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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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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6-05-07 21:31 조회1,5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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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란사


이성원(강호문학연구소)

월란사는 지금 '월란정사(月瀾精舍)로 되어 있으나, 옛 이름은 '월란사(月瀾舍)였다. '달빛고요(月安)', '달빛 물결(月瀾)'감도는 낭만적 이름의 암자였다. 강세황의 '도산서원도'의 우측 끝에 이 암자가 그려져 있다. 페허가 된 16세기에 농암, 퇴계에 의해 새삼 알려졌다. 농암, 퇴계는 여기서 '월란척촉회'를 개최했고, 퇴계는 이후 강학을 하기도 했다.

 

그후 버려진 정자를 의성의 안동김씨들이 중수하여 퇴계의 후손들과 함께 관리해왔다. 안동김씨들은 서노 만취당 김사원(晩翠堂 金士元)께서 퇴계에게 동문수학하고 이 암자에서 공부한 사실을 기념하고자 했다.

 

1993년, '월란척촉회'의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자 권오도, 이근필, 김창회, 유창동 선생 들이 논의하여 결성한 '속월란촉촉회'가 매년 청쭉 만발한 5월 초에 열린다.

월란척촉회(月瀾  會)

퇴계는 농암이 소요하는 곳은 '진경(眞境)'. 농암의 풍류는 '진락(眞樂). 농암은 이를 실천한 '진은(眞隱)'이라 했다. 진경, 진락, 진은은 강호생활의 궁극적 개념으로 강호문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강호문학은 이런 경지에 도달한 인물에게서 그 성취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농암, 퇴계는 이를 성취한 인물이 아닐까? 89세의 농암이 임종직전 퇴계에게 보낸 편지 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월란척촉지회는 나를 위해 연기한 듯하나 이제 나는 늙고 병든 몸이라 제외시킴이 어떻겠는가. 또한 일찍이 江山 전체를 그대에게 붙여준 편지가 있었는데, 다만 이번만은 언약도 있고 하니 부득불 병든 몸을 이끌고라도 그대의 뜻에 부응하고자 하니 요량하기 바라네.'
1555년 4월 10일, 농암 늙은이 손이 떨려 대강대강 쓰노라.

月瀾  之會 爲我延退之示 吾則老除 曾有江山全付于君之簡 但此則舊約
扶病欲副 竝須量照

嘉靖乙卯 4월 10일 聾老 手草草
「농암집」 '연보(年譜)'

'월란'은 월란사를 말하고 '척촉'은 철쭉의 한자 표현이다. 따라서 '월란척촉회'는 '월란사 철쭉꽃회'이다. 이 월란사에서 당시 농암, 퇴계를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문학동호인회와 같은 성격의 모임이 해마다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모임을 문학동호인회로 해석함은 농암, 퇴계의 만남에 문학이 없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강이면 강, 계곡이면 계곡, 절이면 절 어디에서도 문학적 행위가 동반되었고, 두 분의 회동에는 농암의 자제들과 퇴계의 제자들이 따라와서 그대로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강호문학'은 이들 그룹이 이루어낸 성과를 함축시킨 말이기도 하다.

400년 전 안동에 이런 동호인회가 존재했음은 놀라운 일로서, 당시 어디에도 이런 모임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가 '어부가', '도산6곡' 같은 걸작을 창작하는 동기가 되었고, 수많은 작품(시, 수필, 서간 등)을 잉태시켰다. 이러한 문학 동호회의 활동은 이미 잘 알려진 송순, 정철, 윤선도로 대표되는 '호남가단'의 빛나는 기록과 쌍벽을 이룬다.

