관과 각 도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지방의 성보(城堡)를 축성하고 군량미를 저축했다. 그러나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한 일이었다. 일찍이 최영의 요동 출병에 반대하여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태조 이성계가 아니었던가. 그가 다시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에 반대하던 절의파(節義派)를 설득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항상 정도전의 독주에 반감을 가졌던 조준은 『새로 창업한 나라로서 명분이 없는 군사를 가볍게 일으키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했다. 이리하여 요동을 정벌하는 계획은 일단 중지되었다.
1397년(태조 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총 김약항(金若恒) 노인도(盧仁度) 세 사람이 명 태조의 노여움을 사서 명나라에서 형벌을 받고 무참하게 죽은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해 3월에 예문관 학사 권근 등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가 표전문을 지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표전문 내용을 해명하는 한편,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명 태조의 환심을 사고 중국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정도전의 송환 여부는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는 중대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정도전 반대파인 이방원 일파는 표전문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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