그동안 안동의 강호가도는 국문학자에 의해 교과서적인 소개가 있었다. 그러나 안동은 이러한 문향으로의 전통과 향기보다는 예와 범절의 다소 경화된 이미지를 주는 고장으로 각인되어 있다. 퇴계 역시 '성리학자=퇴계'라는 등식이 고착화되어 '따뜻한 퇴계'보다는 어딘가 '근엄한 퇴계'로 인식되어 버렸다. 또한 '퇴계학'이란 용어마저도 퇴계를 이해하는 장애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가 하는 역설적인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퇴계학'은 '주자학=성리학=퇴계학'의 연상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안동은 예향(禮鄕)이다. 퇴계를 답습한 제자들이 삼엄한 성리학의 중압에 휘말려 한 때 안동문학이 엄숙주의로 흐른 적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문학본연에 대한 자세와 창작의 정열은 타고장을 압도한다. '글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글이 끊어지면 그 집은 끝난 집이다' 하는 말은 안동에서 흔히 듣는 소리이고, 그 동안 안동에서 간행된 많은 문집이 이를 증명한다. 조사에 의하면 영남 전체 문집 가운데 안동인의 문집이 절반에 이른다고 보고되어 있다. 또 문화재관리국 조사에 의하면 전국 문집 9권 가운데 2권이 안동의 문집이라 한다.
한권도 없는 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분량이 아닐 수 없다. 안동은 정녕 문향으로 손색이 없고, 이 같은 정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예향'과 '문향'은 안동문화의 핵심적 개념이다. 행(行)과 문(文)의 지(知)는 안동사람들의 내면에 부지불식간에 자리잡고 있는 지행일치의 규범이다. 안동사람들의 언어는 '조행(操行: 행동 됨됨이)과 글'이다. '안동양반'이란 말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다. 400년 전 존재했던 문학동호회-월란척촉회는 안동문화를 형성시킨 요소이자 모태였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는 간과할 수 없는 부문이 있다. 그것은 농암이 퇴계에게 '일찍이 강산 전체를 주었다'는 대목이다. 도대체 강산을 어떻게 주었다는 말인가? 공교롭게도 퇴계 역시 이에 호응하는 글을 남겨 '주고 받음'이 농암과 퇴계에게 심정적으로 교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글은 퇴계가 제자 종존재(靜存齋) 이 담(李 湛)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자네의 말은 이 곳(도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표현한 듯 하지만, 바로 여기에 진실로 농암 선생께서 황(滉)에게 임천지락에 빠진 취미를 삼가라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말을 음미하면 할수록 나에겐 더욱 호연한 기상의 청취가 더해질 뿐이다.'
「도산전서」, 서(書), '답이중구(答李仲久)'

'강산과 강호지락(江湖之樂)을 모두 주었다. 받았다'는 말은 예안, 도산 일대의 경치와 강호의 처소 및 일체의 문학적 주도권을 이제 그 진락을 터득한 퇴계에게 물려준다는 뜻이다. 퇴계는 '임천지락'이라 했지만, 포괄적 용어로는 '강호지락'이다. 퇴계는 그 '낙(樂)'을 농암이 전수해주었다고 했다. 지난 날 농암이 '정승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三公不換此江山)'이라고 할 정도로 사랑하던 강산의 정취를 이제 죽음이 임박하여 그 진락을 터득한 퇴계에게 기꺼이 전수하고, 일체의 문학적 행위의 주도권을 자신에게서 퇴계에게로 선양한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사림파문학'의 핵심에 강호문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영남의 강호문학은 농암이 문학적 측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 퇴계가 이를 철학적 측면에서 깊이를 갖추어 완벽한 하나의 인생의 길-道를 구축해놓았다. '어부가'와 '도산6곡'은 그런 세계관의 단면을 보여준다. '강호지락'의 낭만적 미의식과 이기철학의 학문적 사색이 깊이를 더해갔으니 '월란척촉회'의 문학적 성취 속에는 우리 고유의 진정한 문화의 도(道), '풍류(風流)'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농암, 퇴계에 의해 성취된 강호문학의 높은 경지는 세계 어디의 문학적 성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왕모산에서 내려다 본 원촌풍경. 월란사는 이 마을에서 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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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http://zikimi.an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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